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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Dec 10. 2023

개인의 욕망에 나라의 흥망이 달렸던 시대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3 - <나폴레옹>

<나폴레옹>(Napoleon, 2023)


리들리 스콧 감독의 새 영화 <나폴레옹>을 보았습니다. 워낙 남성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영화들을 많이 만들어 왔고, 또 사극도 많이 만들어 왔고, 또 전쟁신도 많이 만들어 왔던 감독이기에 그가 '나폴레옹'을 주인공으로 삼아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수순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다수가 기대했을 영화는 아마도, 지략과 권력욕이 함께 넘치는 나폴레옹이 세계를 정복하며 만들어내는 아드레날린 끓어오르는 영웅담이자 전쟁영화였겠죠.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런 다수의 기대를 꽤 많이 빗나갑니다. 경력이 더해질수록 뜨거워지기보다 오히려 차가워지는 감독의 작품 세계를 반영하듯, <나폴레옹>에서 감독이 나폴레옹을 바라보는 시선은 꽤 싸늘하고 그 시선마저도 나폴레옹 한 사람에게만 맞춰진 것이 아니라 그가 딛고 선 세계 전체로 뻗어 있습니다. 감독이 나폴레옹을 세워두고 바라본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안으로는 혁명으로 밖으로는 전쟁으로 떠들썩하던 18세기 말 프랑스, 코르시카 섬 출신의 젊은 장교 군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호아킨 피닉스)는 어머니와 고향 땅의 명예를 드높이고자 진급에 목말라 있습니다. 때마침 폴 바라스 자작(타하르 라힘)이 영국군이 점거해 있는 툴롱의 프랑스 해안 요새를 되찾는 작전을 나폴레옹에게 지시하고, 나폴레옹은 호기롭게 이를 수락하고는 성공해냅니다. 이후 나폴레옹의 쾌속승진이 시작되는데, 나라 안에서는 혁명 이후 공포 정치로 혼란스런 와중에 나라 밖에서 활약을 펼친 덕분에 장군을 넘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위치에까지 오릅니다. 이 과정에서 나폴레옹은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옥중에서 남편을 잃은 조제핀 드 보아르네(바네사 커비)를 만나고, 조제핀의 적극적인 어필과 나폴레옹의 대책없는 감정 속에 둘은 부부의 연을 맺습니다. 조제핀은 나폴레옹의 성공을 입증하는 중요한 상징이자, 그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로서 곁에 머뭅니다. 그렇게 나폴레옹은 측근 정치가들의 도움 속에 결국 황제의 자리까지 오르지만, 기어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자의 위치에 선 그에게 조제핀을 향한 사랑 혹은 집착은 어쩌면 그의 꺼질 줄 모르는 야망에 걸림돌이 될지도 모릅니다.


<나폴레옹>(Napoleon, 2023)


리들리 스콧 감독이 언젠가는 나폴레옹 같은 인물을 영화의 주인공으로 삼을 것 같긴 했지만, 역시나 그는 나폴레옹을 칭송하기 위해 이 영화 <나폴레옹>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뛰어난 지략과 전술을 구사하며 프랑스의 위세를 세계에 떨친 프랑스의 대표적인 '영웅'인 동시에, 나라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이끈 '전쟁광'이라는 평가가 양립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또 감독이 나폴레옹을 비판하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는가 하면, 그렇다기에 영화가 그리는 나폴레옹의 일대기는 너무 수박 겉핥기식입니다. 영화는 프랑스 혁명 중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 올라가던 시점부터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당시의 프랑스 내외 정세와 그 속에서 나폴레옹의 외교/정치/군사적 행적과 개인사를 번갈아 보여주긴 하나 그 서사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느낌을 주지 않습니다. 분절되어 제시되는 사건 속에서 나폴레옹의 업적이나 진가가 딱히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나폴레옹이 공적을 세우는 역사적 순간들마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해야겠다'라고 하면, 다음 장면에서 '그렇게 되어 있는' 전투 시퀀스를 보여줄 뿐이지 어떤 전략과 전술을 구사했는지 영화는 짚어내지 않습니다. <글래디에이터>, <블랙 호크 다운>, <킹덤 오브 헤븐>, <로빈 후드> 등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전투 장면 연출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감독답게, 이번 <나폴레옹>에서도 역사 속 유명 전투 장면들을 장관이다 싶게 연출하긴 합니다만, 그 장면들이 희한하게 나폴레옹의 계산에 따른 결과라기보다 재난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 대신 영화에서 또렷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폴레옹과 조제핀 간의, 사랑이라는 단어로 규정짓기 어려운 끈질기고 지리멸렬한 관계입니다.


