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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진권 Feb 25. 2021

과학혁명 1: 발견의 시대

자, 지금까지 우리는 고대의 과학을 살펴봤습니다. 엉터리라고 생각한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물론 지금의 기준에서야 부족한 게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천동설 체계는 당시로써는 최선의 결과물이었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어떨 수 없는 시대의 한계였지요. 결코 고대의 과학자들이 멍청하거나 노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2세기부터 과학혁명이 일어나는 16세기까지 천동설 체계는 거의 완벽하게 자기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여러분도 농업사회에서 “달력”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천동설은 역사상 그 어떤 이론보다 정확한 달력을 제공했지요. 또한 종교와 윤리의 바탕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어떤 학자보다 존경을 받았습니다. 천동설은 역사에서 ‘중세’라고 불리는 시대를 뒷받침하는 이론적 근거로 유지되었습니다. 대중 매체에서 중세는 마녀사냥이라던가 흑사병이라던가 하는 좋지 않은 이미지로 많이 묘사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중세는 1000년이 넘는 긴 시기이고 살기 어려웠던 시기는 일부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기간은 사회적으로 안정된 시기였습니다. 소위 말하는 것처럼 적어도 ‘암흑 시기’는 아니었지요.


그러나 15세기가 되자 영원할 것 같았던 중세에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 변화가 “과학혁명”이라고 부르는 중요한 사건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 결과로 과학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적인 과학으로 변모하게 되고, 그것이 산업혁명으로 이어져서 인류 역사 전체가 뒤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혁명이라고 부르니까 하루아침에 바뀐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과학혁명은 거의 200년에 걸친 점진적인 발전의 결과입니다. 그 여정에는 흥미로운 발견과 매력적인 인물이 가득합니다. 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흥미진진했던 그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하도록 하지요.



변화는 과학이 아니라 사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라 일컬어지는 시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합시다. 15세기에 들어 몇몇 유럽 국가들이 해양무역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인 포르투갈의 엔히크는 아프리카 항로 탐험과 대서양 무역의 진흥을 이끌었습니다. 그 결과 유럽의 변두리 국가였던 포르투갈은 강국으로 발돋움했습니다. 엔히크는 해양 왕자(Prince Henry the Navigator)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지요. 원양 무역이 주는 이득이 엄청났기에 많은 국가들이 앞다투어 탐험에 나섰고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바스코 다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 마젤란의 세계 일주 성공 등이 이어집니다.


이와 같은 항해를 가능하게 한 핵심 기술은 크고 튼튼한 배를 만드는 조선기술과 안전한 항로로 배를 모는 항해술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천동설의 활약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바다의 항해는 근거리 항해와 완전히 다릅니다. 육지 근처라면 경험 많은 항해사는 섬이나 지형을 보고 위치를 알 수 있지요. 그러나 대양의 한가운데에는 바다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 목적지인지 알아야 배를 몰 것 아닙니까? 대략의 방향은 중국에서 전래된 ‘나침반’을 이용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침반이 배의 위치까지 정확히 알려주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탐험가들이 사용한 배의 길잡이는 하늘의 ‘별자리’였습니다. 별의 위치는 정해져 있기 때문에 관찰하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서 별이 다르게 보이게 됩니다. 그걸 반대로 생각해보면 별의 위치를 알면 나의 위치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밤 중에 항해사가‘육분의’ 같은 관측 기구를 가지고 나와서 별자리를 관측했습니다. 그것을 별자리의 위치를 기록한 표와 비교하면 현재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유럽인들은 미지의 세계로 배를 몰았습니다.

(주: 이 방법으로 위도는 확실히 알 수 있지만 경도까지 정확히 알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정도로도 항해를 하는 데는 충분했습니다. 이후 18세기에 항해용 시계가 발명되어 경도도 정확히 측정할 수 있게 됩니다. )


그림 1. 항해술의 중요 기술이었던 육분의. 별과 수평선의 각도를 재서 배의 위치를 알아내는데 쓰였습니다. 


