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진만 Jul 24. 2023

제조사도 간과했을 바비 인형의 진실을 찾아서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3 - <바비>

<바비>(Barbie, 2023)


- 스포일러 있습니다 -


60여년 간 세계적인 인기를 끌어온 마텔 사의 동명 인형을 소재로 한 <바비>는 <레이디 버드>, <작은 아씨들> 등의 인상적인 여성영화를 만들어 온 배우 겸 감독 그레타 거윅이 연출하고 그녀의 남편이자 역시 영화감독인 노아 바움백이 각본에 참여했다는 데서 일단 이목을 끌었고, 거기에 마고 로비와 라이언 고슬링이 의중을 알 수 없는(?) 복장을 한 촬영 현장 사진 때문에 또 주목을 받았었습니다. 대체 어떤 영화가 나올 것인지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았던 <바비>는 결과적으로 대단히 화려하고 웃기며 심오한 여성영화로 나왔습니다. '바비'라는 장난감의 유구한 역사에서 기인해 현대 여성이 마주한 문제에 대해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유의미한 메시지를 던지는 이 영화는 매우 직접적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친절하게 페미니즘의 의미를 전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현실세계의 반대편에 있는 '바비랜드'에는 다양한 직업과 업적과 생김새를 지닌 '바비'들이 어울려 살고 있습니다. 대통령, 노벨상 수상자, 의사, 기자, 작가, 공사장 인부, 인어까지 세상의 모든 분야에서 저마다 펼치는 활약들을 축하하는 것으로 매일의 일상을 채우는 그들은 그런 자신들의 모습이 현실 세계 여자 아이들의 성장과 성취에 큰 이바지를 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이끌어가는 바비들 곁에는 바비들이 비로소 바라봐줘야만 의미를 갖고 그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 '그냥 켄'들이 있죠. 그 중에서도 가장 고전적인 모습과 성격을 한 '전형적인 바비'(마고 로비)에게 어느날부턴가 이상현상이 일어납니다. 난데없이 죽음에 대한 생각이 들거나, 까치발이 안돼서 발바닥이 땅에 닿는다든가, 2층에서 뛰어내리면 사뿐히 땅에 착지해야 하는데 훅 떨어진다든가 하는 식으로 일상의 루틴을 깨는 현상이 계속되자 바비는 '이상한 바비'(케이트 맥키넌)를 찾아가 해결책을 모색합니다. 아마도 바비의 주인인 현실세계 속 여자 아이에게 이 현상의 원인에 대한 열쇠가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 이르고, 바비는 다짜고짜 따라온 켄(라이언 고슬링)과 함께 이상현상을 되돌리고 원래의 일상을 되찾고자 현실세계로 떠납니다. 그런데 산넘고 물건너 바다건너서 도착한 현실세계에서 바비를 당혹케 하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세상이 온통 즐거운 것 투성이였던 바비랜드 속 바비들의 위치를 현실세계에서는 그대로 남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겁니다. 바비의 사랑에만 매달려왔던 켄은 이런 현실세계의 모습에 크게 경도되고, 바비의 여정은 기대보다 더 막중한 임무를 띠게 됩니다.


<바비>(Barbie, 2023)


소설이나 만화 같은 스토리텔링 콘텐츠를 넘어 장난감 브랜드에까지 뻗어있는 할리우드 영화 산업을 보면 '그렇게 만들 게 없나' 싶기도 하지만, 때로 장난감 브랜드를 소재로 탁월한 통찰력을 지닌 영화가 나오기도 하는데 <레고 무비>가 그러했고 <바비> 역시 그렇습니다. <레고 무비>는 레고를 소재로 장난기 넘치는 볼거리와 유머를 유감없이 펼치는 와중에도 레고를 한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진정성 있는 메시지로 어른 관객들까지 감동을 주기 충분한 영화였는데, <바비> 역시 볼거리와 유머, 메시지를 두루 갖추고 있죠.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바비>가 주목하는 영역과 태도에 있을텐데, 일단 남녀노소가 두루 선호하는 레고 블록과 달리 바비 인형은 여자 아이들의 선호 비중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영화 또한 여성과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레고 무비>가 아마도 실제 제조사인 레고 역시 추구할 레고 블록의 진정한 가치를 들여다 보는 영화였다면, <바비>는 어쩌면 제조사 마텔 역시 간과하고 있었을지 모를 바비 인형의 가치를 짚어본다는 점에서 한결 도전적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바비>는 1억불 이상의 제작비가 투여된 화려한 볼거리와 들을거리, A급 배우들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코미디 향연과 함께 바비 인형이 추구해 온 여성상과 남성 중심 사회의 현실에 대해 생각해 볼 만한 깊이 있는 화두까지 제시하는 독보적 개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영화가 포문을 열면서부터 등장하는 바비랜드는 여성인 바비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지만 여성들에게 이상적이지만은 않은 곳 같습니다. 사회의 모든 요직을 바비들이 차지하고 있지만, 그들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에 심취하며 축하하는 데 정성을 다할 뿐 어떤 것을 해 나가고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지에 대한 생산적인 고민과 실천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바비랜드를 보며 이런 느낌이 드는 이유가 뭔지 바비가 현실세계로 나오면서 마주하는 풍경을 본 뒤에 비로소 깨닫게 되는데, 바로 남성이 주도권을 쥔 현실세계의 모습이 이 바비랜드의 모습과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마주보고 섰음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비랜드를 만든 곳(마텔 사)의 분위기를 본 후에 비로소 알게 되는, 바비랜드를 보면서 느낀 그 위화감의 이유는 바비랜드가 여성의 현실과 성취에 관한 맥락을 무시한 채 공고한 남성중심 사회 속 남자들의 활력을 단순히 미러링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바비랜드에서 본 바비들의 모습 - 요직에 앉아서 생산적인 토론 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자체의 의미만을 역설할 뿐인 기득권들의 모습이 알고보니 현실세계 속 남성 기득권층의 모습이었음을 알게 되는데 여성들의 현실은 정작 그렇지 않은 것이죠. 여전히 현실에서 다수의 여성은 성공하려면 당당하되 겸손해야 하고 야심차되 야망어린 이미지는 만들지 말아야 그나마 덜 불리해지는, 긴장과 경계로 가득한 상황을 늘상 통과해야 하기 마련인데 바비랜드에는 성취의 결과만 피상적으로 존재할 뿐 그 현실이 투영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남성들 다수가 요직을 차지한 현실 세계는 해야 할 일과 더 좋은 세상을 위한 책무를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는가 생각해보면, 그런 게 없다고 바비랜드가 비정상적으로 느껴졌던 제 자신에 흠칫 놀라며 현실의 불균형을 비로소 실감하게 됩니다.


