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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therine Mar 11. 2021

생각이 기도보다많아질 때

삼상 27:1-12/ 한홍 목사님

- 한홍 목사님 설교 타이핑입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우리는 자신을 쫓아오는 사울을 두 번 용서하는 다윗의 거룩한 결단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3천 병력 안으로 무사히 다윗을 잠입시키셨다가 다시 나올 수 있게 하셨지만 다윗 스스로 그 기회를 포기하고 사울을 용서하는 놀라운 결단을 보여줍니다. 사울의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와서 멀리 떨어진 뒤에야 큰 외침으로 사울 진영을 깨울 뿐이었습니다. 사울 왕과 그가 이끄는 병력은 모두 기가 꺾이고 부끄러움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골리앗을 물리쳤을 때보다 더 위대한 결단이 바로 사울을 향한 '용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한 결단이 아니고 성령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결단입니다. 사람의 방법과 감정을 따르면- 광야에서 정처 없이 쫓기는 어려움을 끝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길과 때를 기다리겠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놀라운 결단을 했던 다윗이 오늘 본문에서는 실로 충격적인 의외의 결정을 합니다. 부하들을 모두 이끌고 적대국 블레셋으로 망명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도피생활을 시작한 지 거의 8년쯤 지난 B.C 1200년 경에 일어난 일입니다. 초기에도 다윗은 블레셋으로 망명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그와 함께한 병력도 몇 되지 않았음에도 블레셋 신하들은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골리앗을 죽였던 다윗이 망명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고 그들의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다윗은 졸지에 정신병자 흉내를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쓴 경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8년이 지난 후에 수많으 식솔들을 데리고 또 블레셋으로 향한 것입니다.


1. 다윗의 부정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안타까운 결정


삼상 27:1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다윗은 생각했고, 사울을 두려워했습니다. 이것이 포인트입니다. 지난주 본문에서는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수많은 병력조차 하나님의 사람 다윗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는 다윗을 향해 자신의 입으로 축복을 선포해주기까지 했었습니다. 적군의 우두머리에게서 항복과 다름없는 축복의 말을 들었으면 용기백배할 것 같은데 다윗의 마음은 반대였던 것 같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용서했지만, 믿지는 않았기에 사울이 다시 병력을 이끌고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거기에 한 발짝 더 나아가 오늘의 본문에 보면 다윗은 자신이 사울의 손에 붙잡힐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어성경에서는 얼마 가지 않아 붙잡힐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원래 부정적이고 패배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10대 소년이었을 때 지키던 양 떼를 위협하는 맹수가 나타나면 다른 목자들은 다 달아나도 남아 싸웠던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군대가 골리앗을 두려워했을 때 다윗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홀로 담대하게 골리앗과 싸웠고 하나님은 그에게 기적의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 뒤로 이스라엘 장군이 되어서 적군 블레셋과 치렀던 무수한 전쟁들 가운데 다윗은 한 번도 그들에게 등을 보이지 않았었습니다. 항상 백전백승이었습니다. 


