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다이스, 그리고 첫 만남.

day 1(22). Astorga

by 황사공



새벽부터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일찍 잠에서 깼다.



너무 큰 방이라 혼자 더 자고 있을 수도 없어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겼다. 4.5 km만 가면 다음 마을이 있다고 책에 나와있었고, 그 정도면 한 시간 정도 걸으면 되는 거리라. 다음 마을에서 아침을 먹어야겠다 생각하고 길을 나섰다.



길은 일자로 쭉 뻗어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의 끄트머리에 어제의 그 밝은 달이 내려가고 있었다.




111D83344FB791AF2E292F 이른 아침의 달




아! 어찌나 크고 둥근 달인 지!



달이 이렇게도 클 수 있다니, 정말 달을 보고 걷는데 점점 달에게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172860344FB791C61B228B 서쪽 하늘 위의 달




길 앞에서 콜린과 어제 슈퍼마켓에서 만난 그 남자가 멈춰 서서 사진을 찍고 있다. 그 남자가 나에게 뒤를 보라고 얘기한다.



오 마이 갓!



앞에는 지고 있는 달이, 뒤에는 갓 떠오른 해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이렇게 멋진 광경은 정말 처음이었다. 끝없이 평평한 이 길 위에서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광경을 동시에 보다니. 너무 매혹적이고 신비한 광경이었다. 다리가 아팠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환희가 차 올랐다. 정말 신기한 순간이다. 좁은 땅덩어리를 가진 나라에서 살아온 내게는 지평선도 그 자체가 신기한데 편편한 길 위에 해와 달이 나란히 마주 보고 있는 광경을 눈으로 보다니. 정말 생각지도, 기대하지도 못했던 경험이다.



뒤를 돌아보라고 말해줘 나에게 정말 멋진 순간을 선물해 준 그 남자는 먼저 길을 나섰고, 나는 달이 지는 모습을 마저 보고 길을 걸었다. 콜린은 나보다도 더 오래 길 위에 머문 후에 나를 뒤따르고 있다.

앞 뒤로 아무도 없던 어제보다 한결 낫다. 가까워지지 않게 거리를 잘 유지해가며 길을 걷는다.






그런데 4.5km 뒤에 나와야 할 마을이 나타나지 않는다. 조금만 더 가면 나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쉬지 않고 걸은 게 두 시간. 두 시간이면 10킬로미터는 걸은 상탠데,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마을처럼 보이는 곳이 가까워지고 있을 때, 오전의 그 남자가 길 앞에 앉아 쉬고 있었다. 나도 그의 옆으로 가서 가방을 잠깐 풀면서 마을이 얼마나 먼지 아느냐 물어봤다.


그의 대답에 따르면, 나는 이미 12km를 걸어온 상태였다. 맙소사. 지금의 나는 내가 걷고 있는 길에 대한 정보가 아닌, 어제 갈림길에서 아스팔트를 선택한 경우의 경로를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완전 진이 빠졌다. 아침을 먹지 못한 허기에 심리적인 충격이 더해져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나에게 친절이 길을 알려준 순례자가 나의 반응에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먹으려고 까고 있던 오렌지의 반을 내민다. 그리고는 자기 혼자 먹긴 너무 큰데 같이 먹어줄 수 있느냐 묻는다. 당분이 절실히 필요했던 나는 바로 고맙다고 얘기하고 덥석 받아 들었다.


"고마워, 근데 너 이름이 뭐야? "


그리고 드디어 통성명을 했다. 그의 이름은 아틸라였고, 헝가리에서 왔다. 처음 만난 헝가리안이다. 지난번 부다페스트 여행이 꽤나 좋았었는데 그 나라에서 온 사람을 만나니 반가웠다. 부다페스트를 가 보았다고 이야기하며 가벼운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실례긴 하지만 혹시 몇 살이냐고 물어본다. 초면에 나이를 묻는다는 것이 실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서양인의 나이는 가늠조차 할 수가 없어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나에겐 너무 어리기만 했던 친구들을 이미 많이 만났던 터라 만약 그가 대학생이라면 그를 피하고 싶었다.



