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너무 오래 쉬었던 것일까. 내 몸은 10년의 근무보다 10개월의 휴직에 더 빨리 적응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쉬고 싶을 때 쉬던 삶에서 다시 복직을 하니 몸과 마음이 완강히 거부를 하는 것 같다. 피곤에 지친 몸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다. 소화불량에 빈혈, 어지러움 증세가 더해져 걷다가도 휘청거리기 일쑤다.
끙끙대는 내 모습을 보며 답답해하던 주위 사람들은 어서 빨리 병원을 가라고, 지금 회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앞다투어 말했다. 누군가는 소화에 도움이 되는 약을 주었고, 누군가는 진료를 잘하는 병원을 소개해주었다.
"1년을 쉬면서 그깟 몸 관리 하나 제대로 못했냐."
복직과 동시에 맥을 못 추는 내 모습에 아버지는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자식의 아픔에 대한 걱정과 안타까움의 표현이었겠지만, 몸 상태가 워낙 좋지 않다 보니 조금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당장 병원에 가 봐."
"몸 챙겨가면서 해야지. 미련하게 일하다가 건강 잃고 나면 아무 소용없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건네는 말들이 평소처럼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때로는 위로가 아닌 잔소리처럼 들릴 때가 있다.
내가 도와주겠다는데 뭐가 문제지?
알고 지내는 사람이 금전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돕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힘든 상황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모바일 쿠폰을 종종 보냈었다.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고마워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불편함을 감추지 않았다.
"이런 거 받을 정도로 힘들지는 않아."
순수하게 돕고 싶은 마음으로 한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아닌 불편함을 주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대개 처음에는 당황하고 나중에는 화가 난다. 선한 의도로 한 행동이 거절을 당하는 것은 낯설고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다.
나는 외향적이지는 않지만 사람에 대한 애착이 있는 편이다. 위로하려는 목적으로 한 말과 행동에 상대방이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일 때면 가만히 생각을 하게 된다.
'힘들어 보여서 도움을 주겠다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오히려 감사하는 게 일반적인 반응 아닌가?'
좋은 목적으로 남을 돕는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수 있다. ⓒ 픽사베이
그러고 보니 누군가가 도움을 구하기 전에 주로 내가 먼저 다가갔던 것 같다. 상대방이 먼저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상대방은 사실 괜찮은데 내가 성급히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누군가가 실제 힘든 상황에 처해 있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라면 남을 돕고자 하는 나의 행동이 유익할 수 있다. 하지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마음과 돕고자 하는 사람의 생각이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과 행동은 도움이 아닌 '실례'가 될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갖고 행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대부분의 사람은 힘든 상황에서 누군가가 곁에 있을 때 위안을 얻는다. 직접적인 말과 행동으로 도움을 줄수도 있지만, 충분히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남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게 익숙한 사람은 내가 말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마음의 온도
작년 11월 친구와 통화를 하던 때였다. 친구는 갑자기 통화를 하기 힘들 정도로 격하게 울었다. 당시 이태원 참사로 인한 안타까움과 분노, 허망함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울었던 것 같다. 같은 나라에 살면서 동일한 사건을 겪었지만, 무감각한 나와는 달리 친구는 온몸으로 아픔을 느끼고 있었다.
친구의 울음을 통해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았다. 평소 섣불리 다른 사람을 도우려고 하는 나와는 달리 친구는 특별한 행동을 하기보다는 국가적 재난이라는 현실 앞에서 그저 힘을 다해 아파했다. 위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처럼.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방법도 이와 유사한 것 같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창조주의 신분을 버리고 직접 미천한 인간의 몸을 입었다.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의 저자 김승섭 교수는 노동자들의 단식투쟁에 함께 동참하며 자신의 마음이 그들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참사를 당한 사람들, 삶의 모든 순간에 차별과 혐오를 받는 장애인들, 온갖 이유로 소외되거나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한 가지만 있으면 된다. 바로 그들과 같은 시선과 마음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살아오면서 스스로 학습한 가치관과 고정관념, 사고체계를 바꿔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면 경청과 공감을 통해 같은 마음의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 픽사베이
'사랑과 다정함조차 아플 때가 있다. 태어나 그것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이에게는.'
클레이 키건의 책 <맡겨진 소녀> 뒷면에 있는 문장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모두가 마땅히 감사함을 느낄 것 같은 행동도 누군가에게는 생소하고 불편한 경험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기 전에 한번 더 상대방의 입장에서 헤아려보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는 상대방과 내 마음의 온도가 일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끼는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마음의 여유는 있는지, 나의 말과 행동이 상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인지, 서로의 마음이 같은 온도로 이어져있는지, 그래서 돕는 행위가 실례나 상처가 되지는 않는지 충분히 곱씹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삭막한 세상에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그저 돕고 싶을 뿐인데 누군가를 돕는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만은 않음을 느낀다. 성급하고 일방적인 도움과 위로는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효과가 없을뿐더러 때로는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만약 주위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빠른 도움을 주기보다는 우선 그들과 함께 하며 같은 마음을 품어보는 것은 어떨까. 어떤 말과 행동보다도 더 큰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