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비판으로 포장된 엘리트주의?
편집자 주 : 운영위원 박가분의 기고글입니다. 본래는 진보진영 내부의 엘리트주의를 반성하기 위한 '능력주의 비판' 담론이 국내에서는 오히려 진영논리를 강화시키는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엘리트의 특권을 정당화하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와 대중이 공유하는 공정관을 세심하게 구분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사람들이 일상의 삶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에 반향을 일으키기 위해, 이 전략은 비난을 토해내기보다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미래에 대한 상을 제시하면서 그들이 존재하는 위치, 느끼는 방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118p)
- 샹탈 무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
이준석이 37세의 나이로 제1야당 당대표로 취임한 직후 여권 지지층과 민주진보 진영 스피커 내에서 별안간 ‘능력주의 비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준석이 ‘쉬운 해고’ 등을 내세우며 들이미는 사상, 가치는 시대착오적인 시장만능주의와 경쟁지상주의 그리고 엘리트주의의 혼합물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가진 사상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이 대중에게 어떻게 비춰지는지이다. 그를 예의 관성적인 방식으로 능력주의=엘리트주의자라고 비판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현재 청년 대중들에게는 ‘좌파 엘리트주의’의 해악이 더 크고 구체적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에게 ‘좌파 엘리트주의’란 각종 계층 할당제와 온정주의로 포장된 이념적 정실주의(nepotism)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민주화 세대의 습속(아비투스)에 물들지 않은 한편 매일의 무한경쟁을 헤쳐나가는 이들은 청년이나 여성 그리고 각종 사회적 취약계층을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파격등용하는 (민주진보 진영이 즐겨 사용하던) 퍼포먼스를 봐도 희망을 얻기보다는 이를 무임승차라며 냉소한다. 아무리 이준석이 한국형 시험만능주의로 왜곡된 우파 엘리트주의자라 해도 정작 ‘정치인도 자격능력 시험을 봐야 한다’는 언행에 대중이 열광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의 엘리트주의가 역설적으로 ‘엘리트 비판’으로 비춰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의 뒤틀림을 감안하며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반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능력주의’와 ‘엘리트주의’라는 단어를 단순한 정치적 욕설의 용법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 유행하는 능력주의 비판은 정말 제대로 과녁을 맞추고 있는가? 대중도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현재 유행하는 능력주의=엘리트주의 비판이 정파적 이해로 급조되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우선 ‘능력주의 비판’을 사악한 정적을 물리치기 위한 퇴마의식 주문으로 소비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불평등 문제에 대한 비판적 연구자이자 최근에는 ‘사회주의가 시급하다’다고 발언할 정도로 급진화된 토마 피케티는 정작 ‘능력주의’를 ‘세습’과 반대말로 간주한다. 그는 자신의 출세작 <21세기 자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불평등은 민주주의 사회의 토대를 이루는 능력주의의 가치들을 근본적으로 침식한다.(8p)” 그 외에도 <21세기 자본> 곳곳에서 그는 능력주의적 가치에 대한 믿음 위에 현대 민주주의 사회가 성립한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피케티가 대중이 일상적으로 공유하는 능력주의적 믿음에 결코 의문을 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는 불평등한 사회경제적 구조가 대중이 견지하는 그러한 믿음을 훼손하고 있다는 식으로 사태를 비판한다. 다음으로 그는 상위 1%에게 경제력이 집중되는 현실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왜곡된 능력주의’로 간주하며 비판한다. 과도한 경제력 집중은 잘못된 정치와 분배구조의 결과이지 소수 부자들의 특별한 능력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그는 대중의 일상적 습속으로서의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 나의 능력을 세상은 알아줄 것이라는) 능력주의적 믿음을 한 편에 두고 특권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능력주의를 다른 편에 두며 세심하게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어디선가 ‘지배계층의 이데올로기가 항상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인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우리는 같은 것을 능력주의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능력주의 비판에서 자주 소환되는 마이클 샌델의 책 <공정하다는 착각> 역시 제대로 읽히고 있을까? 