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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선 Aug 01. 2019

실력은 연차와 비례하지 않는다

자기 성장을 책임지는 의식적 연습의 힘




경력은 10년, 실력은 초보자


드디어 오고야 말았다. 분노의 메일이.


메일은 노란 바탕색에 빨간 글씨로 뒤덮여 있었다. 클라이언트가 어느 정도로 화가 났는지 그 감정 상태가 모니터 밖으로 밀려 나오는 듯했다.


당시 나는 디자이너로만 구성된 작은 디자인 스튜디오를 다니고 있었다. 규모는 작아도 디자인 아웃풋이 뛰어나다고 판단해 입사한 회사였다. 대표와 팀장은 둘 다 디자이너였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함께 일해왔고 창업까지 함께한 동료이자 형 동생이었다. 대표는 스스로 아트디렉터를 자처하며 매 프로젝트마다 고객 커뮤니케이션을 전담했는데 팀장은 대표의 아이디어를 그래픽으로 구현했다.


이 정도 규모의 디자인 회사는 입사와 동시에 개고생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껏 혼자 고민하며 일을 해왔기 때문에 힘들더라도 잘하는 사람을 통해 배우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다. 신생회사였지만 눈에 띄는 산출물을 내놓고 있어서 회사의 아이디어 전개 방식, 비주얼 구현 과정, 클라이언트와의 커뮤니케이션, 다른 부서와의 협업 방식, 디자이너 사이의 업무 배분, 전체 일정 관리 방식 등을 보고 배우면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내가 얼마나 순진하고 헛된 꿈을 꾸었는지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즈음 나는 몇 번의 프로젝트를 리딩 하면서 한창 주니어에서 시니어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다. 아직 투박하기는 해도 나름의 디자인 방법론을 조금씩 다듬어 가는 중이었다. 프로젝트 전반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려고 노력했는데 하나의 아웃풋을 생산하기 위한 과정에서 다양한 포지션의 사람들이 어떻게 협업해야 하는지 답을 찾아가는 것이 나에게 가장 큰 화두였다. 매 프로젝트마다 클라이언트와 TF 멤버 그리고 디자인 미션이 달라지지만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패턴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직업으로서 디자인'은 거대한 맥락 안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회사의 대표와 팀장에게 디자인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절대 우월 가치였다. 클라이언트는 가르쳐야 할 대상이고 다른 포지션의 사람들은 디자인을 거드는 존재로 생각하는 듯했다. 이런 기이한 디자인 부심을 바탕으로 자기들만의 몇 가지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절대 파견은 나가지 않는다'였다. IT 업계는 에이전시가 대기업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 보안과 협업 문제 때문에 파견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회사는 파견을 나가지 않는 것이 디자이너의 자존심을 지키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어째서?)


어느 대기업의 신규 브랜드 론칭을 위한 반응형 웹사이트 구축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나는 하루하루가 불안했는데 이러다 언젠가 한 번은 팡 터지겠다 싶었던 몇 가지 이유를 말하자면 이렇다.


1. 디자인을 제외한 기획, 퍼블리싱, 개발 파트는 이미 한 공간에 모여 협업하고 있었다.

- 한 건물에서 여러 회사들이 섭외되어 협업하고 있었는데 오직 디자인 파트만이 이메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었다.


2.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았다.

- 고객이 피드백을 주면 자신들이 맞다고 생각하는 디자인을 제시했다. 클라이언트가 뭘 몰라서 이상한 요구를 한다고만 여겼고 그 때문에 프로젝트 중반을 넘어갈 때까지 디자인 방향이 계속 바뀌고 있었다.


3. 반응형 웹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다.

- 초기 디자인 제안 단계에서부터 실제 구축이 가능한지 여러 측면에서 고려해야 하는데 대표와 팀장은 컨펌을 위한 예쁜 그림만 그렸다. 그 예쁜 그림을 실제로 구현하려면 작업자들이 폰트 하나, 선 하나까지 일일이 다시 손봐야 했다. 내가 입사 전 보고 혹했던 이 회사의 포트폴리오는 그런 식의 보기에만 좋은 그림들이었다.


