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세대분들 손 들어보세요
오늘 아침, 계절도 바뀌고 심경의 변화를 느꼈는지 집 안 분위기를 확 바꿔보기로 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러자고 생각한 순간부터 막 가슴이 벅차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걸 엘돌핀이라 그러나?
요는, 거실에 두었던 책상을 방으로 옮기고(아늑한 작가의 공간으로 꾸밀 예정) 방에 있었던 책장을 거실로 옮기기로 한 것. 책장 위쪽에 진열되어 있던 CD들을 꺼냈다. 거실에 있는 작은 책장엔 맞지 않았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책장을 아예 꺼내버려 CD를 보기 좋게 진열하고 필요 없는 종이 쪼가리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CD와 LP판들, 책으로 거실 책장을 채울 것이다.
시집을 오기 전 살던 집엔 태광 에로이카 전축이 있었다. 이 아이는 멀티로 카세트, CD, LP, 라디오가 다 되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소중한 아이인데 챙기지 못했던 게 큰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음악을 무척 좋아해서 그나마 카카오뮤직 등에 음악을 저장해 듣거나 유튜브 검색으로 들었다. 노트북이 생기고 나서는 가끔씩 노트북에 CD를 넣고 듣곤 했다. 크고 대단한 스피커가 장착되어 있는 건 아니기에 미비하지만 그래도 내가 모은 CD들을 플레이하는 재미가 있었다. 바로 오늘이 그런 날이다. 30년 전 레코드사에 일할 때부터 하나둘 모아두었던 내 손때 묻은 CD들... 아... 뭔가 울컥하면서 눈가가 촉촉해진다. 30년 20년 15년 나의 손때가 묻은 아이들과 함께함이 이 얼마나 벅차고 기쁜 일인지 모르겠다.
노트북에 플레이한 CD는 93년도 필립스에서 제작되어 나온 올 마이 러빙 시리즈 볼륨 4다. (ALL MY LOVING • VOL 4) 첫 곡 <shakespear's Sister의 Stay>가 흘러나온다. 그 순간 뭔가 모를 기쁨과 자유를 만끽한다. 고작 작은 노트북 스피커를 통해 울려 나오는 소리일 뿐이지만 그 어떤 소리보다 찬란하고 아름답다. 지나간 시절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남자에 관심이 없었던 나는 음악과 책을 좋아했다.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며 한 시절을 지내왔다. 30년이란 세월이 아득하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러 흘러 여기까지 왔는지ㅠ 다음 곡은 <빅트로 라즐로의 유아 마이 맨>이 흐르고 있다. 도톰한 입술에 빨간 립스틱이 어울린다며 서슴없이 얘기해 주던 같이 일하던 언니야도 생각나면서... 가장 어리고 예뻤던 그야말로 피멍울이라 불리던 시절이 소환되었다. CD 한 개 플레이했을 뿐인데 그 시절 속으로 꿈꾸듯 여행 다녀온 기분이 드는 것이다.
이토록 음악은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준 아이로 남겨질 것이다. CD를 정리하며 갑자기 아날로그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아날로그 세대는 디지털 기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 주로 20세기 후반에 성장한 세대를 의미하며, 1980년대생까지를 아날로그 세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아날로그 세대는 디지털 기기가 널리 퍼지기 전, 아날로그 방식의 미디어(비디오테이프, 카세트테이프, 아날로그 TV, 폴더폰 등)를 경험한 세대입니다> 아... 비디오테이프, 카세트, 아날로그 TV, 폴더폰 다 사용해 본 것 들이다. 아... 나 나이 많이 먹었구나ㅠ
이때는 폴더폰을 사용하는 것도 신기했고, 삐삐 차고 다니는 것도 참 정겹고 재밌었다. 삐삐는 좋았던 게 앞의 인사말에 음악을 직접 녹음해 넣을 수 있어 좋았다. 그때가 살짝이 그립다. 내가 좋아하던 곡들을 선곡해 카세트테이프에 하나하나 녹음해서 선물도 많이 했었다. 특히 레코드판을 녹음했을 때는 그 특별함이 더 좋았다. 20대 초반에 줄기차게 다녔던 광복동 무아음악실을 빼놓을 수 없겠다.
손때 묻은 CD 한 장을 플레이하며 이렇게 줄줄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니 참으로 놀랍다. 난 감성이 아주 풍부한 사람인 것 같다. 음악으로 벌써 그 시절의 필름들이 파로나마처럼 지나갔다. <보이즈 투맨의 플리즈 돈 고>가 흐른다. 편리하고 새로운 것들을 꼭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다. 이미 내가 누려왔고 즐거워했던 것들로부터도 이렇게 자유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제부터 슬슬 정리를 시작해 봐야겠다.
https://youtu.be/CIXaTbIQt_Y? si=AbJHC5 fZVqqYFVV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