"24살이야."


아... 당연히 나보다 어릴 줄 알았었다. 대체 왜 이렇게들 어렸는지 모르겠다.


"아.. 그렇구나. 그럼 학생이야?"


"응? 무슨 소리야. 나 졸업한 지 10년도 더 넘은 것 같은데?"



이런... 그는 34살 이었다. 내가 제대로 못 들은걸 지레짐작으로 24 겠거니 해 버린 것이었다.


"아 미안, 24살로 잘못 들었어"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 그에게 방긋 웃어줬다.


"사실 너도 알겠지만 내가 전에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 다 학생들이었거든. 2주간 같이 다녔는데 너무 힘들더라고. 서로 생각하는 게 너무 많이 달라서.. 그래서 나이 물어봤는데 학생이 아니라 너무 다행이다! "


방긋 웃으며 얘기하는 나의 얘기를 듣고 그는 당황해하는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워 낯이 빨개 진다.


"음.. 글쎄. 근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거 아닐까? 나이가 많아서 어떻고 어리기 때문에 어떻고 라고 말하는 건 좋지 않은 것 같아. "


진지한 얼굴로 아틸라가 나에게 말을 한다. 아.. 사실 그랬다. 이 모든 것은 멍청한 나의 편견일 뿐이었다. 어리다고 다 철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많다고 다 훌륭한 것도 아니다. 그의 그런 얘기를 들으니 어쩐지 내가 너무 어린애 같아서 부끄러워졌다.




우리는 2km 남짓 남은 다음 마을을 향해 함께 걸어갔다.


그도 레온에서 같이 다니던 일행과 헤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혼자 걷기 시작한 게 이틀째, 나와 같았다. 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였고, 일을 그만두고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찾아 이곳에 왔다고 한다. 이 또한 나랑 정말 똑같았다.


사실 학생이나 나이가 많은 순례자가 아닌 20,30대의 순례자들은 대부분 비슷한 고민을 안고 이 길을 걷고 있었다. 같은 고민을 갖고 있고 뭔가가 나랑 비슷한 헝가리안 아틸라, 우리는 달랐지만 뭔가 비슷했다.



다음 마을에 있는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시켰다. 아틸라가 가방에서 꺼낸 바나나와 칩으로 접시에 웃는 얼굴을 만들어 준다. 심각하고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짓을 하다니, 우습다.



191DB6344FB791DE3322F4 스마일 :)




얘기를 더 나눠보니 그는 나와 비슷한 것이 정말 많았다. 그도 사람들과 걷는 것에 너무 지쳐 혼자 떨어져 나왔고,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는 게 버거워 가급적 조용히 지내는 중이라고 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서로 한마디도 해보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나왔다. 나 역시 낯선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고, 그도 그랬다. 그리고 친구들 틈에서 그저 그냥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말하는 족족 너무 내 생각과 같아 정말 신기한 기분이 든다. 이 세상에 나와 이렇게 비슷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그와 나는 비슷했다. 정말 신기했다.



"아틸라, 초면에 이런 얘기 하기 그런데, 나 너에게 아무것도 얘기해 줄 것이 없어. 왜냐면 네가 지금 말해준 것들이 내 생각과 너무 똑같아! "




우리는 아침을 먹고 같이 길을 나섰다. 그는 담배를 한대 태웠고, 나는 신발을 갈아 신었다. 플립플랍을 신고 걷는 나를 그는 신기해했다. 발에 물집이 너무 심각해서 운동화를 신을 수 없노라 말했더니 그가 오늘 저녁에 물집을 치료해주겠다고 한다. 고맙다고, 꼭 아스토르가에서 만나자고 얘기를 한다.



