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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윤 Jul 28. 2024

글을 더 잘 쓰고 싶다면 '리프레이밍'이 필요하다

글쓰기에 대한 리프레이밍 : 3가지 관점 변화

처음 ‘글다운 글’을 썼던 때


글쓰기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맨 처음 ‘글다운 글’을 썼던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내게는 초등학교 때 쓴 팬픽이 그랬다. 당시 나는 가수 GOD부터 소위 ‘학교 짱’들을 주인공 삼아 이야기를 지어내기 좋아했다. GOD 팬픽은 수십 편을 써서 나와 언니와 친구만 보는 다음 카페에 올리기도 했고, 학교 짱 소설은 각 캐릭터 그림과 특성까지 구체화하며 공책을 빼곡하게 채웠다. 


(이런 걸 보면 사회화하기 전, 원형의 나는 문학 글쓰기에 더 마음을 뒀던 것 같다.)


중학생 때 일기를 다시 살펴보면 그 시절 나는 ‘영화평론가’가 되고 싶다고 적었다. 이미 그 시점에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유명했기 때문에, 그리고 내 나름대로 영화 보길 좋아했기 때문에 영화평론가를 장래희망으로 써뒀던 모양이다.


영화를 좋아하면 영화 만드는 사람, 혹은 배우가 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법도 한데, 영화에 대한 ‘글쓰기’를 하겠다니 나름 일관성 있는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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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캐쉬백>의 한 장면


고등학생 때 공교롭게 이과에 진학하면서 글쓰기는 차츰 무대 뒷편으로 물러났다. 언제부터 글쓰기를 안 하게 됐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나는 글과 무관한, 학업에 매달리는 스무 살로 성장했다. 돌이켜 보면 이후 지망했던 대로 의과대학에 입학해서 정해진 코스를 쭉 밟았다면 지금의 ‘글쓰는 나’는 없었으리라, 혹은 한참 나중에 찾았으리라는 (등골 서린) 상상도 든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던 계기는 23살 무렵이었다.


외적인 계기는 대학교 신문사를 우연히 들어간 것이었다. 나름 영화의 꿈을 잊지 않고 영상 제작 동아리에 들어갔던 나는 사흘 밤낮 없이 영상 편집을 하고선 백기를 든 상태였다. 헌데 신문사는 글을 쓰면 활동비(돈)까지 준다니? 스치듯 봤던 특채 모집 포스터에서 ‘활동비’ 문구를 보고 냅다 지원 버튼을 누르고 면접을 봤다. 


하지만 내적인 계기는 ‘응어리’ 때문이었다. 20대 초반 내 인생을 가득 채운 한 가지 질문을 아무리 애를 써도 떨쳐내려 해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질문이 먼저, 글은 나중에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청년에게 저 질문이 뭐 그리 중요했겠냐만은, 뒤늦은 사춘기는 사춘기를 유예한 한국인들의 흔한 증상이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 고뇌할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게다가 19살 때 친구 2명을, 20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이후로도 상실의 고통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연애는 잦은 실패와 번복을 반복했다. 그냥 살던 대로 살기에는 참 괴로운 나날이었다. 


(10년 가까이 흐른 이제와 돌이켜 봤을 때) 그때 나는 삶의 허무함과 죽음의 두려움을 놓고 혼란스러워 했던 것 같다. 갑자기 오늘 실족사해도 이상할 게 없는 삶이다. 급작스러운 병으로, 어쨌든 최후에 눈을 감는다면 애초에 내게 [남아있는 시간]은 짧디 짧은 찰나 아닌가. 그렇다면 왜, 등교를 하고 취업을 준비하며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살 수 있나. 구태여 그게 무서웠다. 


글쓰기는 이러한 혼돈과 무의미함으로부터 나를 정돈하고 가다듬는 ‘처방’에 가까웠다. 잠들기 전에 미친듯이 불안이 소용돌이칠 때, 풀리지 않는 관계와 상실의 의문 속에서 가쁜 숨을 내쉴 때 (다른 무엇보다도)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도움이 됐다. 자주 “고통에 옷을 입힌다”고 표현하곤 했는데, 내게 글쓰기는 곧 ‘왜’라는 질문에서 비롯된 생각과 감정에 뚜렷한 상을 만드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글쓰기는 그야말로 ‘게워내는’ 작업과 같았다. 그동안 쌓여서 소화하지 못한 감정들, 상념들, 풀리지 않는 질문이 너무 많았다. 그걸 누르고 누르다가 더는 못 찾을 것 같을 때 글이 나왔다. 하루에 글을 3편이 쓰기도 했다. 그만큼 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질문의 체증이 심했다고 볼 수 있다. 스스로 ‘글을 괴롭히는 게 미안하다’고 쓸 정도로 글을 쓰고 또 썼다.  


