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5 -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보았습니다. 작품성에 있어서는 지금껏 실패한 적이 없는 훌륭한 감독이지만 가장 돈을 많이 번 영화가 전세계 1억 달러도 되지 않을 정도로 상업성과는 거리가 있는 감독인데 그가 제작비만 1억 달러가 넘어가는, '블록버스터'라고 불리기 충분한 영화를 만든다기에 아닌 말로 '무슨 바람이 들었기에'라는 생각부터 먼저 들었었습니다. (물론 그가 상업영화를 좋아한다는 걸 모르지 않지만) 그런데 스튜디오에서 기획한 대작 영화의 연출자로 기용된 건가라고 의심하기에 그의 커리어를 돌아봤을 땐 그런 선택을 할 사람이 아닌 것 같았고, 그렇다면 이 영화는 외부의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감독 본인이 원하는 프로젝트였단 얘기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권한을 흔쾌히 쥐어준 스튜디오에도 조용히 박수를 보냅니다.) 아니나다를까 영화는 '1억 달러 제작비의 블록버스터'가 아니라 오롯이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였습니다. 그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고 싶은 방식대로 만든 것이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만큼의 제작비가 필요했던 것 뿐인 것입니다.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과거 나름 혁명가였습니다. 정확히는 혁명의 선두에 섰다기보다 열심히 혁명의 보조를 맞췄달까요. 대단한 리더십을 지닌 퍼피디아 베벌리 힐스(테야나 테일러)의 동지이자 연인으로서, 반정부 단체인 '프렌치 75'의 일원으로서 그는 구금된 이민자들을 탈출시키고 민중을 기만하는 탐욕스런 자본에 일격을 날리는 등 일련의 저항 활동을 펼쳤습니다. 밥과 퍼피디아는 뜨거운 사랑을 나누며 소중한 딸까지 낳았지만, 퍼피디아는 엄마가 되고도 '혁명을 위한 투쟁'을 멈출 줄 몰랐고, 결국 프렌치 75가 와해되면서 퍼피디아는 잡혀간 건지 어떻게 된 건지 종적을 감추고 말았습니다. 이후 밥은 이름을 바꿔 지금의 '밥 퍼거슨'이 되었고, 딸 윌라(체이스 인피니티)와 단둘이 지내온 것이죠. 그로부터 16년이 흘렀고, 밥은 혁명 따위 오래 전에 내려놓고 지금은 소파에 누워 대마초나 뻑뻑 펴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딸 윌라는 똑똑하고 강인한 인물로 알아서 잘 컸죠. 그런데 과거 퍼피디아로부터 크게 능욕을 당한 후 오랜 세월 이들을 지켜봐 온, 프렌치 75의 숙적이자 지독한 반이민주의자인 스티븐 J. 록조 대령(숀 펜)이 이들을 위기에 몰아넣고 윌라 역시 위태로운 처지에 놓입니다. 과거의 동료 디앤드라(레지나 홀), 현재의 '사부' 세르지오(베니시오 델 토로) 등의 도움을 받긴 하지만, 밥은 이제 동반자 없이 홀로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싸움을 완결하고자 윌라 구출 작전에 나섭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보통 지독하게 완전함을 추구하거나, 언제까지나 미숙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주인공인 밥은 후자에 속합니다. 그의 첫 등장에서부터 우리는 과연 그에게 이 2시간 40분짜리 블록버스터를 이끌어가는 자리를 맡겨도 되는지 의심하게 됩니다. 오히려 그가 따르는 퍼피디아의 기세가 이야기를 이끌어갈 만한 '히어로'의 자리와 어울려 보이죠. 그러나 제목의 뜻처럼 이 영화는 끝날 줄 모르는 싸움에 대한 이야기고, 언젠가 싸움을 완결지을 것 같은 히어로보다는 끝없는 싸움에 치이는 또 치이는 미숙한 인물이 더 어울릴 것 같긴 합니다. 그렇게 영화는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까지도 내내 거실 소파에서 바로 일어나 뛰쳐나온 것 같은, 잠옷 같은 가운을 걸치고 정신 덜 차린 표정으로 종횡무진하는 주인공을 내세워서는, 과거에는 혁명 조직의 일원으로 이름을 날렸다지만 지금은 얼레벌레 살아가는, 그러나 오직 딸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그 얼레벌레 행보마저도 끈질기게 끝까지 질주하고 마는 이의 모험담을 그립니다. 뚝딱거리면서도 걸핏하면 손을 높이 처들고 '혁명 만세!'를 외치는 밥의 기세처럼, 이 모험은 힘이 넘치지만 정제되어 있지 않습니다. 감독은 그 정제되지 않은 모험의 에너지를 자글거리는 화면과 극단적인 클로즈업, 지축을 흔드는 듯한 총소리와 폭발음을 통해 생생하게 재현합니다. 미숙한 인간의 정돈되진 않았지만 뜨거운 투쟁을 위해 액션 장르가 반드시 필요했고, 감독은 이 장르의 요소를 결코 허투루 소모하지 않고 치밀하게 활용하는 것입니다.
