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아 멈추어다오

day15(36). Olveiroa

by 황사공



평소보다 조금 일찍 출발했다. 3일 만에 피에네스떼레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하루에 30킬로씩 걸어야 했다. 4일에 나눠서 걷기는 짧은 애매한 곳에 피에네스떼레가 있었고, 우리는 3일 만에 그곳에 가기로 결심했다.

피에네스떼레로 가는 길, 피스테라 라는 스페인의 끝 항구 마을에서의 끝을 피에네스떼레라 부른다고 했다. 예전에 나보다 앞서 산티아고를 걸은 선배에게서 피에네스떼레에서 쓴 엽서를 받았었다. 그때의 그 감동이란.. 산티아고가 그리도 궁금했던 것처럼 피에네스떼레도 몹시 궁금하다.



모든 이들이 얘기하는 그 감동을 나도 느낄 수 있을까?.



바닷가에 가까워지고 있어서 그런지 아침 내내 안개가 자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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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헤이라에서 다음 마을까지는 9km, 그곳까지는 쭉 산길로 이어지고 있었다. 9km면 아침에 한 번에 걷기엔 괜찮은 거리다. 길이 평지였을 때 말이다.


좁은 산길을 따라 이어지던 길은 아스팔트로 연결되었고, 또 다른 작은 산길을 한번 만나고 아스팔트를 한번 더 만났을 때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바를 찾을 수 있었다.


산 위에는 바 하나가 전부인 조그만 마을이 있었다. 이미 몇몇 순례자가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우리도 배낭을 내려놓고 바에 앉아 샌드위치와 커피를 시켜 먹었다.



바 앞에 이동식 슈퍼마켓 차가 나타났다. 이 마을을 지나고 나면 앞으로 3km 앞에 마을이 하나 있고, 그 뒤로는 20km까지 바도, 레스토랑도 만날 수 없다고 되어 있었다. 어제가 일요일이어서 비상식량을 하나도 준비하지 못한 우리는 때마침 나타나 준 슈퍼마켓 차에서 초콜릿 쿠키와 참치 빵, 그냥 빵, 그리고 배 두 개를 샀다. 오늘 하루 종일 먹을 양식이었다.



19094F4B507AA22030CA0E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이동식 슈퍼마켓



산속 깊은 곳에 있는 마을을 찾아다니는 이동식 슈퍼마켓, 아이디어가 참 좋은 것 같았다. 저 차에는 과일부터 고기까지 없는 게 없었다. 정말 신기하다.




우리는 길을 계속 걸었다. 길은 계속 아스팔트로 이어지고 있었다. 산티아고에서 피에네스떼레까지 가는 길은 아스팔트가 많고 경사가 심해 힘들다고 했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았다.


한 시간여를 더 걸어 나온 마을 끄트머리의 바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주스를 한잔 마셨다. 앞으로는 바가 없을 테니 바가 있을 때 쉬어가자는 생각에서였다. 옆 테이블에 있던 인상 좋은 흰머리의 할머니가 우리에게 말을 건다. 오며 가며 몇 번 마주쳤던 것 같다. 폴란드에서 온 그녀는 이번이 3번째 산티아고행이라고 했다. 얼굴에 평화로움과 즐거움이 가득해 보이는 그녀는 자기가 걸을 수 있을 때 까지는 이 길을 계속 걸을 것이라 말한다.



136BAD45507AA2B82290AB 피스테레 가는길의 친구들




이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 이 길은 정말 소중한 곳이었다.

이 길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곳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나도 꼭 나중에 혼자서, 부모님과 함께, 자식들과 함께 다시 이 길을 걷겠노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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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계속 아스팔트로 이어졌다. 아스팔트 옆으로 펼쳐져 있는 초원에는 젖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운동화를 벗어던지고 플립플랍으로 갈아신었다. 긴 시간을 나와 함께한 까만 플립플랍, 많이 너덜너덜해졌다. 조만간 떨어지고 말 것 같아 예비용 플립플랍도 사 두었지만,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만 원짜리 플립플랍이 꽤나 잘 버텨준다. 이 길의 끝까지 녀석과 함께할 수 있길 내심 바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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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지루하게 이어졌다. 아스팔트 위를 걷는 것은 숲 속이나 드넓은 평원을 걷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이미 지칠 만큼 지쳐있는 두 다리가 뻣뻣해져 그런 것인지, 아니면 아스팔트가 내 다리를 뻗뻗하게 만든 것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다리의 피로도가 훨씬 심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초원과 젖소들이 있는 아스팔트 길 위를 터벅터벅 걷다 보니 이렇게 걷는 것도 이제 내일이면 끝이구나 싶어 묘한 기분이 든다.


내 발소리와 지팡이 소리만 가득한 이 아스팔트 길, 다시 지나쳐 가지 않을 이 길 위의 나의 걸음을 휴대폰 동영상으로 찍어본다. 나의 템포와 나의 걸음.