상황은 점차 악화됐다. 웹사이트 오픈 일정이 한 달 앞으로 닥쳤을 때 그 문제의 노랗고 빨간 분노의 메일이 날아온 것이다. 고객은 전반적인 디자인 방향성에 불만이 가득했고 피드백을 반영하지 않고 매번 동문서답하는 디자인 리더에게 화가 날대로 나 있었다. 사이트 구축을 위해선 디자인 이후 진행해야 할 단계가 많은데 컨펌이 안 된 페이지가 많아 다른 파트 회사들은 발만 동동 구르며 대기 상태로 디자인이 넘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객에게도 다른 회사 사람들에게도 디자인은 모든 악의 축으로 굳어진 상태였다.


자, 그래서 결론은?

대표가 나를 불러 말했다. "파견을 좀 나가줘야겠어."


이후 공공의 적으로서 지옥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에 대해 차마 글로 적지 않겠다. 한 달 동안 주말 없이 하루에 3-4시간만 자면서 뒷수습을 했다는 것만 알아두자.


10년, 20년의 연차가 그 사람의 전문성을 알려주는 지표가 될 수 있을까? 세상에는 어딘가 한 구석이 과도하게 결핍된 경력자들이 너무나 많다.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이런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것이다. 무능할수록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자신감이 넘친다는 더닝 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단지 연차가 많다는 이유로 인지 편향(비논리적인 추론에 따라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패턴)이 심한 사람이 사수가 되고, 팀장이 되고, 대표가 되었을 때 불러오는 재앙을 나는 이후로도 여럿 목격했다.


실력은 결코 연차와 비례하지 않는다.





초보자와 전문가는 무엇이 다른가


연차가 전문성을 대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그 사람의 능력을 평가할 수 있을까? 1980년대에 드라이퍼스 형제는 고도로 숙련된 전문가를 관찰해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을 연구했다. 그들이 제시한 5단계 기능 습득 모델을 일명 '드라이퍼스 모델(Dreyfus model of skill acquisition)'이라 부른다.


1단계. 초보자 (Novice)

경험이 부족해 매뉴얼이 필요하며 배운 대로만 실행함

동일한 유형의 실수를 반복하고 상황 판단을 못함

쉽게 포기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존함


2단계. 고급 입문자 (Advanced Beginner)

규칙에서 조금씩 탈피해 자신만의 방법을 시도하지만 아직 문제 해결을 어려워함

우선순위 판단이 미숙함

큰 그림을 잘 보지 못하고 자신과 연관이 없다고 느낌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존함


3단계. 중급자 (Competent)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할 수 있음

계획을 수립하고, 경험을 활용함

전문가의 조언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음

자신이 선택한 결과에 책임감을 느낌

접해보지 못한 문제를 만나도 당황하지 않음


4단계. 숙련자 (Proficient)

자가 교정 가능

너무 단순한 정보는 좋아하지 않음

원론적인 얘기를 실제 상황에 맞게 적용할 수 있음

맥락과 큰 그림을 이해함

우선순위 판단이 능숙함

경험상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이 가능함


5단계. 전문가 (Expert)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직관이 발달함

정보와 지식의 근원

규칙을 초월함

범위를 제한하고, 집중해서, 패턴을 발견하는 데 능숙함

새로운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 높음


전문가로 성장하는 다섯 단계는 중간에 건너뛸 수 없으며 누구나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단계를 올라가는 것은 단지 '더 잘한다, 더 똑똑하다, 더 빠르다'는 개념이 아니다. 드라이퍼스 모델은 한 사람의 능력, 태도, 관점이 기술 수준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2단계인 고급 입문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반면 전문가는 한 분야에서 고작 1~5%에 불과하다. 안타까운 점은 단계가 낮을수록 자신의 무지를 인지하지 못하는 더닝 크루거 효과에 빠질 확률이 높아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수준을 중상위권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전문가 단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현재 어느 단계에 속해있는지 판단하는 냉철한 자기 인식(Self-Insight)이 필요하다.


나는 지금 어느 단계에 있을까. 냉철한 자기 인식이 필요하다





나는 어떤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가


만화 <미생>을 그린 윤태호 작가는 무한도전에 출연해 직업과 정체성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꿈은 단순히 만화가, 과학자, 연예인이 아니라 '무엇을 하는 만화가' 이게 꿈이라고 생각한다. 직업 앞에 어떤 태도로 수행하는 내가 있어야 한다. (...) 꿈이라는 걸 꼭 직업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어?'라고 질문했으면 좋겠다.


