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업에만 10년 있었더니 알게 되는 것들
이제는 너무 식상한 말이지만 흔히들 PM을 mini CEO 라고 한다. 그만큼 개발과 디자인 빼고는 다 한다는 소리다. 초기 스타트업을 보면 개발자 출신 CEO 분들이 기획에서 개발까지 다 하는 경우도 있고, PM역할 정도는 혼자서 하는 경우가 많다.
PM에게 요구되는 소프트 스킬 : 문제해결을 위해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일 (전략적 사고방식), 원활한 협업을 위한 커뮤니케이션 스킬
PM 에게 요구되는 하드 스킬 : 도메인에 대한 이해, 매크로를 읽는 경제학적 지식, 수익성 관리를 위한 재무지식, 사용자 경험(UIUX)에 대한 지식과 인간심리에 대한 이해, 개발지식, 법률체계에 대한 이해, 마케팅에 대한 이해
CEO 에게 요구되는 스킬 : PM 에게 요구되는 소프트 & 하드 스킬 + 투자/계약성공/판매를 위한 능력 (인맥, 설득력, 스피치 스킬 등) + 실패에 굴하지 않는 끈기 + 사람을 다루고 일을 위임하는 스킬 + 냉철한 판단 능력 (사업수완)
제너럴한 스킬들은 어느 회사를 가더라도, 어떤 사업을 하더라도 동일하게 중요하다. 학습능력이 뛰어난 분들이나 첫 커리어를 컨설팅에서 시작해서 다양한 산업의 수익구조와 매커니즘을 빠르게 파악해본 경우, 혹은 에이전시에서 다양한 제품을 기획해본 경우, 소프트 스킬들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기 때문에 어떤 도메인에서도 잘 적응하는 것 같다. 컨설팅 출신 대표님들이 한 번도 직원으로 일해본 적 없는 도메인에서 사업을 영위하고 투자를 유치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내가 지원하려는 포지션이 소프트 스킬을 중시하는지 도메인 지식을 중시하는지 잘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소프트 스킬을 중시하는 회사에 지원하면서 소프트 스킬은 원하는 수준보다 낮은데 도메인 지식만 많은 기획자라면 합격하더라도 적응하기 힘들다. 반대로 위와 같이 학습능력이 뛰어나거나 여러 산업을 빠르게 돌려본 경험이 없더라도, 소프트스킬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하드스킬 중에서 도메인 지식이 풍부하면 커버되는 경우가 많다. 채용 공고들을 잘 보면 '우대사항'에 빠지지 않는 게 해당 인더스트리의 근무 경험이다. 우리는 어떤 유/무형의 상품도 온라인으로 구매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정말 다양한 도메인의 기업이 IT 기획자(PM)을 필요로 하고 그만큼 각 도메인에서 다른 직무를 하던 사람도 하드스킬을 조금만 보충하면 기획자가 될 수 있다. '잘' 하게 되기 까지가 어렵긴 하지만 말이다.
나의 경우 기획자로서의 경력 (5년차)이 전체 경력(10년차) 대비 짧고 제너럴한 스킬이 상대적으로 조금 떨어지더라도, 금융업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경험으로 인한 이점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 직장인 은행의 업무 범주가 생각보다 넓고 핀테크나 이커머스 등 다양한 인더스트리에서 금융 본연의 기능을 일부 쪼개어 가져가고 있기 때문에, 배운 걸 적용할 수 있는 도메인이 넓어진다. 계좌, 카드, 예치, 투자 등에 대한 기본 시스템과 매커니즘을 알기 때문에 금융업 내에서는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최근에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면서 나를 한줄로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을 찾기 위해 고심했었다. "금융 소비자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기획자" 라고 적으면서, '내가 금융 소비자를 정의할 수 있나?' '내가 금융 도메인을 얼마나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하고 자기점검을 해 보았다.
우리는 누구나 금융 소비자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재화나 용역을 구매할 때 물물교환이 아닌 화폐를 이용한다. 흔히들 금융이라고 하면 어려운 말로 쓰여 있고 좁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금융은 - 즉 돈은 - 우리 생활 전반에 녹아 있고 사용 빈도도 아주 높다. 토스의 리텐션이 높은 이유도 사람들이 매일 밥먹듯 하는 금융 생활을 타겟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구나'인 금융 소비자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나 나름대로의 결론은 이렇다. "최소의 돈으로 최대의 효율을 누리려는 사람들" 이다. 자본주의는 효율성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경제공부를 조금이라도 했다면 비교우위론을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김치를 잘 만들고 미국은 치즈를 잘 만든다면 서로 교환해서 둘다 맛보는 게 이득이다. 반대로 미국이 김치를 만들고 우리나라가 치즈를 만들 필요가 없다. 나는 살림을 잘하고 남편은 돈을 잘 버는데 굳이 남편이 살림하고 내가 돈을 벌 필요는 없다. 최소한의 시간,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보려는 게 자본주의고, 자본주의의 끝판왕이 금융업이다.