"피에네스떼레로 가는 마지막 날, 이렇게 900km를 걸었다. "



내 삶에 단 한번뿐인 이 순간을 기록했다.



1608BB4B507AA26234C482 매일 보고 걷던 내 그림자, 스틱 그리고 플립플랍



한 마을을 지나 아스팔트는 드디어 흙 길로 이어졌다. 길게 뻗어있는 노란 흙 길, 그리고 그 길가의 한쪽 귀퉁이에 아틸라가 앉아 있었다.



"Hola"



우리는 나란히 앉아 오전에 샀던 빵을 조금 먹었다. 아틸라가 듣고 있던 노래를 나에게 들려준다. 오래간만에 꽂은 이어폰의 감촉이 낯설다. 그가 산티아고로 떠나기 전에 듣고 반한 노래라고 했다. 몽환적인 분위기의 노래였다.


I'm free, come with me.


라고 속삭이는 가수의 목소리가 꽤나 매력적이었다. Thievery corporation의 Free라는 곡이었다. 좋다. 나란히 앉아 그 노래를 계속 반복해가며 들었다. 그 몽환적인 멜로디는 다리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었다.

음악의 힘, 처음으로 이어폰을 두고 이 길에 온 것을 후회했다.





[ free, Thievery corporation ]

클릭하면 나와요! (주소: http://youtu.be/88KR-q4m5s4)





우리가 앉은 맞은편 길 귀퉁이에도 웬 남녀 순례자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우리는 각각 준비한 음식을 먹으며 인사를 나눴다. 그 커플은 2년 전 피에네스떼레에서 우연히 만났고, 지금은 스페인에서 같이 살고 있다고 했다. 독일인인 남자는 길 위에서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노란 산티아고 안내서의 저자라고 했다. 책의 업데이트를 위해 주기적으로 그는 산티아고를 걷고 있었다.


내가 떠나올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노란 책이 없었지만, 이 길 위에서 만난 사람의 절반 이상은 그가 쓴 노란 책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에는 한국에도 그의 노란 산티아고 안내서가 출간되었다.)


그 책의 저자를 만나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1410824B507AA29B26CC77 카미노의 연인



그들은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는 금세 일어섰다. 우리도 곧 그들을 따라 일어선다. 이 길 위에서 이루어진 수많은 커플들, 그 행복한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도 행복해진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토록 찾아 헤매어도 만나 지지 않던 나의 인연이 이 낯선 곳에서 만나지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 길을 걷기로 결심한 그 마음만 놓고 봤을 때 뭔가가 비슷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 이 곳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더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하고, 원하는 삶의 방식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길이니 말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 온 이 곳에서 나와 너무도 비슷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 때, 어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사랑이 이루어지던 이루어지지 않든 간에 이 길이 사랑으로 충만한 것은 사실이지 싶다.





앞서가던 아틸라가 갑자기 돌아서더니 하늘을 가리킨다. 강렬한 태양에 나는 하늘을 바라볼 수가 없었고, 아틸라는 나에게 선글라스를 벗어서 준다.



"Oh my god!! It's so beautiful!"



동그란 무지개가 태양을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이런 무지개는 난생처음이었다.



"와~ 나 이런 거 태어나서 처음 봐. 둥근 무지개라니! 상상도 못 하였어!"


"나도 깜짝 놀랐어, 너무 아름답다.!"




14019F45507AA2EC094A9B 썬보우라고 부르던 동그란 무지개




태양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무지개. 정말 신비로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한참을 둘이서 멈춰 서서 무지개를 바라보고, 지나가는 몇몇 순례자들에게도 알려주었다. 모두가 감탄했다.


하늘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조금 가다가 다시 보고, 조금 가다 다시 보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무지개는 사라져 있었다.


잠깐 동안의 기적, 뜨거운 태양을 올려다볼 생각을 한 사람에게만 보였을 행운. 이 놀라운 무지개를 찾아내고 함께 볼 수 있게 해 준 아틸라가 참 고마웠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눈 앞에 펼쳐졌다. 저 길을 걸어 올라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한숨이 나온다. 노란 책의 저자 아저씨가 저 언덕을 넘으면 정말 아름다운 호수를 볼 수 있으니 힘을 내라고 말해준다.



"무챠스 그라시아스."



힘든 건 어차피 모두가 매한가지다. 이렇게 서로를 격려하고 의지해가며 순례자들은 오늘도 한 발짝씩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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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저 멀리 호수가 보였다. 멀리서 보아도 정말 크고 아름다운 호수였다.