여자 아이들의 삶이 변화되었을테니 가면 환영해주고 안아줄 거라 굳게 믿었던 현실세계가 바비를 조롱하고 멸시하는 부분은, 이처럼 현실에 발디디지 않고 피상적으로 가공된 바비의 세계와 현실 사이에 생기는 괴리감이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성취에 대한 공허한 환호만 가득한 채 '성공한 여성'의 외적 초상에 몰두하는 바비의 세계는, 여자 아이들이 세계를 향한 눈을 뜨게 해준다기보다 아직 팍팍한 현실과 대면하기까지의 시간을 그저 얼마간 미뤄줄 뿐인 것이죠. 바비랜드의 '가공된 성취'가 어쩌면 아직 충분히 나아가지 못한 현실을 향한 눈을 가리는 역할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래서 이제야 두 세계에 엄연히 간극이 존재함을 깨닫게 되는 바비의 여정은 그렇게 성평등을 이룰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지침에 이릅니다. 바로 '나를 나로서, 너를 너로서 사랑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내가 차지한 자리나 누리는 특권만으로 나의 성취를 말하지 못할 것이고, 나의 성취를 위해 타인 혹은 다른 성별을 희생시킬 필요가 없을테니까요. 영화는 인형에 박제된 성취가 아니라 현실에서 만들어가는 성취가 나를 완성시킬 수 있다고 독려하는 한편, 남자들에게는 그저 남자라서, 기득권이라서, 여성을 대상화할 수 있는 존재라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생각해서라도 너무 짜치는(?) 일 아니냐고 부드럽게 묻기도 합니다.


<바비>(Barbie, 2023)


인형 세계의 디테일한 메커니즘을 속속들이 잡아내는 화려한 이미자와 음악들이 내내 눈을 즐겁게 하는 가운데, 그 안에서 맑은 눈의 광기를 장착하고 일생의 코믹 연기를 펼치는 A급 배우들의 활약이 대단합니다. 바비 역의 마고 로비는 스스로를 가장 고전적인 여성 상품화 이미지로서의 '전형적인 바비' 역할에 기꺼이 맞추어 정말 바비 인형이 살아나온 것처럼 빈틈을 찾아볼 수 없는 비주얼로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한편, 그런 바비가 점차 시야를 갖고 세상을 발견하며 심장을 얻는 과정을 진정성 있고 세심하게 포착해내며 영화의 주제의식을 오롯히 재현해 냅니다. 한편 켄 역의 라이언 고슬링은 바비의 사랑에 목매는 남성상과 늦게 배운 가부장제에 정신 못차리는 남성상 사이를 오가며 느끼한 표정과 대사는 물론 춤과 노래까지 미끄럽게 소화해내는데, 그 '켄받는' 연기는 가히 <라라랜드>와 쌍벽을 이룰 만 합니다. 이외에도 현실세계의 여성으로서 직장인이자 엄마이자 여성으로서의 고충을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글로리아 역의 아메리카 페레라, 케이트 맥키넌, 잇사 레이, 알렉산드라 쉽, 엠마 맥키, 시무 리우, 킹슬리 벤 아디르 등 각양 각색의 바비와 켄을 소화하는 배우들도 인상적입니다.


페미니즘에 관해 영화가 너무 설명적으로, 설교조로 접근한다는 평가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론 <바비>에게 최선이라고 봤습니다. 가공된 세계에서 튀어나온 바비 인형을 소재로 현실세계에서 작동하는 여성의 권리를 이야기하는 페미니즘을 다룸에 있어 구체적인 이야기나 장면으로만 접근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법도 하니까요.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영화는 다양한 콘텐츠와 실제 바비 인형 라인업을 활용한 패러디, 현재도 별별 라인업으로 바비 인형을 세분화해 판매하는 마텔 사의 귀신 같은 상업성, 전히 현실에 만연한 성 상품화에 대한 풍자, 남자들의 본능적인 '맨스플레인' 문화 등 매 장면과 에피소드에 있어 재미있는 접근을 잃지 않습니다. 눈과 귀를 사로잡는 시청각 효과와 명품 '병맛' 연기의 향연에 빠져들다 보면 만나는 메시지는 위압적, 강제적이거나 단순하지 않고 페미니즘과 그에 대응되는 세계, 그를 아우르는 세계까지 닿으며 상당히 다층적이라 거듭 곱씹을 만합니다. 이처럼 <바비>는 블록버스터급 즐길거리와 기막힌 하이코미디로 유쾌하게 페미니즘을 전하는, 시의성과 독창성을 두루 잡은 영화입니다.


<바비>(Barbie, 2023)


매거진의 이전글 걸어온 길을 되짚으며 가지 않은 길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