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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10권 쓰며 깨달은 '초고'의 의미

<에세이 글쓰기 수업> 저자 이지니

by 이지니

책 10권 쓰며 깨달은 '초고'의 의미 [글 잘 쓰는 법, 글쓰기 강의]







멈춰 있는 것보다
엉망이라도 흘러가는 게 낫다








'글을 써야지...'




몇 번째 떠올린 마음인지, 나도 셀 수 없다. 노트북을 켜놓고 첫 문장에서 멈춰버리던 날들이 있었다.



‘이 문장 너무 밋밋한데?’

‘좀 더 멋진 표현 없을까?’

‘맞춤법 틀리면 어떡하지?’




그렇게 한숨만 몇 번 쉬다가 노트북 닫고는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니까… 내일 쓰자.” 그 ‘내일’이 1년, 3년, 5년이 되어버리는 것.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경험하는 장면이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글은 감정이 정리돼야 쓸 수 있잖아요.” 그런데 진짜는 반대다. 감정은 쓰면 가라앉고, 글은 쓰면서 명확해진다. 그래서 나는 ‘정리된 나’를 기다리지 않았다. 불안한 채로, 흔들린 채로, 그냥 썼다. 그렇게 흔들리며 쓴 글들이 나를 10권의 작가로 만들었다.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쓰는 사람


많은 사람이 ‘좋은 글’을 쓰고 싶어 한다. 하지만 좋은 글은 대부분 완성된 글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초고는 엉망이어도 된다. 심지어 ‘이게 뭐지?’ 싶은 수준이어도 괜찮다. 실은 나도 아직 초고를 쓰면 “아, 오늘도 개떡 같다….” 싶을 때가 훨씬 많다. 하지만 놀랍게도, 글쓰기를 평생의 일로 삼은 사람들 대부분이 비슷한 고백을 한다. “내 초고는 늘 지저분했다.” 정말 잘 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초고의 완성도’가 아니라 ‘초고를 끝까지 써냈느냐’다. 완성의 기쁨은 늘 ‘끝내는 사람’에게만 열린다.








나는 이렇게 초고를 써왔다



초고를 빨리 쓰는 건 ‘스킬’보다는 ‘리듬’에 가깝다. 나는 10년 동안 글을 쓰며 하나의 루틴을 만들었고, 그 루틴이 전자책 3권, 종이책 7권을 만들어줬다.









1. 손 풀기 필사 : 호흡을 맞추는 시간



비슷한 주제의 글 한 꼭지를 필사한다. 필사는 ‘따라 쓰기’가 아니라 ‘리듬 옮기기’다. 좋은 문장의 호흡을 손끝으로 한 번 스쳐주면 내 문장도 자연스럽게 부드러워진다.



2) 주제 좁히기 : 좁을수록 잘 써진다



주제가 <어제 있었던 일>이라면 중구난방의 글이 나오기 쉽다. 물론 초고 쓸 때 이 말 저 말이 나와도 되지만, 퇴고할 때 그만큼 덜어내고 수정해야 할 게 많아지기 때문에 시간과 에너지가 엄청 소요된다. 퇴고의 시간마저 단축시키고,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싶다면 주제를 뾰족하게 하자. <어제 오후 2시, 10년 만에 만난 친구가 한 말> 이 정도면 곧바로 초고를 쓸 수 있다. 글은 거대한 주제를 다뤄야 하는 게 아니라 작은 순간에 내가 느낀 것을 꺼내면 된다.




3) 방해 차단 : 글의 최대 적은 ‘알림 한 번’



최고의 집중시간은 밤도, 낮도 아니었다. ‘세상이 조용한 순간’이었다. 나는 주로 늦은 밤이나 새벽에 쓴다. 잠든 집, 조용한 공기, 세상이 잠시 멈춘 듯한 느낌. 그 고요함이 글을 끌어올리고, 그 시간엔 생각보다 손이 훨씬 빨라진다. 새벽에 일어나서 글을 쓰는 게 자신이 없거나 시간이 없다면, 단 15분만, 20분만 휴대폰을 반드시! 반드시! 무음으로 하라.


4) 15분 타이머 — 완벽보다 속도


타이머에 15분을 맞추고 그냥 쓴다. 틀린 문장도, 어색한 표현도 모두 그대로 둔다. 중요한 건 속도다. 손이 먼저 움직이면 생각이 따라온다. “아, 이 말은 아까 쓴 그 문장이랑 이어지네?” 이런 흐름이 생기는 순간, 글은 어렵지 않다.









이 루틴이 내 삶을 어떻게 바꿨냐면


처음엔 그저 ‘오늘 한 줄만 쓰자’였다. 그러다 보니 글쓰기가 습관이 되고, 습관이 리듬이 되고, 리듬이 결국 기회가 되더라. 첫 책을 냈을 때 내 삶에 가장 먼저 찾아온 건 ‘돈’도 ‘명예’도 아니었다. '기회'였다. 강연 요청, 잡지사 인터뷰, 교육 프로그램 제안… 이 모든 문을 두드린 건 놀랍게도, 세상에 내놓기 부끄럽던 ‘초고’였다.




사람들은 완벽한 결과물에 감탄하지만 기회를 여는 건 늘 초고의 흔적이다. 엉망인 문장 몇 줄이 내 삶을 이토록 크게 움직일 줄 나도 몰랐다. “문장은 기술로 완성되지만, 책은 끈기로 완성된다.”라는 말이 있다. 정말 그렇다. 잘 쓰기보다 계속 쓰는 사람에게 길이 열린다.







혹시 지금, 쓰려는 마음과 쓰지 못하는 마음 사이에서 서성이고 있다면 여기까지 읽은 당신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글은 누구나 쓸 수 있지만 모두가 쓰진 않는다. 그러니 첫 문장을 쓴다는 건 그 자체로 이미 대단한 용기다. 혹시 모른다. 오늘 쓴 엉망인 초고 한 편이 당신 인생을 다시 열어줄지도.



나는 오늘도 초고를 쓴다. 거지 같아도, 개떡 같아도, 그냥 쓴다. 그게 나를 다음 문장으로 데려다주니까. 당신의 글도 누군가를 데려다줄 거다. 어떤 길로든 말이다. 글쓰기는 기회를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리고 오늘의 엉망인 초고는, 내일의 기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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