그렇게 담대했던 다윗은 8년 가까운 도피 생활을 하면서 심신이 많이 지친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은근히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8년 동안 죄 없이 사울에게 쫓기면서도 반듯하게 말씀 따라 살려고 노력하여 사울을 두 번이나 용서했고 자신을 배반했던 십 사람과 그일라 사람들에게도 보복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살았는데 왜 하나님은 묵묵부답이신 걸까, 왜 상황이 더 나아지지 않는 거지? 다윗은 낙심 했고 지쳤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점점 줄어든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다윗은 그때 믿음의 동역자들이 했던 위로의 말들을 기억했어야 했습니다. 처음 사무엘 선지자가 집으로 찾아와 그에게 기름 부을 때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실 것이다."라고 했었습니다. 모두가 존경하는 선지자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언젠가는 여호와께서 너의 대적들을 온 지면에서 모두 끊어버리실 것이고 내 아버지 사울이 너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고 너는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다." 요나단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지혜로운 아비게일은 "여호와께서 내 주의 생명을 지키실 것이고, 내 주를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세우실 것입니다."라고 고백했었고 심지어 사울의 입을 통해서도 놀라운 선포가 이루어졌었습니다. "다윗, 너는 큰일을 행할 것이고 반드시 승리를 얻을 것이다. 네가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나는 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미래가 축복으로 끝날 것이라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다윗을 지켜오고 계셨습니다. 다윗이 도망 다닌 엔게디 광야는 사해 옆으로 쭉 뻗어 있는 오픈된 공간으로, 숨을 공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땅입니다. 있는 것은 지하동굴뿐인 엔게디 광야에서 수백 명의 병력을 이끈 다윗이 수천 명의 달하는 사울의 수색대를 피해 8년 가까이 도망 다닐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 지역이 훤한 지역주민들인 십 사람, 그일라 사람들이 계속 밀고를 했는데도 다윗이 죽지 않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었습니다. 그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한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아, 내가 곧 사울의 손에 잡혀 죽을 것 같아. 어떡하지? 하나님만 믿고 있다가 안될 것 같아. 내가 무언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겠어.'와 같은 부정적인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때까지 주셨던 소망의 말씀도 여러 번 체험했던 은혜의 체험들도 다윗은 잃어버린 것 같아 보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다윗의 모습에 우리의 모습이 오버랩됩니다. 믿음 좋은 분들도 인생이 힘들어지고 광야가 길어지면 그간 주셨던 은혜의 말씀들이나 영적인 체험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냥 부정적으로 상황을 해석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냥 사울뿐이라 난 다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낙심하고 절망하며 끝내 악수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러한 악수를 두게 된 것에는 물론 오랜 도피생활로 심신이 지친 탓도 있지만 더 큰 본질적인 문제는 너무 지쳐서 기도를 멈추고 그저 고민'만' 했다는 점입니다. 보통 다윗이 결정을 내릴 때 반드시 나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가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입니다. 다윗의 인생 가운데 있었던 큰 어려움들을 찾아보면, 아무리 상황이 힘들어도 그 문구가 기록된 상황들은 하나님께서 돌파구를 주시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성령의 은혜로 지혜롭고 담대한 결정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결정을 뒤에서 백업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여호와께 묻지 않고 회의하고 고민만 하고 독단적으로 결정한 문제들은 반드시 사고가 터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크리스천들은 크고 작은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앞서 반드시 기도하고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회의가 부족해서도 아니고 고민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전문성이 부족해서 실패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생각을 기도보다 더 많이 하게 되면 반드시 악수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좋은 결정이지만 영적으로는 우매한 결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떠나야 할 곳을 떠나지 않거나, 반대로 떠나지 말아야 할 곳을 떠나기도 합니다. 포기하지 말아야 할 레이스를 포기하기도 하고 포기해야 할 레이스를 붙들고 고통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늑대를 피하자고 호랑이 굴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블레셋 왕 아기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우상숭배에 빠져 사는 왕이었습니다. 그 땅은 폭력과 황금만능주의와 음란이 가득 찬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항상 적대 관계에 놓여있던 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당장 사울이 겨누는 칼날로부터는 지켜줄 것이라는 단편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지친 몸과 마음, 서운한 마음이 쌓여서 다윗은 하나님보다 사울을 더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의지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왕 아기스에게 의탁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고 600명의 부하와 그들의 식솔들까지 약 2천 명이 넘는 식구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가장으로써의 책임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결정은 다윗이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폭풍 속으로 다윗을 몰아넣습니다.


