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상담의 기간이다. 새로운 환경에 아이가 잘 적응을 하는지 원에서의 태도는 어떠한지 등에 대해 담임교사와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다. 상담에 앞서 사전 설문지라는 걸 작성해야 하는데, 그 종이를 앞에 두고 앉아있으면 대체 무엇을 먼저 써야 할지 막막한 기분이 든다.
내 아이의 생활습관이 어떠한지, 나쁜 습관은 무엇인지, 주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등등 제시된 문제를 오래도록 들여다 보아도 쉬이 글자가 쓰이지 않는다. 아이에 대한 건 그래도 쓰기 쉬운 편이다.
부모님이 추구하는 양육방식이나 아이에게 어떤 부모인지에 대한 질문은 정말 대체 뭐라고 써야 할지 도통 감이 오질 않는다. 내가 키우는 아이에 대해 쓰는 것보다 아이를 키우는 나와 남편에 대해 쓰는 것이 더 어렵다.
매번 조금씩 다르게 느껴지는 이 숙제 종이를 받으면 늘 남편과 우리의 양육방식에 대해 토론 아닌 토론을 나누게 된다. 상담지를 작성하기 위해 우리의 양육 방식을 돌이켜 생각해보게 되는 웃픈 상황이 벌어진다. 하지만 늘 그렇듯 결론은 나지 않는다. 딱히 명확한 양육방식을 두고 있는 게 아니라 서로의 방향에 대한 막연한 동의를 바탕으로 흘러가는 우리의 양육을 활자로 정의해 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몇 날 며칠을 종이를 들여다보며 무엇을 써야 할지를 고민했다.
특히 올해 처음 받아 본, 아직 두 돌도 안된 둘째의 상담 종이는 더더욱 쓰기가 어려웠다. 아직 말도 못 하는 24개월도 안된 아기의 생활습관을 어떻게 평가를 하고 또 이 아이의 1년에 무엇을 기대한다 써야 하는 걸까? 그저 건강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엄마에게 아이의 미래에 대해 교육적 방향의 내용을 적어내야만 하는 이 숙제는 너무도 어렵기만 하다.
그저 시간이 흐르는 대로 방임형양육 중인 우리가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하게 만드는, 매 번느끼지만 참 어려운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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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6살이 된 큰 아이는 최근 들어 모범생 소리를 곧잘 듣는다. 유치원에서 울고 있는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 따뜻한 말을 건넨다던가, 선생님도 같이 먹어요 하며 간식을 내민다던가 등의 이타적인 행동을 보인다며, 아직은 자기중심적인 게 당연한 5-6세 에게선 보기 어려운 행동이라며 칭찬이 대단했다.
지시를 잘 따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타인을 배려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어 선생님들이 자주 놀라곤 한다며 아이에게 이런 따뜻한 마음을 어떻게 알려 주셨냐 나에게 되묻는다.
"아니 제가 뭐 달리 딱히 한건 없는데요... 하하하;"
멋쩍게 웃었지만 정말 너무 기분이 좋았다. 아이를 칭찬하는 말을 듣는 것은 나를 칭찬하는 모든 말을 다 합친 것 보다도 더 기분이 좋은 일이다.
뭐랄까... 내 칭찬을 듣는 것이 하늘을 나는 기분이라면 아이의 칭찬을 듣는 건 하늘을 날다 누가 간지럼을 태워 우주 끝까지 날아갔다 돌아오는 기분이랄까?
부모가 되지 않았다면 절대 결코 모를 종류의 감정이다.
하지만 큰 아이도 4살 때까지는 아주 말썽쟁이였다.
한 시도 가만있지 못했고, 어린이집 수업시간에는 집중하지 못해 앉아있는 법을 연습시켜야 한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었다. 초등학교 교사이던 지인은 한 반에 꼭 이런 산만한 말썽쟁이들이 한두 명씩 있다며, 이대로 자라면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니 방법을 찾아보라 조언을 해 주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내 아이가 혹시 유아 ADHD는 아닌지, 이런 행동이 혹시 어떤 문제로 인한 건 아닌지 수없이 검색을 하고 질문을 남기고 또 육아 서적을 뒤져대곤 했었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어대고 엄마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슈퍼에서 물건을 사달라 떼를 쓰던 그때의 내 아이가 주변에서 따가운 눈총을 받을까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른다. 어린이집 선생님께 지적이라도 받는 날에는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에 대한 칭찬이 열 배로 기쁜 만큼 아이에 대한 비난도 열 배로 괴로웠다.
고작 이 정도 일로 뭐 그래 라고 지금은 웃어넘기지만, 아이에 대한 아주 사소한 쓴소리 하나도 듣기 싫었던 시기였다. 첫 아이에 대한 내 욕심이 많이 아마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 같다.
