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 별 것 없는 삶.
투닥투닥.
요즘 우리의 일상이다.
아이는 “꼭 그렇게 말해야 돼?”를 달고 살고, 나는 “너도 그렇게 말해야 해?”라며 되받아친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알던 그 말갛던 아이가 점차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의 때를 탄 것인가. 드디어 그 무서운 사춘기에 접어든 걸까.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이르다.
오늘 투닥투닥 주제는 악기다. 현재 아이는 악기를 배우고, 오케스트라 단원 활동 3년 차. 최근엔 대학교에서 주최하는 콩쿠르에 처음 나갔다. 첫 음부터 실수했을 때, 나는 아이가 당연히 얼어붙을 거라 생각했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덤덤한 얼굴로 연주를 이어갔고, 그 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뭉클하다. 결과 발표 날 나에게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제20회 악기대학교 악기아카데미
전국음악협회콩쿠르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성명 : 이서윤
입상 결과 : 긴장수습상
심사평 : 처음 긴장을 후반에 잘 풀었다....
블라블라.
첫 음에서의 실수를 침착하게 수습한 모습 덕분인지, 예상치 못한 상을 받았다. 큰 상은 아니었지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라 우리 모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학원 선생님도 ‘아마도 초반 대처가 큰 점수를 받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음악 하는 이들에게 가장 큰 공포인 ‘실수’를 이겨낸 모습은, 누구라도 큰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보통 첫 콩쿠르에 첫 음부터 실수해 무대에서 울며 연주를 하나도 못하는 친구들도 있고, 심지어 콩쿠르 준비 중에 그 압박감을 못 이겨 뛰쳐나가는 친구들도 있지만, 서윤이(가명)는 힘들어했지만, 일단 도망치지 않고 묵묵히 연습을 했고, 그 연습은 빛을 발해. 실수한 후 다시 처음부터 연주한 것이 아니라, 실수한 음이 나온 다음 이어가는 음으로 바로 연주하는 센스와 결단력.
그 상황에서 울지 않고 덤덤하게 포커페이스로 연주할 수 있는 대범함은 처음 콩쿠르에 나간 아이 답지 않게 잘 처신했음을 연신 칭찬하셨다. 무엇보다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봤을 때 서윤의 큰 장점은 어쨌든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이라 인식되었을 때 일단 한다는 것이었다. 박자나 음악적인 컨트롤은 배우면 되지만 곡을 해석하는 능력, 끈기는 배울 수 없는 것이다.라는 말을 들으며 나는 그저 웃었다.
기뻐서가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
태어날 때 내 골반에 머리가 끼이자 빽빽거리며 나‘ 좀 그냥 꺼내줘. 나 안 할래. 힝드렁’라고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건 끈기에 해당하지 않나? 라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끈기라. 단어를 아무리 곱씹어 봐도 아이와 어울리지 않아 선생님의 칭찬에 찝찝함이 느껴졌다. 심지어 콩쿠르 아침까지 ‘나 못해!!!’를 시전 하며 침대에 엎드려 다리를 버둥거리던 모습이 떠 올랐다.
선생님께서 그 모습을 못 보셔서 그래요.라는 말이 목 아래까지 올라왔지만 그저 ‘아.. 네.. 선생님 덕분이죠.’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렇다. 아이는 콩쿠르 대회에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아 했다. 콩쿠르에 보낸 건 순전히 내 욕심이자, 교육관 때문이었다. 애초에 상을 받으라 내보낸 콩쿠르가 아니었다. 악기를 정식으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연히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세상에 완벽한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완벽한 시작도 완벽한 준비도, 끝도 없다. 원하는 결과를 얻는다 하더라도 미련이나 후회가 남기 마련인 것을. 아이의 완벽하고자 하는 성향을 바꿔 줄 순 없겠지만. 노력한 것이 내가 생각한 결과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그 괴정에서 분명 배우는 것이 있다는 걸 알기 바랐을 뿐이었다. 콩쿠르 당일 아침.
나에게 머리를 묶이면서도, 옷을 입으면서도, 콩쿠르 가는 길 악기에 온기를 불어넣으면서도 ‘나 진짜 못하겠어.’라고 말하며 입이 뿌루퉁 o3 o) 나와 있는 아이에게 깊은 빡침을 느꼈다. 이것이 바로 ‘다 너 좋으라고 하는 건데’의 부모 챕터 1의 마음인가.라고 생각하며 조금 자괴감이 들었지만 차분히 라 쓰고 으르렁 거리며 말했다. (옆에서 이도윤 님의 '워워'가 더 빡쳤음)
“누가 너 더러 상 받으래? 상 안 받아도 괜찮아. 여태껏 연습했고, 그 연습한 것만큼 하고 내려와. 그 무대에 서서 연주를 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거야.”