주인공이 한때 혁명가였던 만큼 이 모험의 배경에는 현실이 철저하게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영화 촬영이 끝난지 1년은 족히 지났을텐데도, 구금된 이민자들을 구출하려는 프렌치 75의 활동과 전시를 방불케 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며 그들을 추적하고 이민자들도 단속하려는 미 정부의 모습은 현재 미국의 상황을 놀랍도록 디테일하게 투영합니다. '위대한 미국'을 부르짖는 소수의 권력자 조직이 있고, 그들이 외치는 그 '위대한 미국'이 철저히 인종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설정은 현재는 물론 앞으로 더욱 극단주의로 치달을지도 모를 미국의 미래를 예견하는 듯도 합니다. 들여다보면 자가당착 투성이이면서도 그것을 시대착오적인 권위주의와 폭력성 안에 감춘 채 '세상을 정화하는 임무'를 기꺼이 수행하는 록조는 이런 현재의 미국을 무섭고도 우습게 체화한 인물인 셈입니다. 다른 한편으론 수년의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에도 조직의 본령을 잊지 않은 채 묵묵히 밥과 윌라를 돕는 디앤드라나, 자신 역시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으면서도 밥에게 끊임없이 용기와 영감을 주는 세르지오같이 자신의 불완전함을 알고도 용기를 꺾지 않는 인물 또한 존재합니다. 그렇게 영화는 과거에 혁명가였고 현재는 '금쪽이'같은 아빠인 밥의 모험담을 통해 동시대 미국 사회와 인간군상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훑지만, 그럼에도 그 시선이 결국 다다르는 곳은 거대한 세계가 아니라 개인입니다.
영화 초반 '프렌치 75'의 활동상을 지켜보면서, 동시대에 난데없이 거창하게 등장한 '혁명'이라는 워딩에 다소 의아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삶을 한구석에 치워놓은 채로 펄럭이는 혁명의 깃발이기에 더더욱 의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어리둥절한 부분들을 딛고 후반부로 갈수록 몰입하게 되는 것은, 거창한 허울을 벗은 혁명의 진실에 비로소 접근하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거대한 혁명의 심장에는 철저히 우리의 삶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타오르는 폭력과 사랑의 에너지에 몸을 맡긴 채 혁명을 외쳤지만 미숙하고 어리석었던 기성세대에서, 알아서 자라났기에 일찍 성숙해졌지만 세상을 불신하는 다음 세대로, 세계의 전투는 그 주체와 상대가 계속 바뀌어 가며 대물림되고 끝날 줄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무한한 전투에서도 우리는 기어코 살아남고 마니, 그 원동력은 그럴싸한 대의명분보다 나의 세계를, 그리고 그 세계를 이루는 하루하루와 사람들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인 것입니다. 그렇게 영화는 세상을 바꾸는 혁명의 이야기에서 삶을 지키는 혁명의 이야기로, 딸을 구하려는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서로를 구하게 되는 두 세대의 이야기로 뻗어나갑니다.
이런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아카데미 수상에 빛나는 배우들의 집요하고 불꽃튀는 연기 대결을 볼 수 있다는 것 역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 연출했기에 가능한 진귀한 즐거움일 것입니다. 주인공 밥 퍼거슨 역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성격파와 코미디의 색깔을 고루 입힌 연기로, 자신의 한심함을 알면서도 의지를 굽히지 않는, 그래서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을 에너지 넘치게 연기합니다. 이전에 그가 자주 맡았던 역할처럼 광기로 가득 차지 않아도, 미숙하면서도 그만큼 계산적이지 않은 절실함으로 질주하는 인물의 힘이 그의 또 다른 연기 스펙트럼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한편 밥의 숙적인 스티븐 J. 록조 역의 숀 펜은 이번에도 놀라운 명연을 보여줍니다. 남성적 권위주의로 똘똘 뭉쳐 있지만 그 이면에 불안하고 나약한 내면을 감춘, 그래서 무시무시하다가도 한없이 우스워지기도 하는 인물의 징그럽기까지 한 이중성을 생생하게 그려내며 잘 하면 세번째 아카데미를 노려봐도 되겠다 싶은 연기를 보여줍니다. 기이한 기운을 발산하면서 밥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사부 세르지오 역의 베니시오 델 토로는 평온하고 여유로운 태도 속에 깃든 은은한 광기를 섬세하게 표현하며 극에 또 다른 결의 에너지를 부여합니다. 한편 여성 배우들의 활약 또한 인상적인데, 밥의 연인이자 윌라의 어머니인 퍼피디아 역의 테야나 테일러는 등장 분량은 적은 편이지만 나올 때의 장면 장악력이 대단합니다. 그 자체로 세상을 씹어먹어버리겠다는 반항과 혁명의 불길을 상징하는 듯한 기세로, 쟁쟁한 명배우들 사이에서 영화 초반을 가장 형형하게 이끌어갑니다. 더불어 <무서운 영화> 시리즈 속 수다쟁이 캐릭터로 기억되지만 이 영화에서는 밥을 비롯한 동지들을 묵묵히 돕는 디앤드라의 강인한 캐릭터를 진중하게 그려내는 레지나 홀도 인상적이며, 이번 영화로 데뷔했다는 게 믿기 힘들 만큼 정중동의 절제된 활력으로 후반부까지 아버지 역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감동적인 호흡을 보여주는 윌라 역의 체이스 인피니티도 강한 존재감을 새깁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큰 화면으로 봐야 비로소 그 진가를 깨닫는 명장면으로 꼽히는 후반부의 추격 장면은 그 명분이 세상을 바꾸기 위함이 아닌 삶을 지키기 위함에 있다는 점에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단적으로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혁명가의 외침에서 시작되지만 결국 우리의 삶에서 공명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세계를 바꾸겠다고 행하는 그 어떤 저항의 행위들과 비교해도 우습지 않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임하고 있는 수많은 싸움들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뛰어든 수없는 혁명을 상기시키죠. 사회와 개인을 두루 살피는 담대한 스토리라인과 주제의식, 장르의 맛을 제대로 알면서도 자기 목적에 맞게 그 맛을 활용하는 감독의 솜씨, 거기에 배우들의 끓어오를 듯한 연기까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최대작임은 분명하거니와, 어쩌면 그의 최고작일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