2. 다윗이 초기 블레셋 정착에 성공하다

4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


소식을 들은 사울은 다윗을 수색하는 것을 멈추었습니다. 8년 만에 처음으로 다윗은 편안한 마음으로 잠에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편안함은 결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세상도 우리에게 평안을 줍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평안을 주노니,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세상도 평안을 주는 것입니다. 돈만 있으면 좋은 리조트, 아름다운 해변도시에서 푹 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하지 않습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 타국 땅에 갔을 때 처음에는 좋았을 것입니다. 고급 호텔 스위트룸에 머물면서 마시고 싶은 만큼 술에 취하고 한껏 즐거움을 누렸지만 탕자의 행복은 결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물 떠난 물고기는 곧 고통스럽게 죽어갑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하나님의 사람도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5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바라건대 내가 당신께 은혜를 입었다면 지방 성읍 가운데 한 곳을 내게 주어 내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종이 어찌 당신과 함께 왕도에 살리이까 하니


블레셋 땅으로 피한 다윗은 사울 왕에게서는 피할 수 있었지만, 결코 긴장을 풀고 편히 안식하지는 못합니다. 그는 아기스 왕의 의심을 잠재우고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에게 가 자신이 당신의 종이라고 고백해야 했습니다. 정말 해서는 안될 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장군이 자신이 무찔러야 할 적장을 자신의 주인이라고 칭한 것입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그런 척할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연기하다가 그대로 닮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그 후 계속된 블레셋 망명생활 동안 다윗은 그의 환심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그의 종노릇을 하게 됩니다. 자기는 아니라고, 쇼라고 생각했지만 자꾸 블레셋 왕의 마음에 들기 위해 행동하다 보니까 다윗의 행동이 점점 블레셋 인들과 다를 바 없어져 갔습니다. 블레셋 화 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2천 명의 병력이 왕궁 근처에 머물면 자칫 관계가 끊어질 것을 염려하여 아기스에게 지방 성읍을 줄 것을 요구합니다. 미움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는 안전하게 거리를 두는 것입니다. 똑같은 이유로 아기스 왕도 동의합니다.


6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이 지역은 이스라엘 국경지역에 있는 땅으로, 아기스 왕은 다윗의 부대를 이용하여 사울의 침입을 막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아기스 왕과 다윗은 서로를 이용하기로 하는 굉장히 불안정한 공존 관계를 맺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시글락 성을 기점으로 해서 잠시 쉼을 가지는데 이때 다윗에게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다윗이 머문 지역이 블레셋 땅이었지만 이스라엘과 국경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베냐민, 단, 므낫세와 같은 이스라엘 용사들이 다윗에게 속속 합류했던 것입니다. 


역대상 12:22 그때에 사람이 날마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돕고자 하매 큰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더라


비록 망명생활 중이었지만 새로운 용사들이 자신을 찾아오는 것을 보고 다윗은 용기가 났을 것입니다. 역시 블레셋으로 망명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착각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왜냐면 사단 또한 우리의 영적 분별력을 흩어놓기 위해 처음에는 성공하는 듯 해 보이는 상황을 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7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산 날 수는 일 년 사 개월이었더라


다윗이 이스라엘과 평생을 적대관계에 있었던 블레셋 땅에서 16개월을 살았다는 것은 그가 철저하게 블레셋 화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기스 왕과 그의 신하들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그들의 뜻에 맞추고 그들의 생각에 맞추면서 자신을 낮췄을 것입니다. 물론 다윗은 살아남기 위해 잠깐 흉내만 낸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타협하고 빛의 존재여야 하는 사람이 어둠이 되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다윗과 아기스 왕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려는 목적이 있었지만, 누가 누구를 이용하는지는 이제 두고 보아야 할 일이 되었습니다. 


3. 다윗이 살아남기 위해 무섭게 변하다.

다윗에게 찾아온 이스라엘 병력들은 좋은 소식이었지만, 그만큼 다윗이 먹여 살려야 하는 식구들이 늘어난 것이기에 그에게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모든 CEO들이 고민하듯 다윗은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고민 고민하다가 무서운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8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노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주민이라