노력한 것에 대해 결과가 있으면 당연히 좋겠지만, 세상 일이란 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고, 너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뿐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보듬을 수 있는 거리에서 함께 겪어 나가고자 했을 뿐이었다. 모든 무대를 마치고 꾸벅 인사를 하고 내려오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가 거의 마지막 차례였는지 곧 1그룹의 연주가 모두 끝나고 1그룹들의 참가자와 보호자들이 경연장 밖으로 나 갈 수 있게 되었다. 복도에 서 우리를 바라보는 아이는 어쩐지 시원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잘했어. 수고했어.’ 그러자 아이는 나의 품으로 파고들며 ‘나, 실수했어.’라고 말했다. 나와 그는 ‘실수를 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실수를 했더라도 끝까지 연주하고 내려왔잖아. 그거면 돼.’라고 아이를 도닥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뒷 자석에서 묵묵히 악기를 손질하던 아이는 조용히 말했다. ‘실수한 건 알지만, 기왕 나갔으니까 상 받으면 좋겠어.’라고. 자기가 노력한 것에 눈에 보이는 결과로 돌아오는 것은 최고의 시나리오지만 어쩌겠는가. 그 말에 ‘상을 받던 안 받던, 끝까지 해낸 네가 멋진 거야. 너 오늘 정말 멋있었어.’라고 대답을 해줬고 악기 손질을 하며 아무런 말 없던 아이는 생각이 정리된 건지 어쩐 건지 그제야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 배고파.”
그래. 이게 너지.
“그래 밥 먹으러 가자. 네가 원하는 걸로”
이번에는 운이 좋아 상을 받았지만, 그렇지 않은 사소한 일들이 모이고 쌓이면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아이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했다. 내가 아이에게 알려줄 수 있는 세상을 사는 아주 작은 이정표가 된다면 기쁠 터였다. 나는 사자가 새끼를 벼랑 끝에 떨어트려 기르듯, 아이가 많이 어릴 때부터 이렇게 육아를 했다. 이런 나를 보며 사람들은 늘 한마디 씩 나에게 하던 게 생각났다. (NT의 끊임없는 사고의 확장이 글로 표현됨을 읽고 계십니다.)
“어렵게 가진 아이라서, 좀 귀하게 키울 줄 알았는데?”
어떻게 기르는 것이 귀하게 키우는 것일까. 어떤 행동을 하던, 무슨 일을 하던 다 괜찮다고 말하고 용인해 주는 것이 귀하게 키우는 것일까. 귀하게?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피식하고 웃었다. 웃는 것 말고는 정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루는 ‘어렵게 얻은 아이인데 뭘 그렇게 빡빡하게 키워?’라는 말을 나에게 건넸다. 난임 끝에 얻은 아이라는 편견이 싫었다.
난임은 내가 겪은 문제이지. 아이까지 갈 문제는 아니었다. 아이는 잘 유지해서 태어났고, 태어난 순간 다른 아이들과 다를 것 없었다. 내가 이 아이를 어떤 방식으로 키웠더라도 그건 그것대로 그들의 입에 오르내릴 반찬, 안줏거리가 되었겠지. 싶었다. 만약 아이가 아팠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겠지. ‘주사 맞고 약 먹어 얻은 아이니까 약해서 그렇다.’라고. 이쯤 되니 큰 병치례 없이 자라난 아이가 고마울 뿐이었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어렵게 가졌든, 쉽게 가졌든. 어떤 방식으로 가졌든. 육아는 육아였고, 힘든 건 힘든 거였다. 고양이를 키우긴 했지만, 식물도 하나를 제대로 키우기 어려울지인데. 나 외 다른 생명을 키워낸 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사람으로 태어난 이 아이를 하나부터 열 가지 전부 다 알려줘야 하는 육아는 정말로 힘들었다.
난임을 겪고 이 아이가 태어났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하고, 즐겁고, 기쁘게만 육아를 해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다른 일도 그렇겠지만, 육아는 더더욱 매번 고민의 연속이고, 선택의 연속이었다. 나의 고민과 선택 속에서 하나의 아이로 길러진다는 것이 꼭 분재 같이 느껴졌다. 분재에는 교재나, 노하우라도 있지. 이건 살아 있는 생명 그 자체였다.
