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친 것을 다시 들여다보는 '과정에서의 즐거움'
"지겹지 않아?"
전 한번 꽂힌 드라마를 10번, 100번은 보는 요상한 취미가 있습니다. 물론 스토리는 이미 다 알고 있죠. 하지만 볼 때마다 재밌습니다. 지인들은 다 아는 얘기가 뭐가 그렇게 재밌냐며 왜 다시 보냐고 묻습니다. 이유는 별 거 없어요. 다시 보는 게 그냥 재밌으니까.
다들 드라마의 꽃은 스토리가 아니냐고들 합니다. 맞아요. 드라마를 이끄는 가장 큰 힘은 스토리죠. 대부분 스토리를 궁금해하면서 TV 브라운관 또는 컴퓨터, 스마트폰 앞에 앉으니까요. 인간을 움직이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가 바로 '호기심'이란 얘기도 있을 정도잖아요. 드라마는 스토리라는 요소로 시청자들을 매료시키는 게 맞습니다.
그렇지만 스토리를 다 아는 드라마를 왜 다시 보냐고 묻는다면 스토리를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가 신기하고 즐겁다고 답합니다. 드라마를 보는 시점에 생활과 생각이 달라진 만큼 드라마를 보는 '눈'도 달라지기 때문이죠. 과거 그 드라마를 보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니까. 생활이 변하고 내가 처한 상황과 생각, 심리 상태가 달라지면 그 드라마를 받아들이는 태도와 마음가짐도 바뀌니까요. 삶이 바뀌면 꽂히는 대사와 장면도 그때그때 달라집니다. 종합예술의 특성이겠죠.
결국 재방에서 찾는 드라마의 재미 포인트는 스토리가 아닌 다른 곳에 있습니다. 대사의 맛, 연기의 맛, 장면의 맛. 드라마는 스토리 외에도 즐길 요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야기라는 콘텐츠를 영상과 소리, 대사 등 여러 방식으로, 다양한 감각으로 전달하는 드라마의 속성상 첫방, 본방에서는 한꺼번에 이 요소들을 느끼기 힘들어요.
물론 뛰어난 감각의 소유자라면 한 번에 모든 요소를 종합적으로 느끼는 시청자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전 첫방 때 스토리 외에 다른 감각에 집중하기 어렵습니다. 스토리의 힘이 너무 강해서 배우의 표정이나 대사 한 줄이 갖고 있는 여러 의미를 곱씹으며 보기 어려워요. 다음 스토리를 궁금해하면서 보는 게 대부분이죠. 그렇다 보니 상대적으로 다른 요소는 잘 안 보입니다. 재방은 이러한 감각의 전환을 만들어줍니다.
한번 흘러가버린 대사, 다시 붙잡아 곱씹는 맛
드라마는 극 전체가 대사로 이뤄지죠. 대사가 스토리를 이끌어요. 드라마 속 허튼 대사는 없습니다. 씬 속에서 상황을 전개하기 위해, 다음 회에 발생할 일의 복선을 넣기 위해, 캐릭터의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 등등 대사가 갖는 역할은 다양합니다. 다 의미가 있단 뜻이에요. 그만큼 대사를 쓰는 작가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합니다.
그 덕에 많은 시청자들은 대사를 집중해서 듣습니다. 하지만 소리의 특성상 한번 들으면 흘러가버리는 것이 대사이기도 하죠. 한번 시청해서는 대사 한 줄을 곱씹어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드라마를 여러 번 반복해서 시청하다보면 한번 듣고 흘러가버린 대사도 반복해 들으며 그 의미를 생각하게 되죠. 작가가 직접 캐릭터가 돼 수일에 걸쳐 고민 끝에 썼을 문구를, PD와 배우가 활자화된 대사를 음성으로 바꾸기까지의 마음을 시청자도 고민해볼 수 있습니다.
같은 표정도 반복할수록 깊어지는 연기의 맛
누군가를 경멸하듯 쳐다보는 눈빛, 애절하게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호소하는 눈빛 등 시청자를 단숨에 사로잡는 배우들의 연기는 본방보다 재방 때 더욱 빛을 발합니다. 처음에는 눈빛이 주는 첫 번째 강한 메시지만 읽었다면 그 속에 담긴 혼란스러움, 얼굴 근육이 주는 또 다른 메시지가 전달되요. 같은 표정도 여러 번 반복해서 보다 보면 이전엔 보지 못했던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와 얼굴 근육을 볼 수 있게 됩니다.
특히 한 배우가 다른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연기를 선보이는 때가 있어요. 첫방 때도 물론 즐길 수 있지만 다른 작품과 비교해서 보면 더욱 재밌습니다. 대중에게 친근한 모습만 보였던 배우가 순간적으로 광기 어린 표정을 짓는 모습에서 이질적인 감정을 느끼면서도 그 표정을 뜯어보며 배우의 연기와 캐릭터를 이해하는 등 재미가 쏠쏠합니다.
놓쳤던 것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는 장면의 맛
재방을 하다 보면 드라마 장면 곳곳에 숨겨둔 요소를 찾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드라마 제작할 땐 한 장면을 만들기까지 장소 디렉터, 세트 제작자 등등 정말 많은 스텝들이 노력을 쏟죠. 시청자에게 그 씬(scene)이 평생 기억에 남을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만큼 그 장면이 갖는 힘은 어마어마해요.
다시 말하면 그 신 하나를 살펴보는 데만도 시간 투자할 만하다는 것입니다. 드라마를 다시 보다가 꽂히는 신을 멈춰두고 그 장면 속에 들어가 있는 모든 것을 살펴보면 그만큼 재밌는 것도 없습니다. 그 신 주변에 연결될 법한 것을 상상해보는 재미도 있어요. 결국 지나간 드라마를 재방하는 묘미는 놓친 것을 다시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즐겨보는 '지난' 드라마를 소개할까합니다.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좋은 드라마가 있다면 알려주시면 더욱 좋겠죠. 제가 찾지 못한 재미 포인트를 알려주는 것도 즐거울 듯 합니다.
참고/
http://blog.naver.com/bigjhj/2211399488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