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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Feb 22. 2024

완전하게 파괴된 후 완벽하게 일어서다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4 - <가여운 것들>

<가여운 것들>(Poor Things, 2023)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1개 부문 후보에 오른<가여운 것들>은 <더 랍스터>, <킬링 디어>,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앨러스데어 그레이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로, 정교하면서도 위태롭고,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섬뜩하고, 찝찝하면서도 웃음이 새어나오는 감독의 영화 세계가 집약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만든 영화 중 가장 도발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장엄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이 작품은 아낌없이 쏟아부어진 시청각적 자극의 향연 속에서 성장해가는 한 인격체의 여정을 우스꽝스러울 만큼 극적으로, 동시에 감동적으로 그립니다. 인간의 성장에 관하여, 여성의 각성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어른들을 위한 고자극성 동화랄까요.


배경은 시대 불명의 런던. 이름 때문에 혹은 자꾸 새로운 생명체들을 만들어내는 연구 성향 떄문에 '하느님(God)'이라고도 불리는 괴짜 과학자 고드윈 백스터(윌렘 대포)는 벨라 백스터(엠마 스톤)라는 묘령의 여인을 딸처럼 키우며 살고 있습니다. 행색은 여느 성인 여성인데 말과 행동은 대단히 서툰 이 여인은 사실 무슨 사연인지 강에 투신한 뒤 고드윈에 의해 건져 올려진 인물로, 고드윈이 살아있는 벨라의 몸에 투신 당시 그녀가 배고 있던 태아의 뇌를 이식해 새로운 삶을 부여했습니다. 고드윈은 제자인 맥스 맥캔들스(라미 유세프)에게 벨라의 발달 상황을 기록하라는 과제를 내리는데, 빠르게 발달해 가는 가운데 순수한 모습을 지닌 벨라에게 점차 반하게 되고 고드윈의 뜻에 따라 둘은 곧 결혼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결혼 서약 과정에서 나타난 변호사(이자 한량이자 사기꾼) 덩컨 웨더번(마크 러팔로)이 벨라를 유혹하며 그들 사이를 훼방 놓습니다. 고드윈에 의해 집안에 갇혀 지내던 벨라의 자유의지를 덩컨은 자극하고, 이내 벨라는 덩컨을 따라 세계로 나갔다 오겠노라 선언합니다. 벨라는 런던 바깥에서 덩컨과 함께 처음 만나는 쾔가을 만끽하는 가운데, 쾌락 너머에 가려져 있던 진짜 세상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벨라 또한 날마다 어제와는 다른 인간이 되어갑니다.


<가여운 것들>(Poor Things, 2023)


<송곳니>로 주목받은 후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줄곧 영어 영화를 만들어 오고 있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다행스럽게도 자신의 개성을 자본 앞에 타협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본을 활용해 더욱 극대화하면서 거장 감독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멜로, 스릴러, 시대극 등 장르의 틀 안에서도 꾸준히 유지되는 특유의 정교하면서도 우스꽝스럽고도 불편한 감수성 덕에 저를 비롯한 많은 팬들을 만들어 내고 있죠. <가여운 것들>은 그런 감독의 개성이 가장 만개한 경우가 되겠습니다. 런던, 리스본, 파리 등 실제 도시를 시대를 특정할 수 없는 모습으로 구현한 시각효과에서는 자본을 한껏 투입했다는 것이 대번에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변함없이 엉뚱스런 음악이나 배우들의 연기, 거침없는 표현은 감독이 자신이 구축한 영화 세계에 자본을 완벽히 길들였다는 확신을 줍니다. 그 탄생(?) 과정부터가 과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벨라의 시점을 취해서인지, 영화는 예측과 상식을 거부하고 욕망하는 대로 나아갑니다. 마치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케 하는 탄생 비화가 있는 여인이 내재된 욕구를 발견하며 펼치는 기이한 욕망의 여정은, 이 정도 A급 배우들이 등장하는 할리우드 영화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위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그 욕망의 중심에 선 벨라라는 여인의 모습은 탐닉보다 학습에 가까울 만큼 지극히 해맑고 집중력 있어서, 표면상으로는 당연히 선정적이지만 어떤 성적 긴장감의 이미지를 구현한다기보다 웃지 못할 탐구의 일면을 보여주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더구나 영화의 이러한 '고자극'적 요소를 단지 자극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은, 이 과정을 거쳐 벨라가 비로소 무엇과 직면하고 어떤 존재가 되어가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육체는 완전한 성인의 것이지만 지성은 0세에서 시작하는 초기의 벨라는 그야말로 백지 상태입니다. 그녀가 '뜨거운 뜀박질'이라고 표현하는 섹스를 비롯해 세상에서 습득하는 모든 행위와 개념은 정해진 교본에 의해 학습되지 않고 스스로의 경험적 지식을 바탕으로 완전히 새롭게 정의됩니다. 그런 벨라이기에 세상의 밝은 면을 발견할 때나 욕망이 충족될 때의 쾌감을 알게 될 때에는 특히 더 강렬한 기쁨이, 세상의 어두운 면을 발견할 때나 현실의 벽을 실감하게 될 때에는 특히 더 무거운 슬픔이 그녀를 에워싸죠. 그런 벨라의 시선을 통해 만나는 세상은, 가령 빈부격차라든지 (서양에도 존재했을) 남존여비 사상과 같이 세상에 으레 그랬겠거니 하고 당연하게 인지되었던 사회의 단면들을 더욱 충격적으로 들춰냅니다. 어떤 도달의 순간에 무아지경에 빠지는 벨라의 표정처럼, 이미 세상을 다 알만큼 안다고 느꼈던 우리들 역시 순간 넋을 잃죠. 고드윈의 통제에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를 어렵지 않게 착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덩컨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벨라가 매우 빠른 속도로 능동적으로 세상을 학습하고 있는 중이었으며, 사회와 제도의 관성을 애초에 알지 못하기 때문에 거기에 따를 생각도 없었음을 간과한 생각이었을 겁니다. 벨라의 몸이 소유물 취급을 받고 유희의 수단으로 다뤄질 때, 그 몸의 주인인 벨라는 금전적으로 허덕인다든가 타인에게 감정적으로 얽힌다든가 하는 제약 사항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소모됨을 거부하고 더 뚜렷해지는 자아를 품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택합니다. 멈출 줄 모르는 질문과 탐구 속에서, 보기에는 세속 앞에서 완전히 파괴된 듯했던 여성은 스스로의 의지로 다시 완벽히 구축되며 위엄 있는 인격체로 우뚝 서기에 이릅니다.