그의 능력주의 비판도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다. 동시에 그의 활시위는 (엄연한 불평등 사회의 피해자인) 노동계급 트럼프 지지자들을 몰이해했던 민주당 엘리트의 오만과 독선을 겨냥하고 있다. 또한 그는 책 이곳저곳에서 미국 민주당 정부가 금융자본 엘리트의 적극적 옹호자였다는 점을 뼈 아프게 비판한다. 이처럼 샌델의 능력주의 비판은 진영 내부비판이라는 문맥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반면 한국에서 유행하는 능력주의 비판은 기존의 진영논리를 엄호하고 확대재생산하는 쓰임새로 활용되고 있다. 그런 식의 평면적 수용으로는 왜 대중이 트럼프나 이준석의 능력주의적 수사(rhetoric)에 열광하는지를 놓치고 만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진보주의자들이 흔히 내세우는 할당제나 소수자 우대정책이 결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는 길이 아니라는 샌델의 지적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논쟁은 능력주의 자체를 따지지는 않고, 어떻게 그 원칙을 실현하느냐를 놓고 이뤄진다. 가령 보수주의자들은 인종이나 민족을 입학 고려 요소로 보는 소수집단 우대정책이 능력주의적 입학제도에 역행한다고 주장한다. 진보주의자들은 이러한 소수집단 우대정책이 계속되고 있는 불공정을 시정하는 방법이며, 참된 능력주의는 특권층과 취약계층 사이의 출발선을 고르게 하는 조치로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33p)
명문대학에 대한 계층별 할당과 안배를 강조했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엘리트주의와 능력주의의 혐의에서 자유로울까? 그간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잠재된 능력을 제대로 발현시키기 위해서는 능력 있는 소수자, 약자를 적극적으로 발굴해 사회 지도층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그러나 샌델이 지적하듯 이것은 능력주의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아니다. 오히려 샌델은 정치인들이 적극적 우대조치를 적극 수용할 동안 의회의 인종적·성적 다양성은 증대한 반면 저학력 노동계급 출신 정치인은 거의 사라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많은 사람들이 샌델을 인용하면서도 정체성 정치의 맹점을 지적하는 이 대목을 간과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처럼 진보주의자들은 ‘고학력 엘리트의 성적·인종적 다양성’이 사회통합에 기여한다는 믿음에서 우파와 차이를 보일 뿐, 엘리트가 사회를 이끌고 어젠다를 선도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동일한 전제를 공유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준식식 능력주의에 대항해 예의 관성적인 방식으로 ‘정체성 정치와 적극적 우대조치’를 내세운다면 그것이야말로 대중들의 눈에 ‘더 나쁜 엘리트주의’로 비춰질 것이다. 우리가 겪는 딜레마의 핵심은 현재의 정치담론 지형에서 사회지도층의 구성을 두고 다투는 좌파 엘리트주의와 우파 엘리트주의의 대립만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혹자는 능력주의 비판을 사회경제적 불평등 비판으로 보다 ‘급진화’하면서 여러 사회경제적 대안에 관한 논의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반만 맞는 말이다. 민주진보 진영에 내에서 이뤄졌던 각종 인사들을 이념적 정실주의로 인식했던 이들은 이를 ‘약자’나 ‘취약계층’ 기회부여로 포장하는 것에 대해 거의 조롱당한 기분을 느끼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불평등을 해소’하겠다고 자처하는 정치 엘리트들의 담론을 대중은 과연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아무리 좋은 대안이 있어도 민주진보 정치 전반에 대해 그 동안 축적된 불신과 부정적 감정을 해소하지 않고서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정치철학자 샹탈 무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대중’의 구성을 예측하기 위해 중요한 질문을 고려해야한다. 정치적 정체성들의 구성(constitution)에서 정동(affect)이 갖는 결정적 역할에 대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 여러 동일화 과정에서 정동적 차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은 합리주의적 구조에 갇혀 있는 좌파가 정치의 동학을 이해할 수 없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111p)
앞서 이야기했듯 사회 지배계층의 교체와 그 ‘내부’의 다양성 확보를 내세웠던 진보주의자의 선의(?)마저 상당수 대중의 눈에는 대단히 '엘리트주의적'이고 ‘오만’하게 비춰졌다. 그 중 일부는 이준석을 그러한 오만에 대한 ‘신의 채찍’으로 여기고 있다. 지금 전개되고 있는 능력주의 비판 담론이 불평등에 대한 비판과 진지한 대안제시가 아니라 ‘노력을 통해 더 나은 삶을 거머쥘 자격이 있다’고 믿는 알반대중의 상식을 공격하거나 조롱하는 모양새로 비춰지면 곤란하다. 현실은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비춰지고 있다. 인국공 사태에서부터 최근 청년비서관 임명 논란까지 진보주의자들이 그 동안 온정주의로 포장해왔던 것이 오히려 더 냉혹한 엘리트주의로 인식된 저간의 사정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를 먼저 점검해야 한다.