1820E3344FB791F6257C38 전깃줄 위의 참새들




전깃줄에 새들이 나란히 앉아있다. 어릴 때 들었던 전깃줄과 참새 이야기가 생각나 혼자 킥킥대다 보니, 아틸라는 어느새 성큼 저 앞으로 가 있다. 다리가 나보다 30센티는 길 것 같으니 나보다 빠른 게 당연하겠지.



그와 나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하지만 발이 너무 아팠던 빨리 걸을 수도 없었고 그를 따라갈 이유가 없었다.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 생각했기에 서두르지도 않았다. 또 혼자 있으리라 마음먹은 지 이틀 만에 누군가와 다시 일행이 된다는 것이 내키지 않기도 했다. 그렇게 그는 내 시야에서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122174344FB792102AE1FC 마을 입구의 강




다음번 마을 입구에는 큰 강이 있었다. 그리고 아주 예전에 한 여인을 놓고 수백 명의 남자가 토너먼트를 벌였다는 큰 광장도 나왔다. 유명한 곳이라는 것을 책에서 못 봤다면 뭐 그냥 공터라고 생각하고 지나갔을 것 같은 곳이었다.


돈키호테가 말을 타고 창을 들고 이런 곳에서 싸웠던 걸까?




163347344FB7922B0E7BFC 기사들이 여인을 놓고 싸웠다는 터



이번 마을에서 슈퍼에 들러 혹시 배고파졌을 때 먹을 빵을 사고, 근처 알베르게에 들어가 화장실을 이용했다. 이 곳을 지나서는 또 10여 킬로를 아무 휴게시설 없이 지나게 될 예정이어서, 여기서 모든 준비를 마쳐야 했다.



아틸라는 어디 있을까?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 끄트머리에 있는 레스토랑 야외 테이블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순간 잠깐 고민했다. 그에게 가서 같이 샌드위치를 먹을까? 아니면 그냥 갈까?


그냥 지나치기엔 시원한 오렌지 주스가 너무 먹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성큼성큼 그에게로 걸어갔다.



"여기 좀 앉아도 될까? "


"당연하지, 이건 네 자리야."



배가 별로 안 고팠지만 조그만 샌드위치와 오렌지주스를 시켰다. 그는 덩치에 걸맞게 엄청나게 커다란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중이었다.


잘 웃지 않는 남자였다. 미간에 주름이 꽤나 크게 자리 잡혀버린, 어딘가 심각해 보이는 남자였다. 마음을 꽁꽁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린 친구들 만큼 순수하지 않은 건 분명했다.



샌드위치를 먹고 운동화로 갈아신었다. 지금부터는 산을 하나 넘어야 했기에 플립플랍으로는 갈 수 없었다. 새끼발가락의 통증이 제법 심각하다. 신발을 갈아 신고 천천히 한 발씩 떼 보았다. 이 조그만 새끼발가락의 물집이 내 온몸을, 내 온 정신을 쏙 빼놓을 만큼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이 우스웠다. 그렇게 고통을 느껴가며, 대체 이 고통을 내 몸이 어떻게 느끼고 온몸을 괴롭히는지에 집중해가며 그렇게 멈추지 않고 걸었다. 한 번이라도 멈추면 다시 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메마른 숲 길이 시작됐다. 앉아서 쉴 곳도 마땅치 않기도 했고 앞에서 말없이 열심히 걷고 있는 아틸라를 따라

나도 부지런히 걸었다. 어쩐지 뒤쳐지기 싫었다.


한참을 걸어 오르막이 끝났다. 휴, 땀좀 닦으며 잠깐 쉬어가자 얘기했다. 그가 흔쾌히 그러자고 한다.


아픈 다리로 정말 잘 걷는 것 같다며, 그 조그만 몸에서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냐 묻는다. 마치 슈퍼맨처럼 커다랗던 그에게 나는 정말 조그만 동양 여자아이일 뿐일 것이다. 신기할 만도 하지.