영화는 나폴레옹과 조제핀의 사랑을 전혀 로맨틱하게 그리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관계를 갖는 장면은 사랑의 행위이기보다 후계자를 만들기 위한 행위로서 건조하게 비춰지고, 두 사람이 떨어져 있는 동안에 주고 받는 편지조차도 언뜻 사랑 고백 같으나 실상은 나의 성취와 상대방의 존재를 확인받기 위한 절차에 가까워 보입니다. 영화가 필요 이상으로 비중을 많이 둔다는 느낌까지 드는 이 두 사람의 관계까지 지켜보다 보면, 나폴레옹은 칭송을 하든 돌을 던지든 어떤 감정을 이입할 구석이 별로 없는 인물이 됩니다. 드라마로 만들어도 대하드라마가 될 것 같은 세계사 속 불세출의 인물을 알 만한 감독이 왜 이런 식으로 그렸을까 생각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보이는 나폴레옹의 초상은 영웅이나 독재자 같은 아이코닉한 인물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시대의 역사와 결부시켰던 인간의 모습입니다. 영화 중간중간 나타나는 역사의 순간들에서 보이듯 당시의 프랑스는 신분을 막론하고 누구 하나 자유롭지 못한 듯 어떤 방향으로든 휩쓸리던 혁명과 전쟁의 시대인데, 그 속에서도 나폴레옹은 아랑곳않고 자기 야망의 그림을 그리는 데만 집중합니다. 애국심이나 정복욕 같은 거창한 단어로 설명하기도 민망한, 승진과 출세를 위해서 자기 본래 성정과 상관없이 자신을 세상 속으로 무작정 집어던지는 인물로 보입니다. 조제핀과의 인연은 사랑에 의한 것이기보다 그처럼 출세하고 성공한 자의 성과 중 하나로서 필요한 것으로, 그런 자신의 영광을 대대로 전할 후계자를 낳기 위한 수단으로 보이고요. 그 혼란한 혁명과 전쟁의 시대는 그런 그의 욕망을 실현하기에 때마침 적합한 배경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를 향한 영웅이라는 칭송 혹은 독재자라는 지탄 또한, 마침 그런 게 필요했던 시대와 운 좋게 만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는 영화의 시선은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겠지만서도 분명 흥미롭습니다.


<나폴레옹>(Napoleon, 2023)


그래서 연기력에 대해서는 두말하면 입아픈 호아킨 피닉스가 영화에서 보여주는 나폴레옹의 모습은 기대와 살짝 다르면서도 여전히 인상적입니다. 외적으로는 카리스마 있는 군인이자 정치가, 지도자처럼 보이기도 하나 실은 위태로운 욕망을 허울뿐인 카리스마 뒤에 감춘, 그래서 단호함이 한편으론 무모함으로 보이고 장악력이 한편으론 치기로 보이는 리들리 스콧식 나폴레옹을 온몸에 체화해서 보여줍니다. <글래디에이터> 이후 20여년 만에 리들리 스콧 감독과 재회한 그는 20여년 전에 보여준 들끓는 에너지와 오히려 전혀 반대되는 터치의 연기로 노련함을 과시합니다. 한편 나폴레옹의 일생을 함께 한 반려자 조제핀 역의 바네사 커비가 보여주는 활약은 기대 이상입니다. 나폴레옹이란 인간을 이미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듯한 통찰력과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 초연함을 함께 보여주는 외유내강형 캐릭터를, 대사도 감정도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도록 똑 떨어지게 연기해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피상적으로 보면 나폴레옹에 의해 이용당하는 여성처럼 보일지 모르나, 다르게 생각하면 욕망으로 가득한 나폴레옹의 세계에 개입해 한껏 휘저어놓고 떠나는 전지적 시점의 인물처럼도 보이게 조제핀을 그려냅니다.


영화는 마지막에 나폴레옹이 거쳐 간 전투를 하나하나 열거하며 각 전투마다 희생된 목숨의 수를 보여줍니다. 그 순간에 와서 느끼는 영화의 감정은 개인의 욕망과 야망에 국가의 흥망이 좌우되었던 어느 시대의 냉소를 지나, 그런 얄궂은 국가의 운명 속에서 아득한 숫자의 목숨들이 스러져 가야만 했던 것에 대한 비애감입니다. 그 흐름이 예상보다도 많이 달라서 좀 당혹감을 낳을 수도 있지만, <나폴레옹>은 들끓는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인물과 이야기 속에서도 기대하는 정서와 메시지에 휩쓸려 자칫 간과할 수 있는 함의를 놓치지 않고 짚어내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여전한 관록을 엿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나폴레옹>(Napoleon,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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