은행 창구에 하루만 앉아 있어 보면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주어진 예금 상품 중에 가장 많은 이자를 줄 수 있는 것을 찾고, 내가 투자한 원금과 내가 감수할 수 있는 리스크 대비 투자 수익률이 가장 높은 상품을 찾으며, 대출 이자는 0.1%라도 아끼기 위해 사활을 건다. 월급은 그대로고 물가는 계속 오르기 때문에 아무리 쌈짓돈이어도 통장에 그냥 두지 않는다. 밖에서는 땀흘리는 운동 선수여도 은행 창구에 오면 순식간에 금리와 수수료의 유불리를 따지는 실리주의자로 돌변한다.
이커머스도 돈을 다루고 의료앱도 돈을 다룬다. 모든 앱이 돈을 벌기 위해 경쟁한다. 하지만 금융앱은 돈을 직접적으로 맡아주거나(예치), 처리해 주거나(송금), 정리해 주거나(가계부), 투자해주거나(주식/펀드), 거래에 대한 비용을 받거나(주식/환전/코인), 이자를 받고 빌려준다(대출). 그렇기 때문에 데이터가 더더욱 정확해야 되고, 처리시 오류가 있어서는 안되며(오류가 있더라도 복원할 수 있어야 하며), 운영하는 회사가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금융 인더스트리는 국가에서 돈을 발행하고 국가 기관에 연동 혹은 소속된 금융 기관들이 정책과 법에 의해 돈장사를 하는 시장이다. 금융상품의 특징은 개념이 눈에 보이지 않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건데, 그래야 금융기관이 좀더 쉽게 돈장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 기존의 금융기관은 고객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이 증상에 대해 공부한 걸 다 말해주지 않듯, 대다수의 고객은 어차피 설명을 해도 쉽게 알아듣지 못한다. 최근에 일상화가 된 핀테크 제품들은 이런 가려운 곳을 긁어 주어 많은 환영을 받았다. 어려운 용어와 개념들을 중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쉽게 설명해 준다. 이제는 스탠다드가 어려운 금융에서 쉬운 금융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어려운 금융을 유지하면 시장에서 도태된다. 이커머스든, 배달앱이든, 제품의 '돈'에 관련된 기능을 설계하고 있다면 이런 특징들을 염두에 두고 기획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금융을 제너럴하게 정의해 보았지만, 은행과 P2P 회사를 거쳐 증권사에서 일하면서 같은 금융 인더스트리 내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다는 걸 느낀다. 은행은 예대마진이 핵심이라 대출이자와 예금이자의 차이를 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P2P는 수수료가 주 수익원이고 투자자가 확보 되어야만 대출이 가능해 기관투자 유치에 사활을 건다. 증권사는 고객이 돈을 벌든 잃든 중간에 주식을 매매하는 통로를 가로막고 서서 수수료를 가져간다.
여기에 또 국가별 규모별 차이가 있더라. 우리나라는 증권사도 은행처럼 금융결제원 공동망에 올라가 있어 증권사에서 은행으로 직접 계좌이체가 가능하지만, 베트남은 증권사에서 은행 계좌로 이체하려면 증권사 백오피스에서 은행망을 이용해 송금해야 한다. 금융 규제도 우리나라는 특정 행동들만 가능하다고 정의해놓은 반면, 베트남은 특정 행동만 안하면 허용해준다. 이런 건 누가 세세하게 가르쳐준 게 아니라, 직접 서비스를 설계하고 리걸팀과 법령을 검토하면서 깨닫게 된 것들이다. 전체적인 금융 시스템과 법체계를 이해하고 나면 이런 식으로 업종별 지역별 차이를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세상을 보는 '틀'과 '축'을 가지게 되는 것, 그게 한 도메인에 오래 머무르며 기획을 하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인 것 같다. 그 '틀'이 있기 때문에 계좌를 개설할 때 서명을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돈을 인출할 때 프로세스를 어렵게 해야 되는지 쉽게 해야 되는지 등 작고 큰 결정들을 더 현명하게 해나갈 수 있다.
막연하게 '나는 도메인 지식이 강점이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글로 정리하니 흐릿했던 그림이 조금 더 명확해짐을 느낀다. 첫 커리어를 어떤 인더스트리에서 시작해야 할 지 고민하는 사회 초년생이나, 기획자로서 한 도메인에서 커리어를 쌓아야 할지 여러 도메인의 경험을 두루두루 쌓아야 할지 고민하는 분들에게도 이 글이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