그 부담감에 겁이 났다. 그런 의미에서 육아가 힘들어라고 말하면 다른 이들에게서 돌아오는 말은 늘 같았다. ‘그래도 낳았잖아.’ 가까이 있는 이들이 오히려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그 말이 나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분명 상처였다. 상처가 아닐 수 없었다. 이렇듯 평범한 임신 이후 아이를 키우며 육아 우울증이 오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여겼다.
하지만, 난임을 겪은 사람들은 간신히 낳았기에 간신이 낳은 이 육아로 인해 우울증에 걸리는 것은 마치 죄를 짓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고, 나 역시 그렇게 느껴졌다. 내가 지나온 그 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원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아이가 태어남으로 해 힘든 것을 힘들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착각했던 건 엄마가 처음이라는 사실이었다.
막 조리원에서 데리고 왔을 때. 집에 오자마자 아이가 배변을 했고, 배우자는 난 못해라는 제스처를 취할 때 한대 패고 싶었다. 그럼 나는 할 수 있고?라고 묻고 싶었다. 나도 그와 같은 시간에 부모가 되었고 다만, 조리원에 있을 때 그보다 한 20번쯤 더 안아 봤을 뿐이었다. 그가 못 하겠다고 하니 하는 수 없이 한 20번쯤 더 안아본 내가 으억으억 소리를 내며 기저귀를 갈았다.
그가 출근을 하고 나면 아이와 나 단 둘이 집에 남아 씨름을 해댔다. 엄마가 처음인 여자와 세상에 태어나 모든 것이 처음인 아이. 둘 다 서투름이 극치였다. 신생아 시절 빽빽거리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도대체 왜 우는지 모르겠고, 2시간에서 3시간마다 수유를 해야 했다. 수유를 하고 트림을 시키고 나면 다음 수유 텀까지 3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30분의 시간에 정말 싱크대 앞에 서서 허겁지겁 밥을 먹고, 세탁기를 돌리고, 청소를 했다. 나는 그나마 직수라 다행이지 분유를 먹는 아이들은 그 시간에 분유병도 씻어놔야 했다. 나라는 존재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나날들. 그때는 이런 마음 자체를 몰랐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순간이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 말고는 이 일을 할 사람도 없었다. 부모의 도움도 그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목에 아직 힘이 없어 잘못하면 뚝 부러질 것처럼 달랑달랑 붙어있는 신생아를 나 혼자 씻길 엄두가 나지 않아 아이를 들고 바들바들 떨며 물에 그냥 담갔다 뺀 날도 많았다.(이때 배우자는 막 회사에 자리를 잡느라 신경을 써 줄 수 없음) 난임을 겪었다고 해서 이 모든 일이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이 힘듦 자체를 감사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걸 하려고 아이를 낳았어.' 라며 매번 나를 다독였다.
사실 울고 싶었다.
난임은 이미 아이를 낳음으로 끝이 났지만, 평범한 임신을 하지 못한 내 모든 흔적들에게 나의 발목을 매번 붙잡혔다. 아직도 난임이 나의 삶에 현재진행형이라는 게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나 강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게 아이는 서투른 엄마의 손에서 서투르게 조금씩 자랐다.
아이가 자랄수록 친구의 말이 무슨 말인지 절실히 이해 되었다. 아이는 임신, 유지, 출산만큼이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아이라는 가지를 다듬을 때면,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에게 그 이유를 원했다. 내 설명에 부족함이 있다면 자신의 의견을 나에게 제시하기도 하는 주체적인 존재였다. 다듬는다는 그런 개념 자체가 어울리지 않았다.
'열매'
아이는 '열매' 그 자체였다. 나에게서 툭 하고 떨어져 나간 열매 같은 아이는 데굴데굴 굴러 내 근처 옆 자리를 잡았다. 나와 비슷하지만, 다른 모습으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가끔은 같은 종인가? 싶을 정도로. 그때 내 어깨가 흔들리는 느낌이 났다. 정신이 돌아왔다.
“응?”
“엄마 멍 때려?? 내 말 듣고 있어?”
아. 여기는 버스 안이지. 내가 몽롱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니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손으로 내 눈을 앞을 휘적거렸다. 그러면서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에이. 안 듣고 있었구나”
“아냐. 오케스트라 담당 선생님이 어쨌다고?”