✏️ 결국 나는 글쓰기를 통해 ‘나의 이야기’를 한 차례 짚고 넘어갈 수 있었다. 질문이 풀리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걸 대하는 나의 자세를 고쳐 앉는 데 글쓰기가 요긴하게 쓰였다. 그리하여 나는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나 자신과 손을 잡을 수 있었다.  
✏️ 이처럼 글쓰기는 ‘할말’이 있을 때 긴밀한 조력자 역할을 한다. 글쓰기를 통해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경험과 사실과 의미를 모아 일련의 순서로, ‘스토리’로 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질문, 할말, 이유가 먼저다. 글쓰기는 보통 나중에 따라온다. 


그냥 아무 곳에서나 앉아서 기사 쓰던 시절


글쓰기는 글 ‘쓰기’가 아니다


허나 글쓰기를 업으로 삼으면서 나와 글쓰기의 관계는 사뭇 달라졌다. 


이전까지 글쓰기는 내 개인의 정리정돈, 나를 드러내 타인과 연결되고 공감하는 매개체였다. 하지만 ‘글밥’을 먹으려면 나를 글로부터 분리할 줄 알아야 했다. 언제까지 나를 소재로 글을 쓸 순 없으니까. 글쓰기를 나라는 어장에 가두면 글쓰기로 먹고 살 순 없는 노릇이었다. 글쓰기 해방이 시급했다. 


마침 글쓰기의 계기가 학교 신문사였다는 점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이후 나는 글 쓰는 일로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언론사에 취직했고, 처음으로 나를 덜어낸 글쓰기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설령 나의 관점이나 경험이 글에 포함될 순 있어도 나의 글쓰기는 철저히 “다른 목적”에 부합해 힘을 발휘해야 했다. 그것이 조회수든, 댓글 반응이든, 이해관계자 압박이든, 영향력이든. 


이쯤 처음으로 글을 ‘쓰는 행위’보다 글을 ‘준비하는 작업’이 더 중요하다는 발상의 전환을 거쳤다. 아무리 잘 쓴대도 나는 일필휘지의 작가도, 명불허전 천재도 아니었다. 문장의 유려함이 내 고과와 무관했다. 애초에 ‘잘 쓴 글’이라는 개념 자체가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주관적인 기준을 따르기 때문에 글을 써서 멋진 문장력과 논리, 상상력으로 승부하는 데 (나의 역량의) 한계가 명확했다. 


헌데 취재에는 한계가 덜했다. 내가 세상에서 최고로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못 될지언정 다각도로 자료를 모아서 글을 풍성하게 만드는 노력을 기울일 순 있었다. 비록 영민하고 기발하고 감각적인 필자들 사이에 내가 끼지 못한다 해도 (독자에게 성의 있는 글을 보여주기 위해) 인터뷰부터 논문 발췌, 통계자료 인용까지 동원하는 것만은 비교적 수월했다. 적어도 '가능'했다.  


✏️ 그래서 이 시기에 처음으로 나는 타고난 내향성을 점차 거스르며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거나 ‘남들이 모르는 정보’를 발굴하기 위해 고민했다. 나의 세계에 갇히지 않은 글쓰기를 하려면 더더욱 다양한 소스를 그러 모아야 한다고 느꼈다. 넉넉하게 잘 다듬은 재료를 놓고 요리에 임해야 나는 나의 한계를 넘어서는 기록을, 이야기를 남길 수 있었다. 
✏️ 이 무렵부터 글을 쓰기 전에 ‘엉망진창 메모 노트’를 먼저 작성하는 습관이 생겼다. 일단 취재한 내용을 최대한 끌어놓고, 나름대로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마다 동일한 색상으로 표시를 해두는 방식이다. 정작 취재를 열심히 해놓고 이걸 하나의 스토리로 말하지 못해 고전할 우려가 있는데, 그걸 방지하기 위해 글쓰기를 위한 밑작업을 열심히 하는 게 나름의 버릇이 됐다. 


물론 귀찮아서 표시를 더 간소하게 하거나 생략하는 경우도 있다(...)


글은 반드시 수정해야 한다


이후 내 커리어는 대중 독자에서 IT 및 스타트업 독자, 블록체인 업계, 숏폼 영상 시청자까지 다채롭게 마주했다. 글쓰기의 결과물도 글, 카드뉴스, 영상, 라이브 방송, 소셜미디어 게시물, 카피라이팅 등 다각화했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더더욱 글쓰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다는 위기감이 들곤 했다. 결국 모든 콘텐츠 작업에서 ‘상대방을 떠올리며’ 글을 준비하고, 쓰고, 그걸 검토하고 개선해서 결과를 만들기 때문이다. 


글쓰기 수업에서는 종종 “반드시 글을 퇴고해야 한다”는 조언이 등장한다. 헌데 퇴고란 무엇일까? 글을 다시 다듬고 고치는 행위를 일컫는 표현인데, 의외로 고사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다. 