그런데 용어의 문제를 좀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대항해시대라는 용어는 일본 책에 처음 소개되어 한국에서도 많이 쓰이지만, 사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용어가 아닙니다. 역사학에서는 보통 그 시기를 “발견의 시대(age of discovery)”라고 부릅니다. 원양 항해가 주축이 되었다는 점에서 대항해시대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시기를 더 잘 대변하는 용어는 발견의 시대입니다. 시대적 변화로 발견에 초점을 둔다면, 서양이 무엇을 ‘발견’했는지가 질문이 되겠지요.


먼저 당시 유럽인들의 지식수준을 살펴봅시다. 생물이나 광물, 지리 같은 자연물에 대한 지식을 자연사(natural history)라고 부릅니다. 당시 유럽 대학에서는 자연사 교재로 여전히 플리니우스(~AD 79)의 <박물지>를 가르쳤습니다. 이 책은 로마 시대에 쓰인 훌륭한 책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1400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그 책을 배우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유럽인들의 지식수준은 아직 로마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신대륙까지 지리적 반경이 늘어나자 처음 보는 물건들이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향신료, 비단, 도자기 같은 값비싼 상품들과 더불어 감자, 옥수수, 담배, 카카오 등이 유럽으로 들어왔죠. 유럽인들은 처음 보는 물건이나 생물을 보이는 족족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런 물건은 큰 경제적 이득을 보장했습니다. 이와 같은 발견의 가치에 일찍 눈을 뜬 에스파냐의 필립 2세는 1570년대에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라는 사람이 지휘하는 세계 최초의 과학 탐험대를 신대륙에 보냈습니다. 이런 탐험대는 엄청난 양의 지리학적, 생물학적,의학적 발견을 모아 왔지요. 이 시대의 강국들은 그런 정보를 관리하기 위해 정부 기관과 박물관을 세우고 연구자를 육성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에 열광했습니다. 이런 발견물들의 전시회가 열리면 물건을 구경하려고 사람들이 줄을 섰지요. 우리가 아는 동물원이나 식물원이 이 시기에 처음 생겼습니다. 어찌나 인기가 있었던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집에 호기심 진열장(Cabinet of curiosities)을 만드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집에 진열장을 만들어서 이국에서 온 신기한 물건들을 채워 넣은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이 시대 사람들의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 부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물건은 구하기도 어렵고 매우 비쌌으니까요. 


  

그림 2. 17세기에 제작된 호기심 진열장. 산호로 채운 것으로 보아 아마도 주인은 산호 덕후(?)였을 것입니다 ^^


그렇다면 그런 물건들이 교과서에 있었을까요? 그것들은 유럽인들이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것들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아 떠날 때, 평평 지구설(flat earth)을 믿는 사람들이 그가 바다 끝에 있는 절벽으로 떨어져 죽을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그는 무사히 지구 반대편에 도착할 수 있었지요(안타깝게도 지금도 평평 지구설을 믿는 사람을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유럽 중심적인 세계관이 서서히 깨어지기 시작합니다.


또 다른 변화는 예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은 그것을 ‘르네상스(Renaissance)’라고 부르는데,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전 유럽으로 퍼진 문예부흥 운동을 말합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재생, 부활을 뜻합니다. 이 운동에 동참한 예술가들은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예를 부활시키고자 했습니다. 이 시기 이전, 유럽의 문화는 기독교에 종속되었습니다. 화가는 성화만을 그리고 조각가는 성녀만을 조각해야 했지요.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기독교 문화에 염증을 느끼고 자유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찾은 해법이 그리스 로마시대의 인간중심주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요? 그 혁신을 보여주는 회화, 조각, 건축, 음악에 이르기까지 정말 멋진 작품들이 많지만, 지금은 과학수업이므로 그림 하나만 살펴봅시다. 이 그림은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작품입니다(1484).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그림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당시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그림은 성모 마리아나 예수를 그린 성화가 고작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그런 엄숙하고 성스러운 그림과 완전히 다릅니다. 그림에는 비너스라는 이교의 신이 나체로, 이렇게 당당하게 서 있습니다! 비너스의 자세는 그리스의 조각상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림은 주제와 형식 모두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중세시대 금기시되었던 것들을 모두 깨버리고 있지요. 만약 100년 앞서 이 그림을 그렸다면 화가는 감옥에 갇혔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유럽은 중세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림 3.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 이와 같은 르네상스 예술이 사람들에게 준 충격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다른 그 무엇보다 변화를 가속시킨 것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이었습니다. 구텐베르크는 1445년 금속으로 활자를 만들어 인쇄하는 데 성공합니다. 여러분도 알고 계시겠지만 세계에서 금속활자를 가장 처음 개발한 것은 우리나라 고려시대죠. 그러나 우리의 금속활자는 여러 가지 이유로 큰 변화를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정보 혁명’을 유럽에서 일으켰거든요. 


