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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보너머 Jun 24. 2021

90년대생 반(反)자유주의자 박성민

편집자 주 : 진보너머 회원 구한솔님이 진보너머 브런치에 기고한 글입니다. '아이돌 의상'과 '성인용품' 규제 등의 검열이슈에 목소리를 높인 것 외에는 별달리 청년의제에 기여한 바 없는 인물을 최근 청와대 청년비서관으로 등용한 것이 논란입니다. 이러한 인사가 청년들에게 왜 환멸만 불러일으키는지에 대한 지적.


<90년대생 반(反)자유주의자 박성민>     


아직도 예능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검열의 상징처럼 각인된 사건이 있다. 한때 국민예능이라 불렸던 MBC <무한도전>에서 고정패널인 노홍철의 결혼 파트너를 주선하는 특집을 기획했지만, 빗발치는 방영중단 요청에 의해 방영 1회 만에 프로젝트가 무산된 사건이다. 그 다음 주 분량에서는 패널들과 PD가 줄지어 곤장을 맞으며 잘못을 책임지는 퍼포먼스를 선보였고, 애당초 기획된 <홍철아 장가가자!> 특집의 분량은 전량 폐기되었다.


해당 사건이 남다른 의미를 갖는 이유가 있다. 유교 도덕과 일제 강점의 영향을 받아 극도로 자유가 억압된 한국사회에서는 그간 정부나 군대와 같은 국가권력에 의해서 검열이 진행되어왔으나, 상술된 사례의 경우 소수지만 강력하게 응집된 일부 대중이 문화권력을 악용해 검열을 관철시켰기 때문이다.      


그것이 ‘최초의 사례’라고 보기에는 어려우나, 그 대상이 국민예능이었던 만큼 여파는 엄청났다. 그 이래로 소위 ‘프로불편러’들에 의한 무수한 검열이 이루어졌고, 승리의 경험을 맛본 이들은 나날이 독선적으로 변모해 틈만 나면 타인의 자유를 억압했다. 지금도 자신들의 행위를 ‘무오류’로 상정한 폭압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떠오른 대한민국의 고질적 문제점은, ‘시민적 자유’라는 가치가 너무나도 경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정치사회적적 다원주의를 표방한 나라가 분명하지만, 의식만큼은 전근대 수준인 이들이 사회 곳곳에서 발호(跋扈)하고 있다. 그래서 성적 자유를 주장한 마광수는 어처구니없는 판결로 실형을 받고 빈곤과 우울 속에 죽어갔고, 모범적인 아이돌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그 나이 또래의 발랄한 자의식을 표현하고자 했던 설리는 인터넷 마녀사냥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시민적 자유’라는 가치를 경시하는 건 정치 또한 마찬가지다. 이는 보수-진보를 막론한 문제라, 아직도 한국정치는 사실상의 양당제와 보스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라는 개념을 오직 경제 분야에만 적용해 시장의 약육강식 논리를 정당화하면서 사회-문화적으로는 전통적 규범을 강요하는 보수 세력에게는 애당초 기대치가 낮았지만, 진보 세력조차 검열과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갈망하는 대중들의 기댈 언덕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특히 권위에 반발해 자유를 노래한 X세대와 그 이후 세대 역시 기성 진보 세력과 거리를 두는 이유가 있는데, 기성 진보 또한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분과 실체가 불분명한 ‘위협’을 내세워 다른 누군가의 시민적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려 들기 때문이다.


90년대생 박성민을 청와대 청년비서관으로 임명한 文 정부의 결정에 반감을 느끼는 청년층의 여론도 바로 이러한 맥락으로 읽어야 한다. 37세의 나이에 거대 야당의 당대표가 된 이준석 현상에 대해, ‘젊음에는 젊음으로 맞불을 놓겠다’는 식의 안일하고 얄팍한 대응이 일단 너무 표가 났다. 호오를 떠나 이준석이 가치를 가지는 이유는 ‘생물학적 젊음’이 아니라, 미지의 영역을 자유 경쟁을 통해 개척해낸 ‘개척자로서의 면모’ 때문이다. 즉, 젊은 나이와 상대적으로 짧은 경력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성 정치인들을 경쟁에서 이겨낸 혈기방장(血氣方壯)한 면모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다. 이준석이 상층부의 자의적인 톱다운(Top-down)식 결정으로 임명된 박성민과 ‘젊음’이라는 공통분모로 엮이기에는 너무 결이 다르다.
 

더구나, 그간 박성민의 정치적 행보가 (표면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을 내세우지면 내실에서는 유교 탈레반과 다를 바 없는) 전형적 ‘프로불편러’의 행태를 띠고 있는 것도 우려스럽기 그지없다. 무생물에 불과한 리얼돌을 통한 성욕 해소조차 죄악시하며 규제하려 들었고, 걸그룹 블랙핑크가 뮤직비디오에서 간호사 복장을 입고 나온 것을 문제 삼고 거대 기획사 YG 엔터테인먼트가 억지 사과를 하게 만들었다. 즉, 그녀는 생물학적으로만 젊을 뿐이지, 전형적인 반(反)자유주의자인 것이다. 지금껏 어떤 방식으로든 남다른 정치적 커리어를 쌓아온 그녀가 은근슬쩍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돼서 시민적 권리를 억압하는 온갖 규제법안을 만들까봐 솔직히 걱정된다.     

내친 김에, ‘자유’라는 가치가 어떻게 하면 보장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역설하고 싶다. 보편적인 현대 문명국은 ‘자유’의 가치를 기본 값으로 상정하고 있다. 즉, 자신이 중요시 생각하는 의제를 위해서 언제든 엿 바꿔 먹을 수 있을 만큼 가볍고 하찮은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허나 한국에서는 많은 이들이 일시적 당리당략을 앞세워 이를 마구잡이로 파괴하며 피로감을 증폭시키고 있으며, 그나마도 오직 자신의 입장을 보호하고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 규제/검열을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으로 적용하는 식이다. 특히나 진보연 하는 이들이 이런 태도를 보일 때 대중들은 ‘이중적’이라 느끼며 등을 돌린다는 걸 왜 모르는 것인가.    

  

‘리버럴(Liberal)’은 순전히 ‘자기가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 아니다. 사실 그 누구나가 자신이 가진 최대치의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고, 이를 더 누리고 싶어 한다. 관건은, ‘남의 자유를 얼마만큼 관용해 줄 수 있느냐’이다. 많은 이들은, 자유가 남의 것을 빼앗는 ‘투쟁’을 통해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하는데, 사실은 마음에 안 드는 것도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는 ‘마음의 여유’들이 모여 자유로운 사회를 만든다. ‘마음에 안 드는 것’과 ‘피해를 주는 것’의 차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하며, 불쾌감을 유발하는 대상을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적당히 참아 넘길 줄 아는 게 진보적 자유주의자가 가져야 할 소양이다. 그런 소양도 없으면서 검열/규제의 ‘ㄱ’자를 아무 성찰 없이 입에 올리는 이들에게 이젠 제동을 걸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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