1938B6344FB79245074911 산 정상 이라기엔 너무 편편한




오르막이 끝나면 내리막이 나와야 할 것만 같은데 이번에도 평지가 나왔다. 정말 신기한 스페인의 땅덩어리들이다. 평지를 조금 걷다 보니 앞에 창고 같은 건물이 하나 있었다. 몇몇 순례자들이 그곳에서 쉬고 있었고, 그중 몇 명은 아틸라와 아는 사이였다. 그들은 반갑게 재회를 했다.



그렇게 나는 마르쉘을 만나게 되었다.



먼저 도착한 그들은 이 곳을 파라다이스라 부르고 있었다.



11271E484FB79E2F312B4B 아름다운 줄리, 그리고 하트 리어카의 메뉴



그들이 파라다이스라 부르고 있는 이 곳은 원래 버려진 창고였다. 순례길을 걷던 한 남자가 이 건물을 2년 전부터 지키고 있었다. 이 곳에는 물도, 전기도 없었지만 그는 순례자들이 쉬어갈 수 있게 잠자리도 마련하고 음료와 과일도 내놓고 있었다. 도네이션으로 운영되는 이 하트 리어카의 음식 퀄리티는 꽤나 좋았다.



141CC5344FB7925F320C44 21세기 맞습니다



나무를 떼다가 불을 피우고 밥을 해 먹고, 길바닥 위에 매트리스를 깔고 잠을 자는 곳.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이었기에 이 곳을 모두들 파라다이스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저씨에게는 연인이 있었는데, 누가 봐도 그들은 서로를 몹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그들의 눈에는 꿀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알고 봤더니 그의 여자친구인 줄리는 런던에서 온 순례자였다. 그녀도 나처럼 이 곳을 지나가게 되었고, 그를 본 순간 사랑에 빠져 이 곳에 머무르고 있다고 했다.


아 세상에. 정말 사랑으로 충만한 곳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그 둘의 눈빛은 수정처럼 맑았다. 그 평화로운 표정과 말투, 행동들. 뭐랄까, 마치 그들은 우리와 같은 세상을 사는 사람이 아닌 신선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 정말 모든 것이 놀랍기만 한 곳이었다.



172B3D344FB792781D916F 파라다이스의 연인과 나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은 커플이다.


나는 신발을 벗어던지고 사과를 먹으며 그 건물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아틸라는 앞에서 오래간만에 만난 마르쉘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 사과를 다 먹고 그 씨를 저 멀리 던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줄리가 이제 저기에 한그루의 사과나무가 생길 거라고 웃으면서 얘기해준다.


아.. 나는 그녀의 그 이야기가 너무 좋았다. 그 나긋하던 목소리와 말투도.



"One more apple tree here. "



다음번에 내 사과나무가 잘 있나 확인하러 꼭 다시 와야겠다고 얘기를 하며 그녀와 함께 앞으로 돌아갔다.


아틸라는 아직 떠날 생각이 없었다. 한 시간쯤 이곳에서 쉬다 가자고 했다. 나도 원하던 바! 그러자고 얘기하며 걸려있는 해먹에 올라가 누웠다. 처음 누워보는 해먹이 낯설었지만, 금세 적응했다.


햇살은 뜨거웠지만 그늘은 시원했다. 해먹에 누워 바라보는 하늘이 아름답다.




153A11344FB7929006F6E5 해먹에 누워서 바라본 하늘




몇몇 순례자들이 하트 리어카에서 음식을 먹고, 웃음을 가득 얻은 채 지나간다.


길고 힘든 길 끝에 있는 이 신비스러운 공간은 정말 파라다이스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커피를 끓여 내오는 아저씨, 그리고 줄리와 진하게 키스를 한다. 너무 보기 좋았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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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토르가까지 6km, 여기서 가는 길이 많이 힘드냐는 내 물음에 줄리가 자기는 아직 안 가봐서 모르겠다 답한다. 아, 그랬다. 그녀의 길은 이 파라다이스에서 멈춰 있는 중이었다.