국경지역에 살았던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 아말렉 사람을 침노하여 그들의 물자들을 약탈하고 그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이들은 예로부터 이스라엘과는 적대관계였지만 블레셋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고 친밀한 동맹관계도 아닌 그저 그런 관계였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적대국을 침략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을 위한 물자를 확보하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이들 부족들을 공략하면서 사람은 모두 죽이고 가축들과 물자들은 모두 확보하였다는 것은 이 전쟁의 목적 자체가 처음부터 전리품 획득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 일로 미루어 보아 블레셋 왕 아기스는 다윗에게 지방 성읍 시글락은 내주었지만 그들을 위한 식량이나 물자는 전혀 공급해 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다윗이 국경지역 마을들을 초토화시키고 거기서 얻은 물자로 자급자족을 했던 것입니다. 이때 다윗은, 그곳에서 얻은 전리품들을 가지고 바로 시글락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기스 왕에게 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가진 정치적인 센스를 엿볼 수 있습니다. 빼앗은 전리품 중 특등급에 해당하는 물품들을 아기스 왕에게 바쳤을 것입니다. 어차피 국경지역을 초토화시킨 이야기는 어떤 루트를 통해서든 아기스 왕에게 들어갈 테니 그럴 바엔 본인이 먼저 선수를 쳐서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 모든 것이 아기스 왕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얻은 승리를 위해서는 반드시 세상적인 왕에게 전리품을 주게 되어있습니다. 


10 아기스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 하니 다윗이 이르되 유다 네겝과 여라무엘 사람의 네겝과 겐 사람의 네겝이니이다 하였더라


아기스 왕이 "너희가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 하고 묻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매일 약탈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가 알고 있었고 또, 그가 가져오는 전리품을 좋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말씀에 나오는 네겝은 광야 지역입니다. 

즉, 다윗은 그림에 나오는 '거짓 보고한 정벌 지역'인 여라무엘 족속과 겐 족의 지역을 급습했다고 보고하고 실제로는 붉게 나타내어진 곳을 정벌했던 것입니다. 아직도 다윗을 의심하고 있을 수도 있는 아기스 왕에게 이제는 자신을 믿어달라는 제스처였던 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왕에게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하나님의 사람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거짓으로 상대를 기만하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합니다. 그는 거짓말에 능숙해진 것뿐만 아니라 잔혹해지기 까지 했습니다. 


11 다윗이 그 남녀를 살려서 가드로 데려가지 아니한 것은 그의 생각에 그들이 우리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다윗이 행한 일이 이러하니라 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거주하는 동안에 이같이 행하는 습관이 있었다 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증거 인멸을 위해 모조리 살해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관습은 이렇게까지 잔혹하지는 않았습니다. 전리품을 획득하고 포로를 살려두어 노예로 부리거나 했는데 다윗은 아무도 남겨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비밀유지를 위해서였습니다. 아기스 왕은 이스라엘과 친한 민족들이 죽었다고 알고 있는데 실은 다른 민족들을 죽인 것이 드러나면 일이 꼬일 것을 걱정하여 전멸시켜버린 것입니다. 목적이 있었다고는 하나 너무나 잔혹한 결정이었음은 분명합니다. 다윗이 아닌 어떤 괴물이 튀어나온 것처럼, 우리가 알던 다윗이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결과입니다. 상황이 힘들어서 기도해 보지도 않고 블레셋으로 망명한 것부터, 그리고 그 땅의 왕으로부터 환심을 사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 그 거짓말을 덮기 위해 대량 학살을 감행한 것. 이것은 세상의 영주들이 하는 방법이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살기 위해 기도도 없이 들어갔다가 그 땅에 사는 방식에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블레셋을 변화시킨 게 아니라, 블레셋이 다윗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믿지 않는 가정을 변화시키겠노라 결혼을 했지만 되려 역으로 세속화되는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듯이 본인만 모를 뿐, 이미 영적으로는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12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되었으니 그는 영원히 내 부하가 되리라고 생각하니라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일이 정말 잘 풀린 것 같아 보였습니다. 다윗의 거짓말에 아기스 왕은 깜빡 속아 넘어가 다윗을 총애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친한 민족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다윗이니, 절대 이스라엘 민족에게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연기였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이 악한 사단의 세력에게 총애받는 것이 좋은 일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당분간 다윗은 편안히 지내게 됩니다. 그러나 다음 주 본문에서 볼 것인데, 생각지도 못한 위기가 다윗에게 찾아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대격돌하는 큰 전쟁에 아기스 왕이 다윗의 부대를 블레셋 진영의 최선봉에 세우겠다고 결정한 것입니다. 그 큰 위기를 다윗은 뚫고 나와야 했습니다. 즉 아기스는 다윗을 사랑해서 공짜로 피난처를 제공해 준 것이 아녔습니다. 실은 사울과의 전쟁을 대비해서 선봉부대로 써먹으려는 속셈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성공을 줄 때 그것은 무조건 적이지 않습니다. 반드시 곧 청구서가 날아올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하나님께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 