48개월까지는 아무런 것도 판단할 수 없으니 더 기다리라는 전문가들의 조언에 따라 아무런 것도 하지 않은 채 기다렸고, 48개월이 지나자 정말 아이는 거짓말처럼 달라졌었다. 5살이 되며 아이는 사회성과 눈치라는 게 생긴 모양이다. 스스로 사고하고 눈치껏 행동할 줄 알게 된 아이의 성장은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신기하고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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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이웃이 있었다. 동갑의 아이를 키우던 또래의 엄마인 데다가 맞는 구석이 꽤나 많아 금세 가까워졌었다. 하지만 그 아이의 성향이 유별나도 너무 유별났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아이와 비교했을 때 그랬을 뿐이지만 말이다. 그때의 뭣도 모르면서 오지랖만 넓었던 나는 조언이랍시고 막말을 너무 많이 내뱉었던 것 같다.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다." 매번 잘 들어주며 맞장구를 치던 그 엄마의 마음 따위는 전혀 헤아리지 못한 채 말이다. 남의 아이를 걱정하는 척하며 내뱉었던 그 모진 폭력들이 이제야 후회되지만 지나간 시간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저 아이는 아직도 말을 못 하네?.'
'우리 아이는 그래도 저러진 않지.'
'저 아이는 참 똑똑하네. 우리 애는 이런 거 전혀 못하는데.'
비교가 뼛속까지 몸에 밴 생활습관은 엄마가 되어서도 자꾸만 불쑥불쑥 튀어나와 나를 당황스럽게 한다.
모두가 같은 초보 엄마이던 그 한 번뿐 인 시간에 내 아이가 아닌 옆의 아이도 내 아이를 보는 마음으로 함께 보듬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아이 돌보기에 바빠 내 마음도 다른 엄마의 마음도 헤아릴 여유가 없었던 그 시절이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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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이의 상담이 모두 끝이 났다. 요즘은 코로나로 대면이 어려워 전화상담을 주로 한다. 큰 아이는 칭찬일색이고 아직 어린 둘째 아이는 말썽쟁이라며 주의를 요한다. 큰 아이가 어렸을 때 들었던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그런지 큰 아이의 유치원에는 나 역시 애정이 생겨 다양한 활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고, 둘째의 어린이집에는 어쩐지 정이 가질 않아 소극적으로 임하게 된다. 내 아이에 대한 선생님의 태도가 부모의 행동에 이토록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아이는 정말 빨리 자란다. 한 해 아니 한 계절만 지나도 아이는 많이 자라서 변해있다.
아이가 넘어지지 않게 잡아주기만 해도 아이의 시간은 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흐른다. 그 와중에 아이의 지금을 판단하고 부모 멋대로 평가를 내려 아이를 바꿔 보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아이는 가만히 내버려 둬도 잘 자란다. 조바심이 나서 전전긍긍한 건 부모뿐이다.
아이들은 그저 놀면 행복하고 공부하면 지겹고 졸리면 잘 뿐일 텐데아이가 누구랑 노는지 무얼 하고 노는지, 공부는 얼마큼 하는지 옆집 누구는 어떤 학원을 다니는지 생각해내느라 엄마들 머릿속만 번잡하다.
아이를 위한 것인지 엄마를 위한 것인지 모를 그런 생각과 행동들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비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볼 만하다. 요즘 방영 중인 <그린 마더스 클럽>을 보면 요즘의 아이들과 엄마들의 모습이 참 안쓰럽고 한심하게 보인다. 하지만 극 중 아이들은 일관성 있게 해맑다. 비교하고 정보를 캐내고 계획하느라 바쁘게 돌아가는 엄마들의 눈동자와는 다르게 말이다. 왜 저렇게 까지 하나 싶은 드라마 속 이야기이지만 지금 내가 살아가는 환경도 그리 다르지 않다. 많은 이들이 비슷한 고민을 하기에 드라마로도 쓰였겠지.
내 아이가 잘한다고 우쭐댈 필요가 없다.
또 못한다고 조바심 낼 필요도 없다.
하지만 남의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고 함부로 지적질하는 건 정말 피해야 한다.
조금은 마음에 안 드는 아이가 있더라도 그 아이에 대한 우려나 염려를 엄마에게 보이는 건 정말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 사소한 말 한마디에 엄마는 하늘을 날 수도,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걸 너무 잘 아니까 말이다.
아이의 하루는, 아니 온 가족의 하루는 엄마의 기분에 달렸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마의 기분을 좋게 해 줄 아이의 칭찬을 더 많이 건넬 수 있길, 기왕이면 아이들에게도 좋은 말만 많이 해 줄 수 있는 여유와 관대함을 가진 어른이 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