무한도전 469화 <나쁜 기억 지우개 편>, 말을 하면 할수록 잘생겨 보이는 이유는 무엇


직업은 꿈이 될 수 없다. 어떤 태도로 그 직업을 수행할 것인지 자기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 앞서 말한 디자인 부심이 넘치던 그들이 생각하는 디자인과 내가 생각하는 디자인이 다르고, 그들이 생각하는 일과 내가 생각하는 일이 달랐던 이유는 직업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밤낮없이 디자인에 빠져 살았지만 디자인 전문성이란 무엇인지 구체화된 정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어떤 부분은 특출 나게 잘하지만 어떤 부분은 특출 나게 부족한 기형적인 형태의 전문성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균형 잡힌 전문가가 되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자기 인식을 통해 정체성을 그려나가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어떤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가.'


반복해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자기 성장을 책임지는 '의식적 연습'의 힘


원하는 내 모습을 만들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재능은 없지만 내 일을 사랑하고 잘하고 싶은 나는 어떻게 원하는 내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안데르스 에릭슨의 책 <1만 시간의 재발견>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전문성을 올리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연습'을 해야 한다. 운전, 요리, 운동 등 무언가 오랜 시간 꾸준히 하면 실력이 나아질 거라 기대하는 것은 사람들이 가장 흔히 하는 오해다. 단순한 반복은 실력 향상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편하게 저절로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이미 정체 상태에 진입한 것이다.


1만 시간 동안 노력하면 전문가가 된다는 1만 시간의 법칙은 단지 노력의 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적인 연습을 동반하지 않고 '일단 열심히 하자' 또는 '하다 보면 잘하겠지'라고 생각한다면 1만 시간의 법칙을 크게 잘못 이해한 것이다. 성실, 근면, 노력, 끈기에도 전략이 필요하다.


의식적인 연습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목표 지점과 도달 방법을 알고 있는 목적 의식이 있는 연습'이라고 할 수 있다. 낮은 단계에 있는 사람은 더 높은 단계를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목표 지점과 도달 방법을 알기 어렵다. 안데르스 에릭슨에 의하면 의식적인 연습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상위 단계를 먼저 경험한 훌륭한 코치를 두는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코치는커녕 재앙을 부르는 상사만 없어도 다행인 현실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성장시킬 수 있을까? 사수 없이 자기 성장은 불가능한 것일까?





내가 나를 가르치는 셀프 멘토링


앞으로도 백번은 더 써먹을 그림

사수 없이 무언가를 효과적으로 연습하려면 3F에 신경 써야 한다. 바로 Focus(집중), Feedback(피드백), Fix it(수정)이다. 전문성의 구성 요소를 잘게 쪼개 집중하고, 고치고, 반복하는 것이다.


전문가의 탁월한 퍼포먼스나 사고를 뒷받침하는 인지능력을 심적표상(마음 속 이미지)이라고 한다. 특정 상황에서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머릿속의 정보 패턴이다. 의식적인 연습은 심적 표상을 만드는 일이다.


'의식적인 연습'의 핵심 목적은 효과적인 심적 표상을 개발하는 것이며, 심적 표상은 다시 '의식적인 연습'에서 핵심 역할을 한다. 이 연습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 뇌에서 일어나는 핵심 변화는 한층 발전된 심적 표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며, 발전된 심적 표상은 다시 수행능력을 향상한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1만 시간의 재발견> p.133


무언가를 처음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심적 표상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혼자 하는 것이 특히 어렵다. 하지만 기초적인 심적 표상을 한 번 세우고 나면 그 위에 더 효과적인 새 심적 표상을 구축할 수 있다. 초보자와 전문가의 가장 큰 차이는 심적 표상의 양과 질에 있다. 도통 무슨 말인지 알듯 말듯한 이 얘기들을 나는 실제로 이렇게 적용하고 있다.


칼럼 <멘토는 어디에 있는가>에서 '내 안의 멘토'라는 개념을 말한 적이 있다. 내 안의 멘토는 다른 말로 내가 지향하는 자기 정체성이다. 10대 시절의 나는 그저 뭔가 만드는 게 좋아서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디자이너가 되고 보니 디자이너라는 단어 하나로는 내 일과 앞으로 되고자 하는 나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함께 일하고 싶은 디자인 전문가'라는 자기 정체성을 그리고 전문성을 구성하는 6가지 요소를 정의하게 됐다.


