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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예술의 얼굴 너머 낯익은 인간의 얼굴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5 - <국보>

by 김진만
<국보>(KOKUHO, 2025)


이상일 감독의 영화 <국보>는 올해 일본 극장가에서 흥행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애니메이션이나 애니메이션 원작의 실사 영화가 득세하게 마련인 일본 극장가에서 역대 실사영화 흥행 2위 자리에까지 오른 <국보>의 흥행은 무척 이례적인 경우로 꼽힌다고 합니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일본 전통 예술을 소재로 한 정통 드라마인데다 러닝타임은 3시간을 꽉 채우는 긴 서사로 점점 짧은 콘텐츠를 선호하는 요즘 시장의 흐름을 대놓고 거스르는 영화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영화는 '가부키'라는 일본 전통 예술이 주는 진입장벽을 인물의 서사와 심리에 대한 집요한 묘사로 무너뜨리는 데 성공합니다. 이 영화로 가부키라는 예술 장르에 관심을 넘어 애정을 갖기는 여전히 어려울 것이나, 그 낯선 예술의 얼굴을 뚫고 나오는 낯익은 인간의 얼굴에 매료되지 않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이야기는 1964년에 시작됩니다. 나가사키에 기반을 둔 야쿠자 조직 두목의 아들 키쿠오(쿠로카와 소야)는 빼어난 외모에 힘입어 식당 가부키 공연에서 '온나가타'(남성 배우가 연기하는 여성 배역)을 맡아 무대에 서게 되는데, 마침 그 자리를 찾은 오사카의 유명 가부키 배우 한지로(와타나베 켄)의 눈에 띄어 자질을 인정받게 됩니다. 그러나 키쿠오는 눈앞에서 아버지를 잃게 되고, 방황을 겪던 그는 한지로에 의해 거두어져 그의 집에서 자라게 됩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가부키 배우로의 길에 들어선 기쿠오(요시자와 료)는 한지로의 아들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와 함께 고된 연습을 거친 끝에 함께 무대에올라 '온나가타' 콤비로 인기를 얻기 시작합니다. 가부키는 전통적으로 혈통 기반의 예술이거늘, 재능은 뜻밖에도 혈통과 무관한 키쿠오에게서 만개하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애써도 노력으로는 이길 수 없는 재능의 벽 앞에 슌스케는 무력해지는 한편, 키쿠오 또한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 후계자 자리를 물려받는다고 한들 돌고 돌아 결국 마주할 수 밖에 없는 혈통의 벽 앞에 좌절하고 맙니다. 그러나 '인간 국보'를 향한 키쿠오의 열망은 혈통 따위가 막을 수 없었고, 그렇게 반세기에 걸쳐 예술의 정수를 향한 그의 지난한 아니 지독한 여정이 이어집니다.


<국보>(KOKUHO, 2025)


<국보>가 다루는 '예술의 경지를 추구하는 인간의 고뇌'는 창작물에서 무척 보편적인 주제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그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는 소재로서 '가부키'를 택하며 고유한 포인트를 얻게 되는데, 이를 짚기 위해서는 우선 가부키의 고유한 특징 몇 가지를 설명해야 합니다. 가부키는 가문 안에서 도제 시스템과 유사하게 전승되는 전통 예술로 재능이 있다고 누구나 뛰어들 수 없는 매우 폐쇄적인 예술입니다. 가문이 일종의 프로덕션, 기획사가 되는 셈이며 그 안에서 트레이닝 받아 배우로 데뷔한 가문의 다음 세대는 훗날 아버지의 이름을 이어받으며 적통으로서 인정받게 되죠. 또 하나의 특징은 모든 역할을 남성 배우들이 연기하는 '금녀의 예술'이라는 점입니다. 영화 시작시에도 설명되지만 에도 막부 시절 남녀가 함께 무대에 서게 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란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남성 배우만이 가부키 공연에 오를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남성 배우가 여성을 연기하는 '온나가타'라는 특유의 포지션 또한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포인트가 '예술의 경지를 추가하는 인간의 고뇌'라는 보편적 주제에 특별한 '고뇌 포인트'를 부여하는 셈입니다. 가문과 혈통이 토대가 되는 예술에서, 가문의 적자에게는 제아무리 재능이 부족하고 성장이 더뎌도 '싫어도 해야 한다'며 부추겨가며 계보를 잇게 하려는 반면, '주워온 자식'은 제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하고 싶대도 후계자가 있는 이상 내쳐질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처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술을 향한 순수한 욕망을 품은 키쿠오는 그 욕망만 이루어져도 좋으니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리라 맹세합니다. 예술에 대한 '순수한 욕망'이라고 표현했습니다만 이게 결코 긍정적인 의미는 아닌 것이, 그의 욕망은 순전히 예술로만 채워져 있어 거기에는 인간됨에 대한 추구라든지 삶을 향한 열망 같은 게 배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에게는 예술이 곧 삶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얄궂게도 키쿠오가 품은 '핏줄의 문제'는 '본성의 문제'에 대한 비유가 되기도 합니다. 아름답고 빛나는 것만 보고 자랐을 것이기에 자연히 아름답고 빛나는 것을 추구해 왔을 슌스케와 달리, 키쿠오는 어린 시절 어둡고 폭력적인 풍경을 보고 자란 것에 대한 반대급부로 아름답고 빛나는 것을 추구해 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름다운 외모와 섬세한 표현력으로 여성 역할을 연기하기에 타고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재능만으로 돌파할 수 없는 현실의 벽 앞에서 본성의 그늘 아래 숨겨져 있던 폭력성은 불쑥불쑥 표출되며 그를 더 위태롭게 합니다. 가부키에 대한 재능을 제외하고 그가 날 때부터 지닌 모든 것이 그가 가부키의 최고 경지를 꿈꿀 수 없게 한다는 역설이, 어쩌면 그로 하여금 스스로를 소멸시킨 채 '예술이 곧 나'가 되도록 자신을 내던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상일 감독은 시청각적으로 대단히 진입장벽이 높은 가부키 공연의 현장을 정공법으로 충실히 재현하는 한편, 그 재현을 공연이 기획되고 준비되어 실연되기까지와 같은 기술의 관점이 아니라 그 공연의 중심에 서게 되는 배우의 내면이 퍼포먼스로 표출되는 영감의 관점에서 수행하며 관객을 몰입시킵니다. 넘칠 듯 말 듯한 경계 위에서 일렁이다 끝내 요동치게 되는 감정선에 주목하게 되면서, 가부키라는 장르에 낯선 관객도 이내 그 감정의 바다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국보>(KOKUHO, 2025)