3. 약속의 땅을 떠난 대가 : 영적 암흑 지대의 무서움

우리가 생각할 때 급하면 어디로든 도망 못 갈까 싶겠지만, 구약시대의 맥락에서 볼 때 하나님의 사람이 약속의 땅을 떠난다는 것은 엄청나게 큰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약속의 땅이 우리 눈에 보이기에 비옥하지 않다고 쉬이 그 땅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약속의 땅에 이집트 나일강과 같은 젖줄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땅에서 땅을 일구고 정착하여 그 성읍 사람들의 평안과 화평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땽을 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명을 버린다는 것과도 같습니다. 두려움의 노예가 되면 안 됩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아버지의 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었지만 아기스 왕은 다윗에게 도둑질하고 약탈하고 사람을 죽여서 살아남는 세상 방법을 말하고 세상 방법을 따라 살게 했습니다. 다음 본문에서는 시글락 성 또한 이방민족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8년 동안의 도망자 생활,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품 안이라면 버텨야 합니다. 하나님의 큐사인이 떨어질 때까지 버텨야 합니다. 지금까지 잘 달려오다가도 마지막 100m를 남겨두면 더 힘들어짐을 느낍니다. 그곳에서 모두 기도 줄을 놔버립니다. 마라톤도 의외로 결승선에 거의 다 와서 포기하는 선수들이 제일 많다고 합니다. 나중에야 자신들이 얼마나 결승선에 근접했었는가를 확인하며 땅을 치며 후회하는 선수들이 많다고 합니다. 다윗의 광야 생활은 10년입니다. 8년을 잘 버티고 마지막에 다 와서 악수를 둔 것입니다. 지치고 힘들어서 그랬다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이 결정을 내리기 전에 기도했다면, 다윗이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의 뜻을 물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망간 땅은 파라다이스가 아닙니다. 세상으로 도망치면 안 됩니다. 내가 보기에 좋은 길, 내가 보기에 좋은 곳으로 도망치듯 결정하면 안 됩니다. 다윗처럼 영적인 암흑 지대로 들어가 버리면 안 됩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예배의 영이 줄어들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구약학자들이 한 지적을 보면, 그 많은 시편을 기록한 다윗이 블레셋 땅으로 망명한 이 16개월 동안은 단 한 편의 시편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도망 다녔던 유다 광야에서는 오히려 시편을 많이 기록했다고 합니다. 찬양과 기도가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환심을 사려 노력하던 다윗에게서 찬양과 예배가 끊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영성이 줄어들자 다윗의 옛사람이 여지없이 일어나 괴물이 돼가고 있었습니다. 정신 차리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광야 생활이 힘든 사람이 있습니까? 다윗을 괴롭게 하던 사울과 같은 존재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매일 하던 기도를 이틀에 한번, 사흘에 한번 하게 된 사람이 있습니까? 성경 보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믿음의 친구들과 교제가 줄어들고 이전보다 사람들과 관계가 껄끄러워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과 행동이 사나워지고 갈수록 영적으로 공허하다는 생각이 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은 여러분의 본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괴물은 블레셋이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역의 자리는 반드시 지켜져야 할 약속의 땅입니다. 가정 또한 우리가 소중히 지켜나가야 할 약속의 땅입니다. 순간의 탈출구 같아 보이는 곳을 향해 약속의 땅,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땅을 떠나는 우를 범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거기 들어가 있으면 다윗 같은 사람도 블레셋 화 됩니다. 이미 영적인 암흑 지대에 들어가서 영적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이 있습니까? 오늘이 돌아올 날입니다. 우리는 다윗이지, 블레셋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결단이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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