조금 늦기는 했지만 구텐베르크는 기술적으로 뛰어난 생산 체계를 만들어냈습니다. 구텐베르크는 단지 활자만 개발한 게 아니고 인쇄술, 즉 더 큰 의미의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인쇄하는 기계-인쇄기였습니다. 그는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포도를 압착하는 프레스를 개조해서 인쇄기를 만들었습니다. 인쇄기에는 금속 활자를 단단하게 고정해주는 장치를 달았습니다. 그 덕분에 활자가 흔들리지 않아 빠른 속도로 고품질의 인쇄가 가능했습니다. 최대 1분에 20장이나 인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구텐베르크는 더 좋은 인쇄 품질을 위해 새로운 유성 잉크를 개발하고, 글씨를 잘 알아볼 수 있도록 인쇄물에 적합한 서체까지 개발했습니다. 대단한 노력이죠. 그는 단지 금속 활자 발명자가 아니라 인쇄라는 기술 전체를 바꿔놓은 진정한 혁신가입니다. 손으로 책을 옮겨 쓰던 기존 방식으로는 한 명의 장인이 한 권의 책을 만드는데 3개월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인쇄술은 한 사람이 일주일에 무려 500권의 책을 만드는 게 가능하게 했습니다. 비교가 불가능하지요. 1500년이 되면 독일에만 500곳의 출판사가 생기고 매년 수만 권의 책이 인쇄됩니다. 

그림 4.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압착 방식의 인쇄기. 레버를 돌려서 활자와 종이에 압력을 가하는 방식입니다. 이 기계는 유럽에 지적인 혁명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아침에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하면 저녁에 택배로 받을 수 있는 우리에게는 이 변화가 피부에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구텐베르크의 혁신을 ‘지식의 독점’ 관점에서 살펴보면 중요성이 이해될 겁니다. 당시는 중세였습니다. 기독교가 권력을 독점하던 시기였죠. 그런데 유럽의 평민이 성경을 볼 수 있었을까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당시 성경책 한 권의 가격이 집 10채 가격이었다고 합니다. 평민은 평생 모아도 못 살 돈이지요. 따라서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책이 없으니 당연히 글자를 배울 이유도 없죠. 따라서 기독교의 가르침은 대부분 성당의 신부에 의존했습니다. 성경을 못 읽으니 평민은 신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거죠. 달리 말하면 신부와 교황청이 지식을 독점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중세인들은 천 년이 넘게 살았습니다. 교황청의 권력은 철옹성이었고요.


구텐베르크가 처음 인쇄한 책이 무엇이었을까요? 눈치 빠른 분은 짐작하시겠지만 그것은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이제 인쇄술 덕분에 성경이 싸게 보급되기 시작합니다. 평민도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신부의 말만 따르는 게 아니라 때로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이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은 1517년 루터가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기독교가 얼마나 썩었냐면 테첼이라는 주교는 “금화가 헌금함에 딸랑 소리를 내는 순간, 죽은 자의 영혼이 천국으로 간다”라고 설교했다고 합니다. 돈을 받고 교인들의 죄를 용서해주는 ‘면죄부’ 판매입니다. 사람들은 반감을 가졌지만 힘이 없었기 때문에 말을 꺼내지 못했지요. 


그때 루터가 내세운 종교 개혁의 핵심 주장은 ‘오직 성경’만이 권위를 지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낡은 라틴어가 아니라 대중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인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일반인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자 면죄부라는 것이, 또한 교황청이 벌였던 많은 일들이 성경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말지요. 신교와 구교의 싸움은 30년 전쟁으로 이어지고 유럽은 정치적으로 격변하게 됩니다.


