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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Aug 29. 2023

장르에 충실하면서 장르를 갖고 노는 영화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3 - <잠>

<잠>(Sleep, 2023)


지난 5월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공개돼 현지에서 호평을 받은, 유재선 감독의 장편 데뷔작 <잠>은 언뜻 충실한 장르물처럼 보이면서도 장르를 기묘하게 가지고 노는 고유한 매력이 있는 영화였습니다. 몽유병, 수면장애를 소재로 한 호러 스릴러라는 익숙한 외형의 영화임에도 어지간한 거장 감독과 작업하고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다녀온 정유미, 이선균 배우가 어떻게 이 영화를 선택하게 되었는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영화의 본 모습을 보고 능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식품회사에서 일하는 수진(정유미)와 연극계의 유망주였지만 지금은 드라마 단역배우인 현수(이선균)는 한창 깨가 쏟아지는 중인 신혼부부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했던 일상은 어느날부턴가 현수가 잠결에 이상행동을 보이면서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는 정도에서 시작했던 그의 이상행동은 침대 밖을 배회한다든가 냉장고를 뒤지며 생고기를 먹는 등 활동반경을 확장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를 해칠지도 모르는 수준으로 악화됩니다. 부부는 수면클리닉을 찾아 일종의 수면장애로서 현수의 이상행동을 고치려는 노력을 하는 한편, 현수의 수면 중 이상행동이 의학적이지 않은 쪽으로 원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또한 함께 피어납니다. 조만간 이 부부에게는 사랑스러운 아기 또한 찾아올텐데, 현수의 증세가 아기까지도 위협할지 모른다는 수진의 두려움이 극에 달하면서 상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잠>(Sleep, 2023)


우리는 흔히 유의미한 메시지를 담아내는 영화를 잘 만든 영화라고 오해하기 쉽지만, 적어도 장르영화는 그 장르에 기대하는 쾌감을 충실히 제공하기만 해도 잘 만든 장르영화라고 평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잠>은 잘 만든 장르영화입니다. 호러 스릴러라는 장르적 측면에서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놓을 수 없는 긴장감을 선사하기 때문이죠. 공포를 일으키는 소재가 어떤 초자연적인 외부 존재가 아니라 우리 일상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잠이라는 것과, 공포를 안기는 존재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 긴장감은 더 큽니다. 그런 점에서 <잠>은 호러 스릴러 장르물로서의 정체성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 정체성을 구축하는 방식은 상당히 색다릅니다. 이런 장르와 설정의 영화에서 으레 만나는 클리셰겠거니 싶은 장면에서 예기치 않은 변수를 촉발시키며 충격을 안기는가 하면, 신혼부부로서 수진과 현수의 모습은 공포를 제공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갖춰진 설정이 아니라 마치 현실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한 장면을 보는듯 그 감정선이 섬세하게 구축되어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현실성이 강화되고, 그런 현실에 침투하는 공포의 그림자는 더 짙게 다가옵니다. 공포스런 이야기 속에서 나타나는 캐릭터들의 면면이 너무 현실적인 나머지 영화를 보다보면 뜻밖의 웃음을 짓게 될 때가 꽤 자주 나올 것입니다.


<잠>이 호러 스릴러 장르물로서 특히 뛰어난 점은 공포를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공포는 설명할 수 없을 때 더 크게 다가온다는 걸 대중은 잘 알고 있지만, 창작자들은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를 위해 이따금 공포의 진상을 설명하려 듭니다. <잠>이 소재로 하고 있는 몽유병, 수면 중 이상행동은 호러 스릴러 장르적인 측면에서 그 진상을 규명하기에 무척 까다로운 소재이고, 영화는 그 까다로운 도전을 무리하게 하는 대신에 공포의 흐름에 주목하며 좀처럼 느껴본 적 없는 질감의 스릴을 관객에게 선사합니다. 영화는 3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3개의 챕터에 걸쳐 공포의 국면에 전환이 일어납니다. 일면 현수가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수진에게 일방적으로 가하는 줄만 알았던 공포가 그 방향을 달리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영화에는 공포의 실체를 드러내기보다 공포를 향한 의심 자체에 주목합니다. 실체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퍼져가는 의심은 그 의심이 가리키는 사람은 물론 그 의심을 품은 사람마저 두려운 존재로 만들죠. 영문을 알 수 없이 요동치는 공포의 국면 위에서 보이는 것은 공포를 가하고 공포에 당하는 이들이 아니라, 너나 할 것 없이 함께 버둥거리는 혼란의 현장입니다. 의학과 무속신앙이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개념이 교차하며 어느 것도 다 말이 되는 것만 같은 클라이맥스에 다가갈 때, 보는 이를 두렵게 하는 것은 비수로 날아드는 단 하나의 진실이 아니라 안개처럼 포위해 버리는 수 가지의 가능성입니다. 그 공포의 질감이 좀처럼 느껴본 적 없는 것이기에 두려움과 흥미로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보는 이를 자극하는 것입니다.


<잠>(Sleep, 2023)


이처럼 장르가 좀체 시도한 적 없는 방식으로 장르에 충실한 영화를 만들어 내는 데에는 배우들의 견고한 역량 또한 필수적이고, 그런 점에서 주연을 맡은 정유미-이선균 배우는 이름값을 확실히 해내며 영화를 꽉 채웁니다. 영화의 러닝타임 대부분이 수진과 현수의 집 안에서 전개되는 데다, 귀신이나 살인마 같은 외부의 공포스런 존재가 침입하지도 않기 때문에 오롯이 두 배우의 역량만으로 공포를 비롯한 온갖 감정이 발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두 배우는 신혼부부로서의 깨볶는 일상부터 그 일상이 깨지고 진위를 도통 알 수 없는 공포에 잠식당한 모습까지를 강렬하고 섬세한 감정연기와 매끄러운 호흡으로 온전히 구현하며, 외적 장치에 기대지 않은 두 배우의 연기만으로 호러 스릴러로서 영화의 입지를 확실히 다져줍니다. 수진 역의 정유미 배우는 실체가 불확실한 공포 앞에서 두려워 하는 인물과 오히려 두려움을 주는 인물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파워풀한 연기를 보여주고, 현수 역의 이선균 배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는 끔찍한 일들로 인해 두려움을 주는 인물이면서도 동시에 두려움에 떨 수 밖에 없는 인물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사실상 부부의 집에서 대부분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연극적인 구성 속에서, 공수를 바꾸어가며 연기의 티키타카를 펼치는 정유미-이선균 배우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온전히 로맨틱 코미디가 되고 온전히 호러 스릴러가 됩니다. 


<잠>은 두 가지 면에서 신선하면서 동시에 빼어난 장르영화입니다. 때로 장르물로서의 기본적인 의무조차 방기하면서 신선함을 좇는 경우를 보는데, 이 영화는 한정된 공간과 인물 설정 속에서 짐작되는 두려움과 짐작되지 않는 내러티브를 함께 구사하며 호러 스릴러 장르에 요구되는 쾌감을 충실히 전합니다. 더불어 무책임하게 관객의 상상에 맡기는 이야기에 '다양한 해석'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붙이는 게 아니라,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말이 되는 꽤나 까다로운 스토리텔링 기술을 구사하며 다양한 해석을 낳고 그로부터 더욱 종잡을 수 없는 스릴과 공포를 자아냅니다. 이렇듯 <잠>은 새로움과 충실함을 함께 구사하며 영화적 즐거움이라는 기본적 덕목을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이를 만든 이가 앞으로 보여줄 장르 이상의 고유한 활약을 기대케 하는 영화입니다.


<잠>(Sleep,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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