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이들을 재우기 전 프로젝트 빔으로 전래동화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 집에선 하늘티비라 부른다. 체력이 넘치는 아이들은 불을 끈다고 절대 바로 잠들지 않기에 잠들기 전까지 무엇이라도 해서 시간을 좀 보내야 한다.
큰애가 어릴 때 누워서 책을 읽어주다 아이가 휘두른 발에 책이 떨어지며 내 눈알을 스쳐 응급실에 간 이후, 침대에는 책을 들이지 않는다. 그러다 유아용 빔 프로젝트를 발견해 자기 전에 틀어주는 데 엄마가 읽어주는 것보다 집중도 잘하고 다양한 이야기가 나와 어휘 발달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사용 만족도가 꽤나 높은 아이템이다.
큰 애가 4살 즈음부터 봤으니 거의 2년째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보는데도 지겹지도 않은지 매일 밤 또 틀어달라 말한다. 이제 3살이 된 둘째도 잠들 기 전 침대에 누우면 정자세로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티비가 켜 지길 기다린다. 습관은 참 무섭다.
양치질을 하고 양치 캔디를 먹으며 침대에 나란히 누워 하늘티비를 대여섯 개 보고 나면, 높게 올라와있던 아이의 텐션이 한층 꺾여 쉬이 잠에 드는 기분이다. 역시 육아는 장비빨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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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함께 하늘티비를 보다 보면, 분명 내가 알고 있던 이야기들이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린 시절에 읽고 그 뒤로 살아오면서 거의 떠올리지도 않던 동화들. 그렇게 어른이 되어 다시 접하게 된 동화들은 꽤나 많은 부분이 어린 시절과 다르게 와닿았다.
마녀를 끓는 물에 넣어 죽인 헨젤과 그레텔, 성냥팔이 소녀의 신발을 재미로 뺏아간 동네 남자아이들, 기름통 속에서 죽어간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추위와 무관심 속에서 죽어간 네로와 파트라슈...큰 아이는 많은 이야기들에서 슬프다고 눈물을 보였고, 나 역시 동화의 내용들이 너무 잔인해서 깜짝 놀라버렸다.
어릴 땐 세상이 아름답게만 보여 느끼지 못했던 감정인 걸까?
그 와중에 선녀와 나무꾼의 이야기는 내 마음을 아주 분통이 터지게 만들었다.
목욕하는 선녀의 옷을 훔친 것도 모자라 결혼을 강요하고 두 아이를 낳아 키우게 하다니. 하루아침에 나무꾼의 아내가 되어 낯선 세상에서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게 된 선녀는 매일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아이 셋을 낳기 전까지 절대 선녀 옷을 돌려주지 마라고 한 사슴의 조언을 잊은 나무꾼이 선녀 옷을 찾아주었을 때, 아무 미련 없이 두 아이를 안고 하늘로 훨훨 날아가버린 선녀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 것 같아 눈물이 날 뻔했다. 그렇게 아이와 아내를 잃은 나무꾼은 또 구질구질하게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행복하게 산다는 뻔한 해피엔딩이 해피하지 않게 느껴지는 건 내가 너무 삐뚤어져서일까?
어쨌건 억세게 운이 좋은 나무꾼은 물건을 훔치고도 아주 복에 겨운 인생을 살았는데 거기에 더해 하늘나라에 있는 처가덕까지 보며 일도 하지 않고 평생을 호의호식하며 지내게 된다.
선녀와 나무꾼이야기에서 나무꾼이 이렇게 얄미운 캐릭터라는 걸 이제야 깨닫게 되다니... 모든 이야기의 해석은 주관적이라는 사실은 전래동화에도 예외가 없나 보다.
갑자기 선녀 옷을 뺏기고 두 아이를 낳아 키우게 된 선녀에게서 지금의 내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어쩌면 화가 났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늘을 훨훨 날 수 있는 날개옷을 뺏기고 누군가의 아내로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 보람차고 행복하지만 무엇인가가 사라진 느낌의 삶이다.
선녀가 다시 날개옷을 찾아 훨훨 날아간 것처럼 나 역시도 다시 사라진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겠지?
그때가 되면 선녀를 다시 찾은 나무꾼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조금 더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얼른 사라진 나의 날개옷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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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분통 터지는 이야기이지만 어쩌면 선녀와 나무꾼은 남자들의 로망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이 이야기 속엔 유난히 나무꾼의 노력이 빠져있다. 사냥꾼에 쫓기는 사슴을 도와준 그 하나로 인생이 대역전돼버렸으니 로또도 이런 로또가 없다.
남자의 입장에선 너무나 꿈같을 이야기라서 노래로도 만들어진 건 아닐까? 요즘 아이들은 잘 모를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노래를 중년의 아저씨가 얼마나 맛깔나게 잘 부르던지... 어릴 때 나는 그 아저씨가 가수가 되기 전의 나무꾼이라도 되는 줄 알았었다. 참 우습게도 순진했던 시절이다.
생각해보면 백마 탄 왕자님이 나와 인생을 뒤바꿔 주는 공주님들의 이야기는 널린 데에 반해 여자를 잘 만나 남자의 인생이 단박에 역전이 되는 이야기는 잘 없다.
늘 용감해야 하고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남자들의 이야기에서 한 두 개 정도는 거저먹어도 되지 않을까?
내가 딸이 있었다면
"절대 선녀처럼 살지마. 낯선 곳에서 씻지도 말고 물건을 흘리고 다니지도 말고 누가 협박한다고 해서 굴복하지도 마!"
라고 했겠지만, 나에겐 아들만 둘 이기에
"적당히 대충 착하게 살면서 좋은 기회가 오면 꽉 움켜 잡으렴. 나무꾼처럼 살아."
이라고 말할 수밖에.
그러고 보면 이 이야기를 만든 건 아들을 둔 누군가는 아닌가 싶다. 고단한 일상을 살아내는 아들에게 이런 꿈이라도 꿔 보라 지어낸 달콤한 위로의 이야기 말이다.
동화는 동화일 뿐. 아이들과 함께 보는 이 이야기들이 아이들에겐 좋은 이야기로만 남아 세상을 잘 살아내는 소중한 양분이 되어주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