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그림소설) 그의 이별여행

by 달고나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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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수야..

발끝을 곧추세우고 장롱에 몸을 기댔습니다.

움켜쥔 수화기 너머로 온 신경을 기울인 체 가만 눈을 감았어요.

철썩 철썩 아련하게 밀려오는 파도 소리.

까맣게 일렁이고 있을 파도를 떠올리니 제 마음마저 아득히 떨려오는 듯했죠.


10월의 밤 열한 시.

주위는 온통 어두움뿐이겠지요.

컴컴한 암흑 너머로 파도만이 철썩이며 제 존재를 알리고 있을 겁니다.

조금 더 걸어보면 군데군데 불꽃놀이에 한창인 사람들도 보일 테고

남우세스럽게 부둥켜안고 안방인양 사랑을 속삭이는 커플들도 눈에 뜨일 거예요.

걔 중엔 청승맞게 돗자리 펴고 앉아 오징어 회에 소주잔 기울이며

애꿎은 커플들이나 째려보고 있을 선택받지 못한 동성무리들도 수두룩.

매서운 바람에 코끝이 벌게져 가지곤 구시렁 대고 있을 모습이 선하여 웃음이 픽 나옵니다.

설마 기수 너, 거기서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어때? 잘 들려?


좋아. 마음이 차분해지는 거 같네. 춥진 않니? 바닷바람 매섭다던데.

옷은 든든히 입고 간 거야? 시절처럼 얄팍한 옷차림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하, 시절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그거. 견딜만해. 바람이 송두리째 빼앗아가는 거 같아.

이참에 다 버리고 가려고. 찌든 맘, 미련, 부질없음, 욕심 등등 말이야.


잊기 위해 간 거니?


잊어보려 온 거지. 야아, 여기 커플 진짜 많다.

저렇게 바들거릴 거면 방에나 들어가 있지 뭐 하러 부둥켜안고 비비적거리며 싸돌아다니는지 모르겠다.

남의 속 뒤집어지게.


어이 어이, 자네도 불과 한 달 전엔 그 무리 중 하나였다고. 벌써 잊은 거야?


그렇군. 나도 그랬던 거 같네. 멀리 갈 것 없다. 여기 늑대 한 마리 대령이오~


좀 예쁘게 봐줘라. 선배 된 입장에서. 건 그렇고 이건 누구 폰이야?

너 액정 나갔다 하지 않았어?


친구 거야. 잠시 빌린 거. 너 파도소리 들려주려고.


야아, 십분 넘어갔어. 얼른 돌려줘. 욕먹을라.


걱정 마. 소주 마시느라 정신이 없으시다. 쟤도 차였거든.


뭐야 그게. 차인 남자들끼리 위로 여행?


그런 셈이지.


얼른 돌아와라. 듣는 내가 다 비참해진다.

둘이 일심 해서 거기서 새로운 인연 찾을게 아니라면 얼른 짐 싸.

그게 뭐니 남자 둘이서. 가까운 동네 호프 집에서 널브러지면 될 것을.


뭐 어때. 팔짱 끼고 있으면 우리도 커플로 보일 걸?


아서라..


파도소리 더 들려줄까?


응. 조금 더 들려줘. 친구 눈치 보이면 얼른 끊고.


좋아. 간다.


파도의 울림을 전하고 싶어서,라고 말했습니다.

바람 탓인지 기분 탓인지 무겁게 내려앉은 목소리가 그저 아프게 느껴졌어요.


많이 힘든가 보네. 피죽도 못 얻어먹은 소리나 내고.

그러게 뜯어 말릴 때 관둘 것이지 또!

이럴 거면서 센 척이나 하고 말이야.

지 맘도 다 전하지 못하고 존심 세우다 차이고. 바보 같은 놈.


파도를 핑계로 울고 있을 겁니다. 울고 싶어서 버튼을 눌렀을 테니.

다른 이의 눈물을 받아내느라 정작 제 눈물은 닦을 줄 모르는 녀석이에요.

마치 제가 아빠 앞에선 눈물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요.

오 분쯤 지났을까. 뚜뚜 소리와 함께 통화가 종료됐습니다.

눈물 젖은 목소린 들려주고 싶지 않았나 봐요.


핸드폰을 쥐고 베란다로 나갔어요.

까만 하늘 촘촘히 박혀 있는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려와 맘에 박힐 것 같아요.

핸드폰 액정을 가만 들여다봅니다.


통화키를 누를까 말까.

아직도 갖고 있으려나. 아님 주인이 회수했으려나.


소주를 마신다고 했으니 지금쯤 떡이 되어 골아 떨어졌을지도 모르겠네요.

숙소는 잡고 간 건가? 설마 무작정 떠난 건 아니겠지, 이 추위에.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추스르고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어쩐지 울적한 기분이에요.

끝인사 없이 종료된 통화가 마음에 걸립니다.


기수야, 울고 있니?

너 아직도 울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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