스스로 설계한 내 안의 멘토 (이 그림 한 장 그리는데 걸린 시간, 무려 10년)


앞으로 <사수 없는 디자이너가 성장하는 법> 매거진을 통해 '전문가의 여섯 기둥(태도, 지식, 기술, 사고력, 커뮤니케이션, 디렉팅)'에 대해 하나씩 상세하게 풀어갈 예정이다. 그전에 그림에 대해 먼저 간략히 말해보자면, 위로 갈수록 주니어 레벨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요소들이고 아래로 갈수록 시니어 레벨로 올라가기 위해 갖춰야 할 요소들이다.


태도, 지식, 기술은 경험이 부족해도 갖출 수 있는 요소다. 경력이 쌓이면서 기본 3요소를 갖추고 나면 그 이상의 역량이 필요해진다. 사고력과 커뮤니케이션은 글로 배우기 어려운 요소다. 반드시 경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프로젝트를 리딩하고 여러 포지션과 협업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이다.


디렉팅은 리더급으로 도약하기 위해 갖춰야 할 역량이다. 앞에서 말한 5가지 요소를 잘 갖추고 있다 해서 반드시 디렉팅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유능한 숙련자가 유능한 선생님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방향을 제시하고 팀을 이끌어가는 것은 전혀 다른 범위의 역량이다.


나는 항상 내가 속한 단계가 어디인지 돌아보고 이 6가지 요소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배우고 생각하며 일하고 있다. 어느 요소는 잘하지만 어느 요소는 부족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그림을 머릿속에 담아두고 살피며 하나씩 보완해 나간다. 심적표상은 스스로 피드백을 가능하게 만드는데 이러한 자기 교정은 전문가의 가장 중요한 자질 중 하나다.


전문가의 여섯 기둥은 비단 디자이너라는 직군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기본적인 틀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틀을 갖추는데 10년이 걸렸지만 이 글을 보는 누군가는 이 틀을 자기 성장의 지도로 커스터마이징하고 활용해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면 좋겠다.





이진선 3.0 신규 버전이 출시되었습니다


연차와 경력이 쌓일수록 회사에서 요구하는 범위가 달라진다. 더 많은 일, 더 어려운 일을 하게 되면서 어느 순간에는 초보자 시절에 알던 디자이너의 일이 아닌 다른 형태의 일을 하기도 한다. 이때 자기 나름의 심적표상 시스템이 없다면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위험이 있다. 직업, 소속, 직급이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나의 중요한 측면을 담고 있는 정체성을 재규정할 필요가 있다.


내 안의 멘토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성장 단계에 따라 정교화되고 확장하며 새로운 요소가 추가되기도 한다. 오래전에 설계한 나의 멘토 '함께 일하고 싶은 디자인 전문가'를 지금 시점에서 더 구체적으로 정의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능동적으로 대상의 맥락을 파악하고 우선순위적절함을 추구하는 사람이야.


나는 단순히 예쁜 그림을 그리는 사람 또는 포토샵 프로그램을 다루는 사람이 아니다. 때로는 일에서 시각적인 요소를 전혀 다루지 않을 수 있고, 때로는 시각 요소를 포함해 서비스 전반을 포괄하는 솔루션을 제안해달라는 요청을 받을 수도 있다. 일의 성격이 바뀐다 하더라도 맥락을 파악하며 우선순위와 적절함을 추구하고 있다면 나는 여전히 디자이너다.


직업이 아닌 정체성을 한 문장으로 적어보자. <아주 작은 습관의 힘> p.312


이진선 1.0 디자이너에서 이진선 2.0 함께 일하고 싶은 디자인 전문가를 거쳐 이진선 3.0 영감을 주는 사람으로 버전 업하는 동안 나는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디자인과 상관없어 보이는 글쓰기를 시작한 후로 "디자인은 이제 안 하실 건가요?"라는 질문을 받지만 글쓰기는 디자인 범위 안에 있는 일이다. 다만 그 재료가 그림이 아니라 글자일 뿐. 글쓰기는 다음 버전으로 도약하기 위해 또 하나의 심적표상을 구축하려는 새로운 시도다. 신규 버전의 이진선은 이전 버전의 나를 포함한다.


사수 없이 혼자 일하는 디자이너들이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조금 더 자기 자신을 관찰했으면 좋겠다.


전문가는 독학자다. 자기 자신을 가르쳐라.

우리는 스스로 멘토가 되어야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아니, 나는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가?





참고 도서

안데르스 에릭슨 <1만 시간의 재발견> p.133

이마이 무쓰미 <배움이란 무엇인가>

앤디 헌트 <실용주의 사고와 학습> pp.19~33 passim.

제임스 클리어 <아주 작은 습관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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