나중에 산티아고에서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고 얘기하고 사랑이 넘치는 그곳을 아틸라, 마르쉘, 그리고 한 여자와 함께 나섰다. 마르쉘과 그 여자친구라고 생각했다. 아! 나의 고정관념은 얼마나 터무니가 없는지.


그렇게 넷이서 길을 걷다 보니 뭔가 기분이 좀 이상하다. 좀 홀가분한 기분도 들고.... 음...



앗! 내 신발?! ㅠㅠ



플립플랍을 신고 돌아다니다 그냥 나왔는데, 내 운동화를 버려둔 채 나와버렸다. 너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아틸라에게 먼저 가라고, 나는 신발을 놓고 와서 가지러 갔다 오겠다고 얘기를 했다. 그가 웃는다. 그 와중에 그의 웃는 모습이 너무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같이 가 주겠노라 말하며 마르쉘을 먼저 보냈다. 이 정도 거리에서 생각해 낸 것이 정말 다행이라 얘기하며, 우리는 계속 웃으며 걸어갔다.



1624D3344FB792D82CCAFA 신발을 가지러 돌아가는 길



How stupid! 나의 너무 터무니없는 실수에 파라다이스에 있던 모든 사람들도 배를 잡고 웃었다.

순례자의 생명인 운동화를 어떻게 버리고 갈 수 있단 말인가.


내 발이 저 신발을 원하지 않아서 이렇게 된 거야!


은연중에 나는 저 등산화를 버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정말 창피했다.




신발을 되찾아 돌아오는 길은 너무 즐거웠다. 어쩐지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좋았고,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도 따뜻했다. 아틸라는 눈에 띄게 웃음이 많아졌다. 파라다이스에서 우린 해피 바이러스를 잔뜩 받아 나온 것이 분명했다. 그냥 걷기만 해도 신나고 행복하다며, 그리고 내 마음도 그렇다 얘기해가며 우리는 함께 걸었다.



혼자 인 것 보다 훨씬 나은 것 같다. 이 좋은 순간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너무 행복하다.



173824344FB792EF0CA890 마을 입구에서 만난 표지판, stop thinking




마을 입구에서 만난 표지판, STOP thinking!



누군가의 기발함에 빵 터졌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 얘기하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난 오늘, 그리고 이 행복한 순간도 남겨두자고 나는 그에게 같이 사진을 찍자 얘기했다. 내 카메라로 한번, 그의 카메라로 한번. 우리는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례자가 되어 사진을 찍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아스토르가까지는 아직 5km 더 가야 했지만 이 좋은 기분으로 맥주 한잔을 마시고 싶었다. 아틸라에게 맥주 한잔을 사겠노라 얘기하고 마을에 있는 바로 같이 들어갔다. 나는 그에게 클라라를 알려주고, 두 잔을 주문했다.



옆에는 스페니쉬 아저씨들이 씨에스타를 즐기고 있었다.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구분이 안 가는 상태로 말이다. 솔직히 뷰는 좋지 않았다. 우리가 앉아있는 조그만 그늘은 바로 도로 옆에 있었고, 그 앞은 공사장이었다. 그곳에는 HYUNDAI 상표를 달고 있는 포클레인 한대가 멈춰져 있었다. 현대가 내 눈앞에 있다는 것이 우스웠다. 아틸라에게 저 브랜드가 한국 것이라 얘기해주고, (그는 현대를 몰랐다.) 지금 여기가 어떻든 간에 내게는 최고로 좋은 곳과 좋은 순간이라 말했다.



정말 그렇게 온 마음이 행복으로 차올랐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11461F404FB7931D1DCDF4 현대 포크레인과 클라라 한잔



함께 해 줘서 고맙다고 그에게 인사했다. 그도 나에게 인사했다. 우리는 파라다이스를 함께 지나왔고,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나는 그가 너무 감사하고 좋게 느껴진다.




