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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Jun 17. 2023

그의 질주처럼, 삶은 후회보다 결심으로 만들어진다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3 - <플래시>

<플래시>(The Flash, 2023)


이번 <플래시>가 나오기 전에도 플래시는 여러 DC 영화에서 모습을 비추어 이미 익숙한 캐릭터였지만, 막상 이번 단독 영화는 감독 교체 등 여러 이슈와 무엇보다도 주연 배우를 둘러싼 스캔들로 개봉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워너브러더스와 DC는 영화의 폐기나 재촬영 등의 대안을 거부하고 이 영화 그대로 극장 개봉을 고수해 왔는데, 비로소 대중에 모습을 드러낸 영화를 보고 나니 드는 느낌은 왜 스튜디오가 그만큼 고집을 부렸는지 능히 알겠다는 것입니다.


센트럴 시티의 연구 센터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배리 앨런(에즈라 밀러)은 직장인 생활 와중에도 틈틈이 저스티스 리그의 부름에 응답하며 히어로 '플래시'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에게 맡겨지는 일들은 대부분 뒤치다꺼리입니다. 배트맨이나 슈퍼맨, 원더우먼이 더 크고 중한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발생하는 자잘한(?) 소란들을 수습하는 일을 맡고 있죠. 어쨌든 그 쟁쟁한 히어로들과 아삼륙(?)으로 지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는 배리에게도 뼈아픈 부분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음과 그로 인한 아버지의 누명입니다. 아버지의 재판을 눈 앞에 둔 배리는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향한 실망과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한밤의 거리를 질주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초광속 질주를 극한으로 반복한 끝에 배리는 자신이 시간까지도 거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발견한 능력을 이용해 모든 비극의 단초였던 자신의 어린 시절 어느 순간을 아예 바꾸려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원하는 대로 바로 잡은 줄 알았지만, 배리가 도착한 곳은 지금까지 살아온 곳과 전혀 다른 평행우주. 그곳에서 배리는 자신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또 다른 배리, 처음 보는 모습의 어르신 배트맨(마이클 키튼), 슈퍼맨이 아닌 슈퍼걸(사샤 카예), 그리고 과거에 이미 겪었기에 그 공포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대재앙의 서막과 마주합니다.


<플래시>(The Flash, 2023)


호러 2부작 <그것>으로 연출력을 입증한 바 있는 안드레스 무시에티 감독은 <플래시>를 흡족할 만한 오락영화로 완성했습니다. 지난 DC 영화에서는 플래시 특유의 초광속 질주 연출 퀄리티에 대해서 조롱 섞인 비판을 받은 바 있는데, 이번 <플래시>는 그에 대한 우려를 플래시의 첫 질주 장면에서부터 일거에 날려버립니다. 특히 아이맥스로 보는 이 장면은 그야말로 현기증을 일으키기에 충분할 만큼 보는 이의 정신을 쏙 빼놓죠. 빛을 뛰어넘는 속도로 인해 왜곡되는 시공간, 찰나를 수없이 쪼개어 포착하며 난관을 헤쳐나가는 과정 등 플래시의 시점에서 펼쳐지는 액션 장면들은 플래시가 수많은 히어로들 중 일부분이 아닌 단독 주인공인 만큼 그 절대적인 비중을 바탕으로 넘쳐나는 볼거리를 선사합니다. 플래시가 시간을 거스르는 장면 등 일부 장면들에서는 의도적이지 않나 싶을 만큼 이질감이 큰 인물 CG가 표현되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기술력이 부족했다기보다 물리적인 차원을 초월해 온갖 시공간이 뒤엉킨 세계 속에서 왜곡되고 과장된 (말하자면 꿈 속의 풍경같은) 질감을 표현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에 이처럼 화려한 섬광과 과장이 가득한 플래시의 액션만 볼거리로 펼쳐지는 건 아닙니다. 마이클 키튼이 연기하는 팀 버튼 감독 시절의 배트맨, 슈퍼걸 등 액션의 캐릭터가 저마다 다른 히어로들이 함께 등장하는 가운데, 영화는 그들 각자의 능력치를 저마다 어울리는 질감의 연출로 접근하며 각의 독보적 개성을 살리는 동시에 그 개성에 경의를 표하기도 합니다. 배트맨의 액션은 그 유명한 대니 엘프먼의 메인 테마곡을 배경으로 사실적인 스턴트와 타격감에 중점을 둔 아날로그식 연출로 박력 있게, 슈퍼걸의 액션은 무한한 활동범위와 스피드, 초인적인 힘을 포착하는 스펙터클한 연출로 위엄 있게 그려내죠. 어찌 보면 액션의 캐릭터가 극과 극이랄 수 있는, CG로 범벅된 플래시의 광속 액션과 30여년 전 레트로 감성을 고스란히 재현한 '팀 버튼 버전' 배트맨의 아날로그 액션이 서로 바톤 터치를 하며 활약을 펼칠 땐 새삼 만감이 교차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이제는 많은 이들에게 익숙해진 멀티버스의 개념을 지금까지 다양한 버전으로 전개되어 온 DC 코믹스의 영화 세계관에 적용시키며 '설마 이 배우까지 나오겠어' 했던 배우들까지 출연시키는 서프라이즈 이벤트 또한 놓치지 않아 관객을 즐겁게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이벤트가 마블의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 보여준 총집결, 총정리 수준의 무게감까지 이르진 못하는 듯 하고 DC 코믹스 기반의 영화 세계관이 한바탕 큰 리부트에 들어가기에 앞서 선보이는 팬서비스에 가깝다는 느낌도 듭니다.