나의 말에 아이는 입술을 씰룩이며 볼멘소리를 했다.
“이번 오케스트라 담당 선생님 별로라고”
“왜? 개 별로야?”
“어.. 멍 별로야!. 그냥 좀 그래. 아.. 어떻게 삼 년이나 버텨.”
“좀 막막해?”
“응.. 오케스트라는 재미있는데... 그만둘까.”
인정한다. 앞선 오케스트라 담당 선생님이 너무 괜찮았았다. 하지만, 이번 바뀐 오케스트라 담당 선생님은 누군지 모르지만, 아이에게는 조금 낯설고 힘들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세상을 살며 나하고 맞는 사람하고만 만날 수 없을 텐데라는 생각과 함께, 한번 시작한 일은 끝을 내고 나왔으면 했기에 나는 말을 이었다.
“지금 하고 있는 파트장(주 메인 파트/우리끼리 정한 단어)은 먹고 나와야지.”
“자신 없어.”
자신이 없다는 말이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한다.
참을 이인인이 이 이 이 이 이이인.
“악기 짱 못 먹어?”
마음을 감추려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웃어라. 화날 때 웃는 자가 일류다.
“엄마, 악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안 해봐서 몰라 엄마는. 개인곡은 내가 잘할지 모르겠지만, 오케 곡은 개가 더 잘해.”
너, 내가 웃는 게
지금 정말 기분 좋아서 웃는 걸까.
눈치 좀 챙길래?
“그래 모르겠지. 하지만 학원을 다니는 건 거기서 너 하나로 알고 있는데, 거기서 네가 못 한다고 하면, 나는 어째?”
사람의 말은 오해를 사기 십상이란 게 바로 이런 건가 싶었다. 부모, 자식 관계도 예외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사실을 나는 자꾸만 잊는다. 나와의 묘한 티키타카 끝에 아이는 나를 향해 눈을 흘겼다. 요즘 눈을 세모나게 만들 때마다 나는 '이 새끼가?'라는 생각이 아니 들 수 없었다. 나는 부모이기 이전에 꼰대였던가. 한 달에 학원 비용이 얼만데. 그 친구보다 자기가 더 못한다는 소리를 이렇게 당당하게 하는 게 맞는 건가.
남들이 말하는 바로 학원에 전기세 낼 돈이 없어서, 전기세를 내어주러 다니는 거였나?라고 생각하니 원가를 따지는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서 있는 건가 싶어. 기분이 상했다. 별별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휴우.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옮기니 옆에 졸졸 따라붙은 아이가 먼저 선수를 쳤다.
“학원을 다녀서 이런 소리 들을 거면. 오케도 안 하고, 학원도 안 다닐래. ”
하. 순간 어이가 안녕히 계세요. 하고 집을 나갔다. 그러자 기회는 이때다 싶었는지 은은했던 빡침이. 깊은 빡침이 되어 단전에서부터 불쑥 올라왔다. 그 자리에 우뚝 서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이는 나에게 반항하듯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이 그이기도 했고, 나이기도 했다.
“돈 아끼고 좋잖아?”
얼씨구?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거야? 아이는 나를 가끔 빡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부처님. 하느님. 모든 신님들. 저에게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소서. 그 빡침에 포커페이스가 주 특기인 나는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생각해 보니 아이의 강심장 같은 무심한 포커페이스는 나로부터 나온 것이었나.?
“그래, 그럼 안 할래? 억지로 시키고 싶진 않아. 너 말대로 돈 아끼고 좋네?”
아이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니- 나는 하고 싶은데, 엄마가 자꾸 그렇게 말하니까 하기 싫잖아.”
너의 하기 싫음이 왜 내 탓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를 보자니 나의 대학원 시절이 떠올랐다. 지도교수님의 ‘너 나한테 시수 안 받을 거니?’라는 말에 기분이 나빠진 나는 홧김에 연구실을 뛰쳐나와 석사 졸업이 아닌, 오랫동안 수료로 남았다. 좋게 말하면 솔직했고, 나쁘게 말하면 더러운 성격 때문이었다. 연구실을 뛰쳐나온 건 전적으로 나의 선택이었다.
그 선택은 나의 삶에서 치명적인 오점이 되었고, 많은 기회를 놓쳤다. 그렇기에 아이가 시작한 일은 목숨이나 안전을 위협받을 그런 것만 아니라면 끝까지 해냈으면 했다. 다른 부모와 다를 것 없이 내가 후회하고 실패한 길로 가지 않길 바랐고, 덜 후회하길 바랐다. 난임 끝에 어렵게 아이가 태어났지만, 문득문득 우울감이 깊었던 이유가 바로 이런 괴리감 때문이었다.