클라라를 다 마시고 우리는 더 걸어야 했다. 그냥 그곳에서 쉴까 고민도 했지만, 오늘의 목적지였던 아스토르가까지 가기로 했다. 마지막 5km, 그리고 그 좋았던 기분은 뜨거운 길 위로 녹아 사라지기 시작했다.


뜨거운 아스팔트 길이 이어졌다. 우리는 할 말을 잃은 채 알딸딸한 상태로 길을 걸었다. 종종 음주 후 걷기를 하던 나는 괜찮았지만, 아틸라는 좀 힘들었나 보다. 다시는 걷는 중간에 맥주를 마시지 않겠노라 얘기한다.


그는 이렇게 천천히 걸어서 늦게 마을에 도착한 적이 전혀 없다고 했다. 늘 빨리 걸었고 일찍 도착해서 쉬었다고 한다. 매일같이 네다섯 시는 돼야 도착한다는 내 얘기에 그는 기겁을 했다.



'아.. 우리는 함께 걷진 못하겠구나. '


라고 생각하며, 마을 입구에 있는 적어도 1km는 돼 보이는 꼬불꼬불 육교를 욕하면서 건너 아스토르가에 도착했다.



아스토르가의 시립 알베르게는 꽤 컸다. 그리고 낯익은 할머니 순례자와 한 중년의 부부 순례자도 만났다.

이 알베르게의 호스피탈레로는 헝가리에서 온 젊고 이쁜 여자였다. 그는 아틸라의 국적을 보고는 반갑게 모국어로 이야기를 한다. 아틸라는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그녀와 이야기를 한다.


그가 잘생겨서 수작 거나 봐.라고 혼자 또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며 기다렸다. 정말 그녀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아틸라와 나를 다른 방에 배정을 했다. 보통 함께 들어오면 함께 지낼 수 있도록 침대를 배정해 주는데 이럴 수도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3층까지 올라가서야 우리는 서로 다른 방을 배정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서로의 방이 다 차있는 상태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내가 배정받은 방은 침대가 6개밖에 없는 작은 방이었기에 안도했다.


뭐 인연이면 다시 만나 지겠지 라고 생각하고, 짐을 풀고 샤워를 했다. 내려가서 빨래도 하고 잠깐 컴퓨터도 사용했다. 루이스의 메일은 없었다. 그리고 아틸라를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무엇인가를 같이 하자고 약속을 해 둔 건 아니었지만 막상 그가 없으니 허전했다.



혼자 슈퍼마켓을 찾아 나섰다. 왠지 그가 거기에 있을 것 같았다. 슈퍼마켓 입구에서 폴과 콜린을 만났다. 그에게 아틸라를 못 봤느냐 물어봤다. 콜린은 둘이 함께 걸었냐며 놀라워했고, 나는 그랬노라 얘기했다. 놀랄 건 또 뭐람. 슈퍼마켓에서 과일과 계란, 그리고 빵을 샀다. 핸드크림도 하나 샀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두리번거리며 아틸라를 찾았지만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를 찾는 내 모습이 우스웠다. 계란 프라이가 먹고 싶었다. 돌아가서 혼자 계란 프라이나 해 먹어야지 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저녁 먹기는 좀 이른 시간이라 짐을 두고 밖으로 나갔다. 아스토르가에는 큰 성당도 있었는데, 어쩐지 성당은 가고 싶지 않아 옆에 있던 공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밖으로 나오고 있던 아틸라와 딱 마주쳤다.


"Hey ~ "


서로에게 어디 갔었냐고 물었다. 그도 나를 한참 찾았다고 했다. 다시 만나 반가웠다. 그는 나에게 맥주를 한잔 사겠노라며 다시 공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폴과 콜린, 마르쉘, 그리고 처음 보는 몇몇 스페니쉬 순례자가 함께 있었다.


함께 앉아 맥주를 마셨다. 그들은 영어로 음담패설 같은 얘기를 늘어놓으며 막 웃고 있었다. 한국말로 해도 별로 재미없었을 것 같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음담패설이라니, 별로다.


