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틸다》 (로알드 달, 1988)
몇 해 전 나는 뮤지컬 마틸다에 흠뻑 빠져 있었다. 5개월의 공연 동안 한 달에 한 번꼴로 극장을 찾았다. 원작 로알드 달의 《마틸다》의 주인공 마틸다는 가장 좋아하는 여자아이 캐릭터 중 하나였다. 호주의 천재 코미디언이자 뮤지션인 팀 민친이 작사 작곡한 넘버도 취향에 꼭 맞았다. “때론 너무 필요해, 약간의 똘끼”라는 극을 관통하는 마틸다의 넘버 가사처럼, 순응보다 ‘똘끼’의 다짐을 품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유쾌하고 중 독성이 있었다.
커튼콜에서 마틸다 못지않게 큰 박수를 받는 인물은 마틸다가 다니는 학교 교장 트런치불이었다. 특히 어린이 관객의 환호는 열렬했다. 트런치불이 자애로운 교장이어서가 아니다. 트런치불은 아이들을 괴롭히는 악역이다. 외양은 피에 굶주린 사슴 사냥개의 추종자에 가깝고, 아이들의 실수를 조금도 용납하지 않으며 심기를 거스르는 아이는 즉각 응징한다. 그럼에도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지는 것은 마틸다가 그와의 대결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마틸다를 자신과 동일시한 어린이들은 패배 후 뾰로통한 얼굴로 커튼콜 무대에 등장한 트런치불에게 박수를 보낸다. 박수에는 거대하고 위압적인 인물에 대한 두려움 대신 한번 붙어볼 만하다는 자신감과 승자의 여유가 깃들어 있다. 어린이는 세계와 부딪쳐 자신의 힘을 가늠해 보고 싶어 한다.
원작 《마틸다》(1988)는 영국 작가 로알드 달(1916~1990)이 세상을 떠나기 불과 2년 전, 칠십 대에 이르러 내놓은 장편 동화다. 생애 마지막으로 완성한 이야기기도 하다. 손주를 둔 칠순의 로알드 달은 많은 노작가들이 그랬듯 세상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1980년대의 영국 TV 방송은 컬러 방송이 본격화되며 부흥기를 맞았다. 가정에서는 《마틸다》에 그려진 것처럼 텔레비전 앞에 앉아 식사를 했다. 로알드 달은 사람들의 시선이 텔레비전으로만 향하고 책은 천대받는 현실에 근심했다. 책을 가까이할 때 일어나는 일을 모두가 잊기 전에 이야기를 남기고자 했다. 노작가의 마지막 메시지가 담긴 《마틸다》는 그렇게 탄생했다.
《마틸다》의 주인공은 다섯 살 아이 마틸다다. 다섯 살은 영국 나이이므로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통용해 온 나이 기준으로는 여섯 살이나 일곱 살쯤이다. 마틸다는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다. 부모는 마틸다보다 몇 해 먼저 태어난 아들을 지독히 편애한다. 마틸다의 아버지는 고물차를 멀쩡한 차로 둔갑시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사기꾼 중고차 판매상이고, 어머니는 일주일에 닷새를 도박장이나 다름없는 빙고 장에서 사는 노름 중독자다. 오빠는 편애받고 자란 아이의 가장 안타까운 예인 안하무인의 무기력한 소년이다. 거실에는 늘 텔레비전 소리가 울리고 식구들은 따뜻한 밥 대신 인스턴트 음식을 텔레비전 앞 쇼파에 앉아 먹는다. 마틸다는 부모에게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었다.
작가는 주인공을 때로 시궁창 같은 현실에 놓지만, 홀로 내버려 두지는 않는다. 스스로를 구원할 무기를 하나쯤 곁에 둔다. 처음에 주인공은 그것이 무기가 될 가능성을 알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 돌이켜 보았을 때 비로소 무기였음을 깨달을 뿐이다. 마틸다에게는 책이 그랬다. 집에 홀로 남겨진 마틸다는 심심한 나머지 집 근처 도서관을 향하고, 사서의 도움으로 동화를 탐독하기 시작한다. 책장을 하나씩 섭렵하다 어느덧 문학의 세계를 마음껏 유영한다. 로알드 달은 어쩌면 자신이 좋아했던, 혹은 손주의 책장에 꽂히기를 바라는 책들을 작품 속에서 여러 권 언급한다.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비밀의 화원》, 찰리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피크위크 페이퍼스》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C. S. 루이스의 《사자와 마녀와 옷장》 등이다.
마틸다는 책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여행했고, 아주 흥미로운 삶을 사는 놀라운 사람들을 만났다. 마틸다는 조지프 콘래드와 돛단배를 타고 항해를 떠났고, 어니스트 헤밍웨이와는 아프리카로 떠났으며, 러프야드 키플링과는 인도를 탐험했다. 마틸다는 영국 어느 작은 마음에 있는 자신의 작은 방에 앉아서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
《마틸다》 (시공주니어, 2019) 25쪽
마틸다는 책을 통해 세상을 향한 눈을 뜨고 내면을 넓혀 나갔다. 더 이상 작은 방에 웅크린 외로운 아이가 아니었다. 현실은 시궁창 같아도 현실 너머에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아이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사랑받지 못하는 연약한 아이’에 두지 않게 된 마틸다는 스스로 현실을 바로잡기로 마음먹는다. 불합리한 세계에 순응하기보다 ‘똘끼’를 장착해 맞짱 뜨겠다는 결심은,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아는 아이의 배짱이다.
《마틸다》의 하이라이트는 마틸다가 트런치불과 맞붙는 장면이다. 마틸다는 이야기의 힘으로 손끝 하나 대지 않고 트런치불을 쓰러뜨린다. 트런치불이 감춰온 진실을 세상에 드러냈을 뿐인데 이야기의 힘은 강력했다. 피해자가 언제까지나 피해자여야 한다는 법은 없다는 것을 마틸다는 책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마틸다가 자신만을 위해서 나선 것은 아니다. 트런치불 교장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 담임 하니 선생님의 사정이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마틸다의 이야기에는 타인이 있었다.
트런치불에게도 이야기라는 무기가 있었다. 자신의 영욕만을 위해 사는 트런치불은 끊임없이 자신을 숭상하는 이야기를 생산해 내고 믿으며, 삶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악행을 저질렀다. 타인의 재산을 가로채고 한 가정을 파괴하고, 한 사람의 인생을 짓밟고 수많은 아이들의 인격을 모독했다. 그런 악행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이야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 속에는 타인이나 세상이 없으며, 오직 자기 자신만이 주인공이자 모든 것이다. 그 이야기가 누군가를 해치는 무기가 되고 결국에는 자신을 겨누는 무기가 된다는 것은 안타깝게도 시간이 지나 돌이켜 보았을 때에야 알 수 있다.
이야기는 무기다. 소중한 것을 지키는 무기가 될 수도 있고,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 노작가 로알드 달은 마지막 작품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써내려 가라고 말한다. 다만 그 이야기 속에 타인과 세상이 있기를 당부한다. 책 속에는 현실 너머의 타인과 세상이 있다. 상상하지 못한 무수한 삶들이 있다. 책장을 넘기는 동안 천천히 흐르는 시간은 자신을 성찰하기에 알맞다. 오늘도 책을 읽으며 미처 알지 못했던 세상을 내 이야기 속으로 끌어온다. 노작가의 마지막 메시지가 적어도 내 삶에서는 여전히 힘이 있다. 세상에 책이 있어 다행이다.
웹진 <다시 문학>에서 연재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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