전작들에서도 그랬듯 이번 <국보>에서도 이상일 감독은 감정에 대한 섬세한 접근과 사실적이고도 강렬한 퍼포먼스로 배우의 역량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는데, 주인공 키쿠오 역의 요시자와 료가 그 덕을 제대로 봅니다. 일본 영화나 드라마에 깊이 관심 있지 않다면 일본의 여러 젊은 미남 배우 중 한 명 정도로 기억할 만한 그의 이름은 이 영화로 기억할 수 밖에 없는 이름이 될 것입니다. 고결한 품위가 요구되는 가부키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절차탁마하면서도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의 벽 앞에 분노를 씹어삼켜야 하는 자가 겪는, 만개하고 찌들고 무르익은 끝에 마침내 물들이고 마는 예술가의 연대기를 50년에 걸쳐 그려내는 연기는 처음 봐도 그 섬세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가부키 퍼포먼스와 어우러져서 기대 이상으로 가슴 벅차게 다가온다. 목소리의 크기를 감정의 크기와 비례하여 취급하곤 하는 일본영화에서 이렇게 세밀하게 컨트롤되는 감정 연기로 마음이 건드려지는 경험을 하는 것도 꽤 오랜만입니다. 한편 실력과 상관없이 키쿠오의 영원한 라이벌이자 동료가 될 수 밖에 없는 슌스케 역의 요코하마 류세이 역시 쉽지 않아 보이는 캐릭터를 인상적으로 소화해냅니다. 천재형 주인공의 대척점에 선 인물로 주인공에게 질투를 느끼면서를 그를 시기하지 않고 자신의 자극제로 삼는, 혈통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한계 앞에서 발버둥치며 그는 그대로 안타까운 인물상을 보여주는 슌스케의 절박한 내면을 후반부에 이르러 강렬하게 그려냅니다.


<국보>는 가부키를 이해하고 수용하기 위한 영화가 아닙니다. 가부키의 형식과 양식이 영화의 주요 장치가 되긴 하나, 그 모든 것은 그 무대에 선 인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길잡이에 불과합니다. 압도됨과 동시에 생소함 또한 느끼게 되는 무대의 시청각적 충격 너머 익히 알겠고 짐작되는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 본 끝에 마주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후에야 비로소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예술의 가혹하고도 장엄한 아이러니입니다. 가부키라는 예술 장르의 특수성 안에서 그 아이러니가 고유의 길을 걷긴 하나, 어느 예술에라도 통용될 수 있는 이야기이고 재일 한국인 감독이 만들었다는 점에서 비단 예술의 범위에만 국한된 이야기도 아닐 것입니다. 고통과 눈물로 얼룩진 시간들이 때로 우리를 꿈결처럼 찬란한 순간으로 이끈다는 것을 보여주는 <국보>의 마지막 장면은, 더 이상 낯선 어느 나라의 예술에 머물지 않고 상처와 영광을 동시에 품은 인간의 얼굴로 다가오며 깊고 짙은 고요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국보>(KOKUHO,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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