이런 이벤트보다도 어쩌면 더 영화에서 인상적인 것은 단독 영화에 이르러 비로소 펼쳐지는 플래시, 아니 배리 앨런 개인의 서사일 것입니다. 유별난 성격의 분위기 메이커처럼만 그려졌던 배리 앨런이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포지션은 MCU로 치면 피터 파커, 그러니까 저스티스 리그 구성원 중 가장 보통 사람에 가까운 인물로서 감당하기 힘든 결핍과 유약한 내면을 지닌 이로 그려집니다. 부모에 대해 그가 느끼는 결핍은 DC 세계관에서도 숱하게 봐 온 전형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주체가 초인간이 아닌 인간이기에 오히려 근원적인 결핍으로 다가오며 캐릭터의 고뇌와 성장을 더욱 두터운 공감대 위에서 보여줍니다. 가만 보면 출근길에 난데없이 주어진 미션 앞에서 고군분투하는 배리의 모습에 답은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쉼없이 나아가며 찰나를 쪼개가며 무엇을 해야 할지 머리를 굴려보고 결심하고 실행하는 그의 모습처럼, 지나간 것에 대한 후회와 원망 앞에서도 우리가 취해야 할 것은 결국 어찌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가정보다 어찌해 볼 수 있는 것에 대한 결심이며, 삶은 결국 그 결심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니 말이죠. 이미 우리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라는 멀티버스 영화의 최고작을 만난 후이기에 <플래시>가 멀티버스를 소재로 전하는 앞으로의 삶에 충실하자는 메시지가 더는 새롭지 않을 수 있겠지만, 플래시의 일생 일대 모험과 어우러지며 충분히 진한 파장으로 다가옵니다.


<플래시>(The Flash, 2023)


영화 외적으로 여러 스캔들이 터졌고 소명되었거나 되지 않은 부분들이 있지만, 이번 <플래시>에서 보여주는 에즈라 밀러의 활약이 그 시끌벅적한 스캔들을 잠시나마 잊게 할 만큼 압도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번 영화에서 두 명의 배리 앨런을 동시에 연기하는 그는 과장된 행동이나 표정, 말투 변화가 없이도 두 캐릭터의 대비를 명확하게 이끌어내는 덕에 관객은 두 배리를 다른 캐릭터로 받아들이는 데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저 별난 천재 캐릭터로만 인식되던 배리 앨런의 감춰진 서사를 깊은 감정 표현으로 그려내며, 후반부에 이르면 매우 뻔할 수 있는 장면임에도 감정의 울림을 어색하지 않게 이끌어내는 저력까지 보여줍니다. 한편 30여년 만에 배트맨으로 컴백해 예의 과묵한 성격에 세월이 더해준 적당한 넉살까지 보여주는 마이클 키튼은 마치 그 오랜 세월동안 어디선가 배트맨/브루스 웨인으로 살아온 것처럼 그 시절 배트맨의 얼굴을 고스란히 소환해 냅니다. 슈퍼걸 역의 신예 배우 사샤 카예 또한 전혀 뒤지지 않는 카리스마와 강인한 캐릭터 구축으로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를 끝으로 제임스 건 감독이 수장이 된 DC 스튜디오가 이끌어 갈 새로운 'DC 유니버스'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다사다난한 과정을 거치며 부침을 겪어 온 (그 과정에서 어째 유니버스 바깥의 DC 코믹스 영화들이 때때로 더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던) 'DC 확장 유니버스'를 마무리하는 장으로서 <플래시>는 예기치 않았던 중책임에도 그 역할을 비교적 매끄럽게 잘 해냈습니다. <맨 오브 스틸>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DC 확장 유니버스' 안에서 나온 영화들 중 오락성에 가장 충실하면서도, 단독 영화로서 갖춰야 할 영웅의 보편적 서사와 팬들을 위한 굵직한 이벤트까지 놓치지 않은 좋은 사례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 플래시를 우리가 다음 DC 세계관에서 또 만날 수 있을진 미지수지만, 또 만나고 싶은 히어로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플래시>(The Flash,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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