물론 종교 개혁이 전적으로 인쇄술 때문에 일어났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요인들이 얽혀있지요.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유럽에서 일어난 다양한 변화들의 뒤에 일종의 ‘정보 혁명’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변화의 핵심은 소수가 독점하던 지식을 다수가 공유하게 된 것입니다. 인쇄술이 없었다면 아마도 루터의 개혁도 한 지역의 변화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당시 최고의 인기 베스트셀러는 에라스뮈스와 루터의 책이었습니다. 1546년 루터가 죽기 전까지 그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은 무려 100만 권이 판매된 걸로 추정됩니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다 성경을 가지게 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이때 생겨나기 시작한 서점들은 정보 공유의 거점으로 출판인과 저자들이 만나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지적인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인쇄술은 유럽을 중세의 폐쇄적인 사회에서 벗어나서 지식 중심의 사회로 변화하게 했습니다. 과학도 예외는 아니어서 흥미로운 과학적 사실을 전해주는 책들도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이전에는 각 지역의 소규모 공동체에서 과학자들은 각자 연구를 했습니다. 중요한 발견이 이뤄져도 그것이 다른 지방에 전해지는데 수 십~ 수 백 년이 걸렸습니다. 이제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를 책으로 출판하여 빠른 속도로 지식을 전 세계로 전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과학의 발전 속도도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게 되었고 그것은 과학혁명이 일어나게 된 한 요인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변화를 한 마디로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 변화를 신 중심주의에서 인간 중심주의로 바뀐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음 그림으로 비교해보죠. 


  

그림 5. 왼쪽: 신 중심의 우주, 오른쪽: 인간 중심의 우주


왼쪽 그림은 지난 시간에 봤지요? 중세까지의 신 중심의 우주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아주 다른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비트루비우스 맨>이라는 그림입니다(1490). 겉보기에는 별 것 없어 보이지만 이 그림은 새롭게 건설될 사회의 핵심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우선 이 그림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살펴보죠. 다빈치는 로마시대 사람인 비트루비우스가 쓴 책을 읽다가 “인체의 비례 규칙을 신전 건축에 사용해야 한다”라는 대목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인체의 비례 규칙을 찾기 위해 다빈치는 실제 사람을 데려다 눕혀 놓고 자와 컴퍼스로 비례를 측정합니다. 그는 배꼽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면 손 끝과 발 끝이 그 원과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또 자세를 바꾸면 정사각형으로도 딱 맞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비율 측정 결과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이 그림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지난 시간에 잠시 언급한 것처럼 전통적으로 원은 천상계에나 있다고 여겨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인간에게도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을 재는 척도와 우주를 재는 척도가 같다는 겁니다! 이와 같은 발견에 고무된 다빈치는 인간이 하나의 소우주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에는 신이 그려져 있지 않지요. 인간 만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이제 인체의 비례 규칙으로 신전을 짓는다는 말의 의미를 음미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그림을 신, 혹은 종교의 지배가 물러나고 이제 인간이 새로운 무대의 주인공으로 떠오르게 되는 시대의 상징물로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새로운 시대에 만물의 척도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 됩니다. 신본주의가 아닌 인본주의(humanism)가 시대정신이 된 것이지요. 그것은 먼 훗날 민주주의로 꽃을 피우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세상을 뒷받침해줄 근거가 있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중세의 신본주의를 지원한 학문적 기반은 신학이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렸으니 새로운 학문이 등장해야 합니다.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그것이 과학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신학의 자리를 과학으로 대체하자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과학은 과연 그의 기대를 충족시켰을까요? 그것이 다음 시간부터 살펴볼 내용입니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남긴 "아는 것이 힘이다(라틴어: scientia potentia est)"라는 말을 한번 쯤 들어봤을 것입니다. 여기서 scientia라는 말이 나중에 과학(science)가 됩니다. 따라서 아는 것이 힘이다에서 "아는 것"은 과학을 지칭합니다.




그림 출처

그림 1: https://pixabay.com/photos/brass-nautical-sextant-692733/

그림 2: https://en.wikipedia.org/wiki/Cabinet_of_curiosities

그림 3: https://ko.wikipedia.org/wiki/베누스의_탄생#/media/파일:Sandro_Botticelli_-_La_nascita_di_Venere_-_Google_Art_Project_-_edited.jpg

그림 4: http://www.news-pap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75551

그림 5: https://ko.wikipedia.org/wiki/비트루비우스적_인간#/media/파일:Da_Vinci_Vitruve_Luc_Viatour.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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