“그만두는 건 니 선택이지, 내 탓이라고 하지 마. 정말 안 할 거면 선생님께 말해.”
사람들은 ‘그렇게 어렵게 낳았는데 아이가 안 예쁘냐’라고 물을 때마다 이쁜 것과 힘든 것이 별개이듯 난임과 육아는 별개 일 뿐이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난임을 겪는다고 해서 아이를 낳자마자 모성애가 생겨나고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해결하는 완벽한 부모가 되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럼에도 그래. 건강하니 되었다는 그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틸 뿐.
“아니이...”
아니이이를 계속 고장 난 테이프처럼 되뇌는 아이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협상은 있어도 협박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학원가는 길이 이리도 길었던가. 조금 버겁게 느껴질 때쯤. 학원 앞에 도착했다. 아이를 학원 앞에 휙 던져 놓고 가버리면 되겠지만, 아이도 나도 서로 마음이 불편하게 그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그렇게 해서 미안해. 우리 기분 나쁘게 헤어지지 말자.”
어차피 사과를 할 거라면, 어설프게라도 하고 헤어지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나의 사과에 아이도 가방 끈을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나도 미안해.”
아이와 헤어지고 나는 늘 그렇듯 학원 근처 카페로 향했다. 익숙한 문을 열고, 익숙한 사장님에게 '사장님 오늘은 초코라떼요'라고 말했다. 오늘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실 기분이 아니야라며 그리고 늘 앉는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켜니 조금 진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번외 2편을 써내려 가며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준비해 둔 아이와의 사랑스럽고, 행복한 번외 이야기는 다 사라지고 어쩌다 아이를 고자질하는 번외가 되었을까. 그렇다. 나는 다섯 번의 유산을 겪고 여섯 번째 이 아이를 만났지만 다른 부모들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고, 부글부글한 마음으로 나에게 등을 보이는 아이의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하는 아이와 맞부딪히며 살아가는 수많은 부모 중 하나 일 뿐이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번외 2편 그 뒷 이야기.
원래 준비했던 이야기는 요거였습니다. 언젠가 브런치에 올려야지 했던. Jul 19. 2025. 이 날은 조금 감동을 먹었더랬지요. 그래서 브런치를 열어 작가의 서랍에 있던 글입니다. 딱 세줄뿐이긴 하지만요.
그리고 저학년 시절 감사의 편지를 우리가 아닌 아침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횡단보도에 도우미로 계시는 시니어분께 적어 드렸더라고요. 저를 붙들고 아이가 착하다며 얼마나 칭찬을 하던지.. 저도 몰랐던 이야기라. 아 네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하며 헤어진 기억이 있습니다.
보통은 나 그분께 편지 썼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어찌 된 일이지? 라며 눈빛으로 묻자 아이는 수줍게 부끄러워서 말 못 했지..라고 했지 말입니다.? 번외 2편은 그런 편이었단 말입니다.!! 감동과 이 친구의 사랑스러움을 이야기하고자 했단 말입니다. 네에?! 망했어!.라고 외치고, 어쩔 수 없지라고 씁니다.
그리고 오늘. 이 글을 끝으로 브런치 북 완결을 내고자 합니다. 작가님들의 응원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완결을 누른 뒤 브런치 공모전에 응모해 볼 생각입니다. 될 거라 생각하고 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은 맘입니다. 되면 아싸! 가오리!입니다.
그리고 행복에 지름길이 있나요?라는 이름 대신 < 새댁. 애가 하나뿐이오? >라는 이름으로 내볼까 합니다. 마음의 온도 작가님께서 예전에 저에게 브런치 북 작명 '20개' 이용권을 주셨어요. 강력하게 추천해 주신 제목으로 마!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 잘 되면 작가님께 책 한 권 수줍게 쏘고 싶...
/ 일단 김칫국 마셔! 막 막 마셔! /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마지막 쿠키 사진 나갑니다. 원래 영화에도 쿠키가 가장 궁금했던 것을 보여주지 않겠습니까? 정말로 마지막 인사 드립니다. 오랜 시간 동안 보내주신 작가님들의 관심과 애정, 그리고 사랑 모두 잊지 않겠습니다. 알라뷰! >ㅁ<)/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