<가여운 것들>(Poor Things, 2023)


그래서인지 <가여운 것들>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지금까지 만들어 온 영화들 중에서도 특히 위엄이 느껴집니다. 그의 영화 대부분은 주인공들을 혼란의 한복판으로 던져놓으면서 뒤로 갈수록 그 혼돈이 증폭되고 파국으로 이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여운 것들> 속 벨라도 마찬가지로 혼돈 그 자체인 세속으로 향한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시작이 아예 해체된 상태였던 벨라는 뒤로 갈수록 오히려 더 응집되고 구축되며 단단해집니다. 이런 인물의 진보는 영화의 형식으로 고스란히 반영되어, 왜곡된 광각렌즈 시점이 다수였던 초반에서 점차 탁 트인 1.66:1 와이드 화면으로, 칙칙했던 흑백 화면에서 개안하는 기분까지 드는 컬러 화면으로, 우습게 뚱땅거리고 울렁거리던 선율의 음악은 후반에 이르러 장엄한 대곡으로 발전합니다. 사실상 벨라 원톱 주인공인 이야기인데 왜 제목은 가여운 것'들'이라고 하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욕구와 욕망을 뛰어넘어 드높은 자아실현의 장으로 도약한 벨라가 보기에, 욕구에만 충실하고 욕망에만 탐닉하는 자들을 얼마나 가여울 것인지. 그렇게 영화는 한없이 음란할 수 있고 동시에 한없이 숭고할 수도 있는 인간의 양면적 진실과 대면케 하며, 욕망의 빛과 그림자 속에서도 기꺼이 스스로를 더 고양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여성의 힘, 인간의 힘을 이야기합니다.


<가여운 것들>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연기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한번 깨부수고 캐릭터로 다시 태어나듯 잔뜩 벼른 열연을 선보입니다. '여자 프랑켄슈타인'같았던 인물에서 자기 확신의 에너지로 진보하는 지식인으로 거듭나는 벨라 백스터 역의 엠마 스톤이 펼치는 활약은 말이 필요 없는 수준입니다. 결코 소화하기 쉽지 않은 높은 수위의 육체 연기는 물론, 그보다 더 깊은 임팩트를 남기는 각성하는 여성의 강인한 초상까지 힘이 넘침은 물론 한껏 무르익기까지 한 연기로 이토록 비범한 개성을 지닌 140분간을 휘어잡습니다. 엠마 스톤은 <라라랜드>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바 있는데, <라라랜드>로 받았다면 이 영화로는 반드시 아카데미를 받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더불어 벨라를 세상으로 이끄는 바람둥이 한량 덩컨 역의 마크 러팔로 또한 놀라운 변신을 보여줍니다. 그간 보여온 차분하고 지적이면서 인간적인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여자와 돈이라면 눈이 뒤집어져 활개를 치다가도 걸핏하며 아이처럼 떼쓰고 보채는 철부지 남자의 모습을 완벽히 소화하며, 영화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웃음을 책임집니다. 한편 벨라에게 원치 않았을지도 모를 새 삶을 부여한, 흡사 조물주가 된 스스로의 모습이 도취된 듯도 한 과학자이면서도 벨라를 진심으로 걱정하기도 하는 듯한 아버지의 모습을 함께 보여주는 고드윈 역의 윌렘 대포 역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줍니다. 


최근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 할리우드 리메이크작 작업 준비에 들어갔고, 여기에 엠마 스톤 역시 참여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가여운 것들>까지 보고 나니 그 어떤 희한한 이야기를 다룬다고 해도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라면 강렬하고 찬란한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듭니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자본과 높은 개런티를 들여야 하는 톱 배우들은 감독에게 제약이 아니라 오히려 날개를 달아주겠죠. 이는 감독이 희한한 이야기를 치밀하면서도 고약한 개성으로 풀어내는 데에만 만족하지 않고, 인간의 본성과 가능성을 탐구하는 데에까지 나아갈 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여운 것들>은 신선한 접근 속에 담긴 감독의 그런 넓고 깊은 시야를 가장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가여운 것들>(Poor Things,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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