과거 당나라의 한 시인이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좋은 시상을 떠올리고 바로 정리했다. 헌데 마지막 시구를 ‘문을 민다’고 해야 할지, ‘문을 두드린다’고 해야 할지 고민이 들었다. 

얼마나 오래 궁리했던지 지나가던 고위급 관료의 행차에 부딪치고 말았다. 시인은 본인이 어째서 길을 비키지 못했는지 자초지종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들은 고관은 오히려 같이 시구를 같이 고민하더니 ‘문을 두드린다’에 한 표를 던졌다. 이후 두 인물은 둘도 없는 글쓰기 친구가 됐다. 


푸하하. 영어를 쓰는 동양풍 그림으로 챗GPT가 생성해줬다.


(위 일화에 대입해서) 개인적으로 퇴고는 “내 글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이는 2가지 측면에서 좋은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된다. 


내 글이라는 이유로 영영 붙잡고 있다간 글이 방구석 메모로, 나 혼자 읽는 일기로 그칠지 모른다. 퇴고는 글쓴이의 망설임과 고집을 달래 그가 더 좋은 글쟁이가 되도록 글쓰기의 프레임을 바꿔준다. (리프레이밍)

타인의 눈으로 글을 고치는 행위 자체가 글을 살린다. 결국 글은 작가의 손에서 태어나 독자의 마음에 남는 법. 스스로 충분히 고민하고 준비해 진솔하게 글을 쓰는 한편, ‘글의 완성’ 이후까지 헤아리는 데 퇴고는 꽤 쓸모 있다. 


그러므로 퇴고는 독자의 입장에 서서, 그가 어떻게 이 글을 보고 무슨 생각과 감정을 얻게 될지 최대한 이해하고자 애쓰며 글을 고치는 정성이다. 


그만큼 글을 수정하고 개선하는 작업은 쉽지 않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속담처럼 편집자, 검열사가 따로 존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퇴고는 글쓰기가 글의 재료를 준비하고 그걸 그럴 듯하게 완성하는 걸 넘어 타인과 비로소 ‘이야기’로 연결되는 한 끗 차이를 만드는 단계다.  


✏️ 허브스팟의 콘텐츠 마케팅 강의에서는 고객을 독자/청자로 놓고 글을 기획-제작-수정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아무리 글을 내가 쓴다 해도 그 글의 끝에는 (우리의 가치를 설득해야 할) 고객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궁극의 글쓰기에는 타인을 극진히 살피는 마음이 필요해진다. 내 글에 찾아온 손님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 나 또한 의미를 얻는 시간과 시행착오가 요구된다. 
✏️ 그렇다면 (나를 주인공으로 삼는) 에세이, 소설이나 각본은 어떻게 봐야 할까. 어떤 글이든 독자의 가독성과 문장 주술 호응 등을 체크하는 기본적인 퇴고 이상의 상상력이 들어간다. 나 자신에게 충분히 솔직 담백해야 비로소 나의 이야기(수필)가 타인에게도 일반화(공명)한다. 소설이나 각본 또한 그걸 보는 타인에게 이 글이 어떠할지 고민하며 퇴고를 거듭한다. 다 [위하는 마음]이다. 


영화 <러브 어페어>


게으른 탓에 종종, 사실 자주 게으른 글을 쓰지만 그럼에도 글을 더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은 숨길 수 없다. 글쓰기를 통해 그동안 내가 얻은 것들이 너무나 많은 까닭이다. 더군다나 글쓰기가 ‘글’ 쓰기, 혹은 글 ‘쓰기’에만 국한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최근 들어 더 많이 하고 있다. 


글을 준비하는 마음가짐부터 글을 가다듬는 고단함에도 ‘글을 쓴다’는 구절에 다 들어가지 않는 수많은 계획과 노동이 들어간다. 이를 통해 화자는 글을 쓰는 이유에 한 번 더 부응하고, 독자는 글쓴이의 글을 재탄생시키는 데 일조한다. 기획과 기록과 전파를 아우르는 일이다. 


그러한 (고락 끝에 오는) 축복이 더 많은 이에게 함께 하길 바란다.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소소하게든 원대하게든 글을 더 잘 쓰고 싶다는 의욕을 만나고 싶다. 그런 눈동자를 더 자주 마주하길 기도한다. 


✏️ 그냥 끝내긴 헛헛해서 참고자료로 허브스팟 콘텐츠 마케팅 강의(무료/온라인)을 남긴다. 추천 받아 듣기 시작했는데, 퀄리티에 놀랐다. 이 강의를 준비한 사람들은 시작점부터 완성, 그 이후까지 얼마나 고민하고 생각하며 시간을 들였을까. 공들인 콘텐츠는 늘 보고 듣고 읽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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