대중담론을 분석할 때 우리가 흔히 범하는 실수 중 하나는 이데올로기의 내용과 일부 이데올로그의 발화의도를 너무 손쉽게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많은 사람들은 이준석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관심이 없다. 그가 가진 사상이 우파적인지 시장주의적인지 능력주의적인지 엘리트주의인지도 관심 없다. 청년들은 이준석에게서 ‘현재의’ 지배적 엘리트들이 보이는 오만과 독선을 심판하리라는 기대를 거는 것이 사태의 핵심이다.
여기서 우리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대중정치의 자장 내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조심스럽게 분별해서 봐야 한다. 자격 내지는 능력을 중시하는 대중적 사고는 속되게 말해 ‘엘리트가 다 해 먹어도 된다’는 형태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층이 정말 자격을 갖추고 있느냐’는 ‘의심의 해석학’의 형태로 작동한다. 그런 의미에서 능력주의 신화가 애초에 그 의도에서 소수 엘리트의 반민주주의적 욕망으로 고안되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민주주의의 역동성에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기여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정유라, 최순실 같은 ‘자격 없는 이들에게 권력을 맡길 수 없다’는 공분이 대규모 촛불시위로 확대된 사례이다. 현재 민주진보 진영은 바로 그러한 촛불의 유산 위에 서 있다. 분별 없는 능력주의 비판은 자칫 자신이 선 기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국내외 포퓰리스트 정치인들 중에서 좌파든 우파든 엘리트 과두정치를 비판하는 자신을 ‘더 나은 자격과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포장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 이처럼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는 겉보기처럼 단순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검찰개혁’에서 ‘복지국가’까지 그간 민주진보 진영이 내세운 사회경제적 어젠다들이 ‘공정한 사회’를 바라는 대중들 사이에서 공명을 일으키고 더 넓은 동의지반을 구축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전략이 무엇인가. 이것은 당장 포지티브하게 말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환상부터 버려야 하는지는 분명하다. 먼저 대중적으로 수용된 관념을 손쉽게 희화화 하고 허수아비 때리기를 하지 않는 것이 관건이다. 예컨대 청년들이 정말 능력주의를 순진한 형태로 받아들였다면(예컨대 시험 성적이나 학벌 등으로 누군가에게 권위를 부여했더라면) 조국 법무부장관 임명에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간 대중들 사이에서 ‘엘리트 자리 나눠먹기’로 비춰진 자기만족적 정체성 정치의 퍼포먼스가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민주진보 진영이 그간 놓친 (청년)지지층과의 소통채널 복원에 나서야 한다.
참고문헌
데이비드 굿하트 (2019), <엘리트가 버린 사람들>, 원더박스
토마 피케티 (2014), <21세기 자본>, 글항아리
토마 피케티 (2021), <피케티의 사회주의 시급하다>, 은행나무
마이클 샌델 (2020), <공정하다는 착각>, 와이즈베리
샹탈 무페 (2019),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문학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