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4 - <행복의 나라>
2020년 <남산의 부장들>, 2023년 <서울의 봄>에 이어 10.26 사건 재판 실화를 소재로 이번에 나온 영화 <행복의 나라>까지. 공교롭게도 길지 않은 시간 간격으로 10.26 사건부터 12.12 군사반란까지의 기간을 소재로 한 영화가 나오게 되었는데, <행복의 나라>는 앞서 나온 두 편의 영화들보다는 다소 결이 다른 경우입니다. 역사에 기록되었고 익히 알고도 있는 이야기들을 치밀하게 짚어가는 방식이었던 이전 영화들과는 달리, 역사의 일부였지만 잘 알지 못했던 이야기에 상상력을 더해 인간적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죠. 사실의 전후 인과관계보다 인물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며 역사적 비극이 남긴 상흔을 들여다 보는 이 영화는, 그래서 앞서 나온 영화들과 결을 달리 할지라도 또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질문거리를 던집니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암살 사건이 발생하고, 요동치는 여론 속에서 생겨난 요구에 따라 암살을 행했거나 이에 가담한 자들을 위한 재야의 변호인단이 구상합니다. 그러나 상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전상두(유재명)를 필두로 한 합동수사부. 그들이 서슬퍼렇게 버티고 있는 한 재판의 결과는 불보듯 빤하기에 변호인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그 가운데 재판에선 옳고 그른 것보다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하다고 누누이 강조하고 다니는 세속적인 변호사 정인후(조정석)가 대통령 암살범 변호사라는 '독이 든 성배'를 들기로 결심합니다. 만에 하나 그가 변호를 맡은 피고인이 사형만 면해도 이후 변호사로서 그의 커리어는 성공이 따논당상이기 때문이죠. 문제는 그가 변호를 맡은, 피고인들 중 유일한 군인인 박태주 대령(이선균)의 성품이 여간 대쪽같지 않다는 겁니다. 군인인 그는 군사재판을 받아야 하고 군사재판은 민간 재판과 달리 단심으로 형이 확정되는데 다른 방법이 있다고 해도 자신은 군인이니 군사재판을 받겠다고 고집하고, 죄를 감경하기 위한 진술 논의 과정에서도 자신이 살기 위해 (암살을 실행한) 자신의 상관을 파는 일은 할 수 없다고 고집합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정인후는 박태주와 인간적으로 교류하고 그의 가족들과도 가까워지려 노력하면서 박태주의 마음을 서서히 열어갑니다. 한편 대통령 암살범의 변호를 맡았따는 이유로 정인후에게도 언제 어떤 위협이 닥칠지 모른다는 우려는 곧 현실로 다가오고, 냉혹한 전상두의 위협 속에서 재판은 예상대로 납득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10.26, 12.12 등 대통령 암살과 군사반란 등 당시 한국 현대사를 뒤흔든 사건들의 막전막후를 다룬 영화들은 최근 몇년 새 여러 편 나왔지만, 그 사건과 관련된 재판을 다루는 영화는 <행복의 나라>가 처음입니다. 허구의 사건을 바탕으로 한 법정극은 치밀한 법리 다툼 전략과 치열한 법정 현장을 다루면서 장르적 재미를 극대화시킬 수 있지만, 실제 사건에 관한 실제 재판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경우가 좀 다릅니다. 영화는 대체역사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실제 역사를 그대로 차용했고, 그렇다면 재판 결과는 이미 (우리가 납득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영화는 장르적 재미 이외에 법정극이 조명할 수 있는 또 다른 면모를 내세우니, 바로 변호인과 피고인 사이에서 생겨나는 인간 대 인간의 교감입니다. 대통령 암살이라는 초유의 사건 한 가운데에서 상관의 명령에 따랐다는 이유로 함께 사형될 위기에 처한 올곧은 성품의 군인과, 그런 군인마저도 세상에서 흔적없이 사라지게 하려는 권력이 있는 세상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지 변호인과 피고인의 관계를 통해 들여다 보려 하는 것이죠. 