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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진범 Jul 23. 2021

유서

2002년 겨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LA로 놀러 가기로 하였다. 

미국에 머무는 어릴 적 친구들끼리 따뜻한 LA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비행기표를 구매하였고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 머물 호텔까지 예약을 하였다. 

이제 LA로 가서 친구들과 만나서 즐거운 추억을 쌓고 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던 어느 날, 

2001년 뉴욕에서 9.11 테러를 범행한 오사마빈라덴의 영상메세지가 공개가 되었고, 

이번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두 번째 공격을 시도하겠다는 일종의 선전포고 메시지였다. 

워싱턴DC와 LA등에서 테러를 강행 할테니 두고 보라는 메시지를 담은 영상이었다. 

나의 목적지인 LA를 직접 지목한 것이 나에게는 너무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고 

학교 친구들과 선생님들도 모두 나를 말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도 LA를 가보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과 

또 오랜만에 어릴 적 친구들을 미국에서 만난다는 기대감에 선뜻 여행을 취소하지 못하였다. 

미국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두 번씩이나 테러를 당할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우선 여행은 예정대로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었어도 겁이 나는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왠지 이번 여행이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유서를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랑하는 부모님께.

엄마, 아빠! 죄송합니다. 이 편지를 읽을실때면 저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거겠죠? 

그렇게 반대하셨는데 이렇게 여행을 떠나서 슬픈 소식을 전해드리게 되어 너무 죄송해요. 

엄마! 아빠! 그래도 지금껏 엄마아빠덕분에 많은 좋은 경험들을 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했어요. 

미국으로 유학을 온 후 너무 많이 보고 싶었어요. 또 보고 싶은데 이제 볼 수가 없네요...”



눈물과 함께 써 내려가기 시작한 나의 유서는 다섯줄을 체 채우지도 못하였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고 마음을 진정시켜보니, 부모님께 죄송하고 사랑한다는 말 이외에는 쓸 말이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었겠지만 스스로 느끼기에 뭔가가 매우 허무했다. 


'내가 아직 어리긴 하지만, 그래도 이뤄놓은 것이 하나도 없구나... 내 것이라고 내가 말할 수 있는 게 단 하나도 없구나...'


옷 몇 벌, 신발 몇 켤레, 가방 몇 개, 책 몇 권. 이것들 외에는 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한심했다. 

분명 더 멋진 삶을 꿈꾸며 유학을 왔는데, 그리고 나 때문에 우리 가족 모두가 많은 희생을 하고 있는데 

나 혼자 친구들 만나러 가고 싶다고 이렇게 유서를 쓰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한심했다. 그리고 너무 창피하고 죄송스러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철없고 어린 행동이었지만, 유서를 쓰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해볼 수 있었고, 더욱 이야깃거리가 많은 삶을 살아가야겠다고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LA에서 만나기로 했던 다른 친구들의 부모님들께서도 모두 반대를 하셔서 크리스마스의 LA여행은 취소가 되었다. 그리고 제2의 테러 또한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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