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범중씨를 만났다.
나는 오랜 시간 발달장애인들과 예술 현장에서 만나며, 발달장애인의 예술에 대해 고민해 왔다. 어쩌면 이 고민은 타인의 예술을 이해하려는 것이 아닌, 나의 예술에 대한 고민이기도 했다. 그 무렵, 연구실의 류 박사님을 통해 자폐인사랑협회에서 자폐성 장애 예술가를 위한 멘토-멘티 프로그램의 시각예술 강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멘토와 멘티 모두 자폐성 장애 예술가인 이 프로그램에서, 그렇다면 시각예술 강사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나는 그 물음에 끌렸다.
그렇게 작년 7월, 멘티로 참여한 범중씨를 처음 만났다. 범중씨는 자폐성 중증 장애를 가진 40대 남성이다. 장애 예술가 멘토링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범중씨도 꾸준히 미술 작업을 해왔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범중씨는 진로나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있지는 않았다. 중증 장애로 인해 드로잉조차 쉽지 않아 짧은 시간 동안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 간헐적으로 작업해 본 경험이 전부였다.
범중씨와 첫 작업 시간에서 내가 느꼈던 것은, 쉽게 닿을 수 없는 언어 같다는 것이었다. 잘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그 언어를 배우고, 함께 말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의 시간은 시작되었다.
범중씨는 캔버스에 반복적으로 색을 칠했다. 처음에는 반복이 그저 반복으로만 보였다. 무언가 의미를 부여하고, 완성하기 위한 과정이라기보다는, 그 자리에서 맴도는 행위처럼 여겨졌다. 나는 비장애인의 시선에서 의미를 부여하며 ‘이야기’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범중씨의 작업은 그러한 기승전결의 틀을 벗어났다. 그의 반복적인 작업은 시간 위에 놓인 한 사람의 호흡이고, 감각이며 이는 존재의 표명이었다. 반복은 멈춤 없는 자기 호명처럼 느껴졌다. 마치 범중씨가 ‘나는 여기에 있어요.‘라는 말이 색을 통해, 리듬을 통해, 묵묵히 이어지고 있는 듯했다. 그 어떤 설명도 없이, 의미도 명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더욱 분명해지는 존재의 흔적이었다. 나를 비롯한 비장애인의 시선에서는 놓치는 것들
프로그램은 언제나 그렇듯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다. 우리의 만남도 예외는 아니었다. 8번의 만남이라는 정해진 회기는 서로를 이해하고, 느끼고, 기다리며 바라보기에는 역시나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범중씨, 나 그리고 범중씨의 어머님인 그녀) 자생적으로 연결되기를 시도했다. 무엇인가를 '계속하고 싶다'는 욕구는 언뜻 단순하게 들리지만, 사실 그것은 가장 강력한 창작의 원동력이자 인간적인 바람이지 않은가, 우리는 한 달에 두 번 그녀의 사무실 내 작은 창고에서 작업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었고, 의미를 '만들어내기' 위해 애쓰지도 않았다. 그냥 그 언어를 이어가길 바랐다.
범중씨의 작업은 말이 아닌 몸짓이고, 설명이 아닌 감각이며, 정답이 아닌 존재의 방식이다. 예술이 언어일 수 있다면, 그 언어는 단지 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함께 머무름’의 방식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