다들 호수를 바라보며 쉬고 있었다. 우리도 잠시 앉아 휴식을 취했다. 아까 만난 폴란드 할머니 두분도, 노란 책 저자 커플도, 그리고 처음 보는 젊은 순례자 서너 명도 함께였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우리는 다 같이 함께 걷게 되었다. 나는 그들을 뒤따라 걷기에 바빴고, 그들은 잠시 쉬다가 내가 오면 다시 걸었다. 다리가 너무 아파왔다. 오래간만에 너무 길게 걸으려니 다리가 지쳐버린 것 같았다. 통나무처럼 뻗뻗해진 다리로 걷다 보니 나는 자꾸만 뒤처지고 있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전혀 쉬지 못한 나는 점점 더 지쳐가고 있었고, 내가 멈춰 쉴 수 없게 그들과 함께 걷고 있는 아틸라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무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나름 최선을 다해 걷는다고 했지만 속도가 자꾸만 늦어졌다. 산길이라 플립플랍을 신을 수 없었고, 내 발은 갑갑한 신발 속에서 뜨겁게 부풀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 너무 고통스러워 머리가 새하얗게 비워지는 기분이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낯선 산길, 저 옆에 있는 돌바위가 어쩌지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난 더 걸을 수 없었다. 거의 3시간을 나는 쉼 없이 걸어온 셈이었다. 다들 어쩜 저리 잘 걷나 모르겠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으로 한 발짝씩 옮기고 있었다. 걸어도 걸어도 아무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완전히 낯선 곳에 완전히 혼자 동떨어진 낯선 기분이 가득했다.



'이대로 혼자가 돼 버리면 어쩌지?'

'아틸라가 나를 두고 저 사람들이랑 가버리면 어쩌지?'

'저 멀리 갔는데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어쩌지?'



별의별 걱정이 다 들었다. 그림 같은 하늘도, 아름다운 풍경도, 혼자 남겨진 두려움 앞에서는 아무 소용없었다. 내가 혼자 쉬고 있는 이 회색빛의 낯선 길을 얼른 벗어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걸음을 멈추고 쉴 수 없었다. 낯선 두려움이었다. 빨리 아틸라를 만나고 싶었다.



14028C45507AA31F0AA7D7 그토록 나를 불안하게 했던 돌산... 하늘이 이렇게 파란데.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잿빛 돌산을 벗어나고 싶었다.


다리가 빨리 움직여주진 않았다. 그저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고통 속에 한 발짝 한 발짝 내딛을 뿐이었다. 돌산을 돌아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내리막의 끝에 아틸라가 혼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그는 나를 꽤나 오래 기다렸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저 길 끝에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말이다. 내가 오는 것을 본 아틸라가 역시나 자리에서 일어난다. 난 정말 쉬고 싶은데 그는 또다시 걸으려나 보다.


"아틸라, 근데 나 진짜 힘든데 좀 쉬어가면 안 될까?"


"응 쉬어가자. 근데 여긴 햇볕이라 별로야. 네가 안 올 것만 같아서 길이 잘 보이는 저기에 있었던 거야."


"아 정말? 내가 안 오긴 왜 안 와. 네가 여깄는데."


말없이 내 머리에 키스를 하는 아틸라다. 그의 존재가 또다시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내가 이토록 그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나는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마을을 벗어나 개울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길 가에 잠시 앉아 쉬기로 했다. 물속으로 뛰어들어가 발을 담그고 싶었지만 개울은 저 멀리서 흐르고 있어 그럴 순 없었다. 늘 우리가 먹던 초콜릿 쿠키를 먹으며 지친 몸을 달랜다.



"이건 진짜 말도 안돼. 내가 가면 다시 걷고, 내가 가면 다시 걷고.. 나는 거의 쉬지도 못하고 세 시간을 걸었어."


"아, 그랬겠구나. 그렇지만 넌 정말 튼튼한걸? 세 시간을 어떻게 안 쉬고 이렇게 걸어?"


"그러게. 근데 진짜 더는 못 걸을 것 같았는데 내가 계속 걷고 있더라. 신기했어."


투정 한번 부려 보려고 했는데 그냥 웃고 만다. 그간 우리가 너무 조금씩 걸어서 그런가 보다고 얘기하며, 아틸라가 알려준 헝가리안 욕을 나란히 해 가며 웃는다. 누굴 욕하겠는가? 내 선택이 그랬을 뿐인 것을 말이다.


Shit, basszameg. !



다시 플립플랍으로 갈아신었다. 발가락부터 다리 전체가 고통스럽지만 걸어야만 한다. 아틸라가 나의 보폭에 맞춰서 천천히 걸어준다.



"뚜루루 뚜두 뚜루루루루 ~~ Don't worry, be happy ~ "



그렇게 돈 워리 비 해피를 함께 불러가며 우리는 손을 잡고 길을 걸었다.