가만히 듣고 있던 아틸라도 불편했던 건지 나에게 혹시 슈퍼마켓 가지 않아도 되냐 묻는다. 내가 어딘지 알고 있으니 안내해주겠노라며 그와 함께 나섰다. 슈퍼마켓에 갔다가 저녁을 먹자는 그에게 그러자고 대답한다. 잔뜩 사놓은 식량이 걱정이다.



슈퍼마켓에 들렀다가 나오는 길에 있는 피제리아에서 저녁을 먹었다. 아까 같이 있던 스페니쉬 여자 두 명도 함께 먹었다. 저녁은 뭐 나쁘지 않았다. 유쾌한 스페니쉬들이라 저녁 먹는 내내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조금 피곤했지만 괜찮다.


숙소로 돌아갔다. 아틸라가 물집을 치료해 주겠노라며 하얀 봉지를 하나 들고 나왔다. 방은 이미 자는 사람들이 있어 어두웠다. 불이 밝게 켜져 있는 유일한 공간인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를 세면대에 걸터앉게 만든 아틸라가 그의 무릎에 물집이 있는 발을 올리라고 한다. 시키는 대로 했다. 자세가 조금 민망하다. 괜히 심장이 뛴다.


그가 가지고 온 비닐봉지 안에서 무시무시한 장비들이 꺼내져 나왔다. 바늘로 수도 없이 찔렀지만 속시원히 빼내지 못한 나의 깊은 물집을 본 그는 이런 건 한방에 잘라내야 한다며 그냥 보기에도 예리해 보이는 가위를 꺼내 들었다.


"이런 걸 다 가지고 다니는 거야?"


"응, 난 합기도를 15년 해서 자주 상처가 났거든. 이런 자잘한 상처들은 언제든 치료할 수 있게 이렇게 챙겨 다니는 게 습관이야. "


"아 그렇구나. "


그는 합기도 마스터였다. 까불면 안 되겠다.



겁먹은 나에게 이미 죽은 피부라 아프지 않을 거라 말하고선 노랗게 부어있던 내 새끼발가락 물집을 단숨에 잘라버린다.


꺆..... 노란 진물이 터져 나왔다.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물집이 터지는 그 순간 나는 어떤 쾌감을 느꼈다.

나를 몇 날 며칠 동안 괴롭혔던 지긋지긋한 녀석이 내 몸을 빠져나간 것이 너무 기뻤다.


그는 상처를 소독하고, 그 부분이 밀리거나 덧나지 않도록 특수 반창고로 단단히 고정시켜줬다. 그리고 이 반창고를 떼지 않고 그냥 걷다 보면, 일주일쯤 뒤엔 다 괜찮아진다며 그의 발가락에 있는 반창고를 보여주며 말했다. 든든하고 또 고마웠다. 어쩐지 그가 좋아지고 있는 것 같다.



테라스로 나갔다. 오늘도 달이 밝았다. 밤공기는 싸늘했고, 도시의 야경은 너무 아름다웠다. 발의 고통이 덜어져서 그런지 처음 만난 사람과 함께 있는 것 치고는 몹시 편안했다. 확실한 건 혼자였던 어제보단 훨씬 좋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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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돌아와 입구에서 그와 굿 나이트 인사를 나눴다. 그가 키가 너무 커서 볼뽀뽀를 하는 게 힘들었다. 190쯤 될까?


불 꺼진 방에 조용히 들어가 내 침대를 찾아 누웠다. 정말 행복했던 오늘 하루가 스쳐 지나간다. 새끼발가락의 알싸한 느낌이 아틸라의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그와 함께 보낸 오후가 꽤나 만족스럽다.


내일도 함께 걸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함께 걷는 것은 힘들겠지만 다시 만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도 혼자여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아.. 아무래도 난 혼자 있을 준비가 아직 안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