제가 별 수 있나요?
그러니까, 그래도 괜찮은 사이라고 자부했던 그 사람이 내 뒷담을 했다고 한다. 피차 세상에 뒤에서 욕먹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까지 포함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인지라 신경이 쓰인다. 그리고 내 앞에서 당당하게 말할 용기도 없으면서 참 쉽게 뒤에서 남 이야기를 하는 그 비겁함이 괘씸하다.
생각해보면 내 삶에는 항상 안티가 있었다.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는 동급생 친구 한 명이 내 필통 같은 것들을 몰래 휴지통에 버리거나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학년 첫 중간고사 때 반에서 일등을 해서 선생님의 관심을 받았던 게 그 아이의 질투를 산 것 같다. 누군가는 내가 학과 술자리에 참가해서 선배들에게 아부도 하는 그런 싹싹함이 없다고, 웃지 않는다고 나를 욕했다. 외국 생활을 할 때는 생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내 소셜 미디어를 염탐하고는 '워킹 홀리데이 비자' 그거 뭐 좋은 것도 아닌 거 가지고 저길 가 있느냐고 험담을 했다고 한다.
이유라도 있는 뒷담이면 다행이지. 이유도 없이 날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도무지 나와 행동반경이 겹칠 일도 없고 대화를 할 일도 없는 사람이 유독 나만 보면 새우눈을 하고 쳐다본다거나,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꼽을 준다거나 하는 일도 있었다.
예수님 부처님도 안티가 수억이라는데.. 일개 인간인 제가 별 수 있나요?
처음에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그 이유를 나에게서 찾으려고 했다. 내가 그때 했던 그 말이 기분 나쁘게 들렸을까? 그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처럼 내가 정말 별로인 사람일까? 하지만 참 재미있게도, 내가 차갑다고 싫다는 사람에게 싹싹하게 대하자 이제는 가식적으로 보여서 싫다는 뒷담이 돌아왔다. 그렇다. 그들은 하물며 내가 인도에 가서 고아들을 돌보며 그 누구보다 숭고한 삶을 산다고 해도 착한 척한다고 싫어할 사람들이었다. 없는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나를 싫어할 권리를 찾아내고야 말 사람들 말이다.
누군가 당신을 뒤에서 열심히 씹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만큼 긴 시간을 당신을 생각하면서 보낸다는 것이다. 당신을 생각하고, 미워하고 누군가에게 당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못베길정도로 집착하고 있다는 거다. 사랑과 미움은 한 끝 차이라더니 참 아이러니다.
남을 쉽게 헐뜯는 사람에게 카르마 역풍을 맞게 될 거라고 저주할 필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지옥에서 살 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누군가 당신을 힐난한다면, 그건 그들의 문제다. 그들의 열등감, 질투심 그리고 한계를 질 낮은 방법으로 드러내는 것뿐이다. 다니던 회사에 유독 남의 뒷담을 심하게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자기 주변에 일어나는 사소한 모든 것 까지 다 자신에 관한 것으로 해석했다. 예를 들면,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 이야기를 하다가 웃으면 자신을 비웃었다고 간주하는 식이었다. 나도 별거 아닌 걸로 그 사람에게 욕을 먹은 적이 있어서 뭘 저렇게 모든 걸 확대해석 하나 짜증이 났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사람이 측은해졌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이미 지옥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열등감과 부정적인 감정이 만들어낸 지옥 말이다. 매일 남을 비교하고, 미워하며 인생을 허비하는 가련한 영혼. 그는 남을 미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 사람이다. 이미 지옥을 지나고 있는 사람을 굳이 저주할 필요 뭐 있겠는가.
1997년 'Human Nature'지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대화의 65%는 실상 가십이라고 한다. 누군가를 힐난하는 비난이 아니더라도 어쨌든 대부분의 대화 주제는 자신 및 다른 인간들에 관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도 완벽한 무죄는 아닐 것이다. 나 역시 내 짧은 경험과 사고를 바탕으로 누군가에 대해 평가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서로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끝이 없기에 살아가면서 또 누군가 당신을 욕하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장담컨대 백 퍼센트의 확률로. 슬퍼할 필요도, 흥분할 필요도 없다. 그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저기요, 그쪽도 만만찮게 욕먹고 있거든요?라고 상대해주면 그만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