삼십 분쯤 더 걸어 마을이 나왔다. 우리의 목적지는 이 곳에서 3km를 더 가야 했지만 우리는 이 곳에서 쉬어가기로 결심했다. 입구에 있는 바로 들어서니 우리가 아까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그들은 이 곳에서 쉬어갈 예정이라고 했다. 다음 마을까지 갈 것이라는 우리에게 힘을 내라 말해준다.


우리는 클라라 두 잔을 시켜서 오전에 산 참치 빵과 함께 먹었다.



"너 그거 기억나? 우리 처음 만난 날도 이렇게 먹었었어."



파라다이스를 지나 행복으로 가득한 상태로 내려온 마을에서 우리는 클라라와 참치 빵을 먹었었다. 그리고 그 한잔의 맥주 덕분에 남은 6km를 정말 힘들게 걸었었다.



"오늘은 3km 남았으니까 그때보다 훨씬 수월할 거야!"


"나도 그러길 빌어. :) "



그와 함께 걸은지 벌써 15일째이다. 우리는 하루하루 되짚어가며 손가락을 접으며 세어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고작 일주일쯤 같이 걸은 기분인데 벌써 2주가 넘게 함께했다니.. 거의 매일, 하루에 16시간쯤은 얼굴을 마주 보고 지낸 것 같은데 이렇게 지겹지 않을 수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아침 눈 뜰 때부터 밤이 되어 잠들기 전까지, 각각 걷는 시간을 빼고는 함께 먹고 함께 쉬어왔다. 2주가 넘는 시간을 그렇게 보냈지만 아직도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은 새롭기만 하다.



"고마워. 모든 것에. "

"Thanks for everything."



그리고 우리는 다시 손을 잡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드디어 우리의 목적지인 Olveiroa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사설 알베르게를 지나 우리는 시립 알베르게를 찾아갔다. 조금 낡고 허름해 보이는 알베르게였다. 다행히 우리를 위한 침대가 있었고, 아틸라와 나는 나란히 이층 침대를 쓰게 되었다.


조금 전에 참치 빵을 먹어 배가 고프지 않았던 우리는 입구에 있던 슈퍼마켓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때우기로 했다. 내일 먹을 빵을 사고 약간의 빵과 문어 통조림, 그리고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제 만났던 헝가리안 친구들을 다시 만났다. 또 만나서 반갑다고 인사를 하고, 그들이 알고 있는 한국인에 대해 나에게 이야기해줬다. 아무래도 포토 마린에서 만났던 그 약사 오빠를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한국인과 헝가리인, 뭔가 성향이 비슷한 구석이 있는 듯했다. 늘 침략당하면서 살아온 역사가 비슷해서 그런가?


나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그들은 또다시 진지한 얼굴로 무엇인가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낯선 언어를 듣고 있는 것도 꽤나 재밌는 일이었다. 나름 무슨 얘기를 할까 추측해가며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해본다.


얼굴이 진짜 심각하다. 뭐 얼마나 심각한 일이 있나 싶어 차마 껴들지는 못하고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들과 함께 다닌다는 헝가리안 할아버지의 등장으로 그들의 대화는 중단되었고, 심각한 얼굴은 한 명이 더 늘었다.


너무도 심각해 보이는 네 명의 헝가리안이다. 우습다. 돌아오는 길에 얘기를 들어보니, 역시나 그 할아버지로 인한 고통을 토로하는 중이었다고 했다. 그럴 거면 그냥 따로 다니면 되지.. 그러기엔 영어도 못하는 할아버지가 너무 신경 쓰인단다. 그런 마음으로 이 긴 길을 함께 걸어온 그들이 대단한 것 같다.


그들의 행운을 빌어주며 우리는 우리 숙소로 올라갔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잠을 자고 있었다.



"지니, 우리 잠깐 나가서 바람 좀 쐬자. "


"응 그래."



어둡고 조용한 방을 나와 알베르게 뒤편 정원으로 나갔다. 별들만 반짝이는 까만 밤이다. 벤치에 앉아 스트레칭을 했다. 시원한 바람에 다리의 열기가 조금 식는 것 같다.



아틸라가 나를 바라본다. 까만 밤하늘의 별처럼 그의 눈이 반짝인다. 나도 그를 바라본다. 낮에 만난 동그란 무지개가 떠오른다.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무지개처럼,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내일이면 우리는 피에네스떼레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이 길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900km, 그 긴 길을 걷고야 만 것이다.



"오늘도 정말 고마워, 그리고 난 어제보다 오늘 더 너를 좋아해."

"thanks for today, and I like you more than yesterday."



하마터면 내가 먼저 그에게 키스할 뻔했다.



그는 그저 나를 따뜻하게 한번 안아주고는 안으로 들어가자 말했다. 그도 나처럼 많은 생각을 하고 있지 싶다. 며칠 남지 않은 그의 출국,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계속 떠오르는 이별의 순간.



그냥 시간이 오늘에서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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