지극히 당연한 도리와 결코 당연하지 않은 욕망이 충돌해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을 만들던 당시를 바라보고자, 영화가 선택한 전략은 외부인을 투입해 사건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행복의 나라>는 영화를 연출한 추창민 감독의 전작 '광해, 왕이 된 남자'가 가공의 인물인 광대 하선을 투입해 당대 조선왕조를 조망하게 했듯, 가공의 인물인 정인후를 이미 쓰여져 돌이킬 수 없는 현대사의 현장에 투입해 지켜보게 합니다. 여느 세속적인 인간들과 다르지 않은 변호사 정인후가 역사적인 법정에 뛰어들면서 마주한 두 인물은 서로 다른 행복을 꿈꿉니다. 한쪽에는 국가에 충성하고 상관에 복종하며 가정을 지키는, 그럼으로써 일개 군인으로서의 평범한 행복을 꿈꾼 이가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군인으로서 자신이 떨친 영향력을 국가를 향한 권력의 자격으로 오독해 권력자로서 세상을 내 발 아래에 두는 행복을 꿈꾼 이가 있죠. 이기고 지는 것이 옳고 그른 것보다 중요하다고 믿어온 정인후는 개인의 안위는 물론 국가의 향방까지도 걸린 이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 옳은 것을 찾아 헤매게 되고, 그 과정에서 행복한 나라를 향한 일말의 납득할 만한 희망을 갖게 됩니다. 작은 인간이 최소한의 행복이라도 얼마든지 꿈꿀 수 있는 나라에 대한 희망 말이죠. 그러나 그 행복의 '나라'라는 이상향은 '국가'라는 괴물로 변질되어 개인의 희생을 아무렇지 않게 요구하고 기꺼이 감수하는 악을 낳고 맙니다. 영화는 더 이상 재판의 승리가 아니라 한 인간의 존엄을 위해 목청 높여 소리치는 정인후의 목소리를 통해 개인이 희생되지도, 희생을 감수할 필요도 없는 행복의 나라는 정녕 불가능했던 이상인 건지 묻습니다. 그리고 마치 현재에서 당대로 넘어온 듯 생생하게 울려퍼지는 정인후의 그 목소리는 그때 불가능했던 이상이 지금은 가능한 거냐고 거듭 질문합니다.
그런 가운데 때론 뜨겁게, 때론 차갑게, 하지만 하나같이 격렬하게 부딪히는 배우들의 개성 뚜렷한 연기가 인상적입니다. 정인후 역의 조정석 배우는 현재 전혀 상반된 스타일의 연기를 보여준 영화가 인기리에 상영되고 있는데도, 그 영화 속 코믹 연기가 전혀 떠오르지 않을 만큼 무거운 역사의 한 장면을 품은 정극의 무게를 고스란히 살려냅니다. 작품을 막론하고 꾸준히 볼 수 있었던 특유의 톤이 이번에도 느껴진다 싶다가도 그것이 자칫 도식적으로 그려질 수 있는 영화 속 정인후라는 인물에 오히려 현실성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며, 후반부로 갈수록 인물에 절절한 힘을 부여합니다. 한편 그와는 정반대로 힘을 한껏 뺀 채로 인물의 굳은 심지를 연기하는 이선균 배우의 연기는, 이 영화가 그의 연기를 볼 수 있는 마지막 작품이어서 그런지 더 짙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조정석 배우와 그가 마주 앉은 장면을 볼 때면 이미 지나간 시간 속 인물과 현재의 인물이 마주 앉은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인후가 과거 속 현장에 던져진 현재의 인물로서 더 잘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합수부의 우두머리이자 영화 속 '악의 근원'인 전상두를 연기한 유재명 배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울의 봄' 속 전두광과 달리 싸늘하고 냉혹한 얼음장 같은 터치로 전상두를 그려내는 유재명 배우의 살벌하면서도 섬세한 캐릭터 묘사는 다른 배우와 비교될지언정 전혀 뒤지지는 않을 존재감을 남깁니다.
<행복의 나라>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느와르-스릴러적 접근으로 치밀하게 추적하던 이전 영화들과는 다르게 부조리한 상황에 놓인 인물들의 내면을 이해하려 하는 휴먼드라마적 접근을 시도해서인지, 대체로 호흡이 느리고 내러티브가 다채롭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면에 선 대통령 암살범 대신 그와 함께 했다가 죄수가 된, 역사의 뒤안길에 선 인물과 그를 바라보는 평범한 사람의 시선을 통해 당대에 대한 보다 보편적인 분노와 공감을 이끌어낸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남산의 부장들'과 '서울의 봄'에 이어 이 영화까지, 다 보고 나니 10.26에서 12.12까지 꿈과 권력이 뒤엉킨 일련의 사건들이 현대사에 드리운 그림자와 그것이 낳은 인간을 향한 희망과 절망을 한층 다각도로 느낄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