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수리센터에 맡기느라 늦게 회식 자리에 합류하니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구석에 빈자리가 하나보여서 얼른 그쪽으로 가려는데 교장선생님이 앉은 4인 테이블에 홀로 독대하고 있는 우리 학년 막둥이 선생님의 등판이 보였다. (그녀는 어쩌다 그곳에 쓸쓸히 앉게 된 것일까? ) 외로워 보이는 그 등판을 모른 척할 수 없어슬그머니 그녀의 옆자리이자 교장선생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교장선생님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순간 어디 갔다 오셨는지 갑자기 나타난 교감선생님이 교장선생님의 옆자리에 앉았다. (슬프게도 그렇게 우리의 4인 테이블은 완성되었다.) 교장선생님은 나를 보며 말했다.
" 요즘 진로 행사 때문에고생 많지? 그런데 말이야 무엇보다 내가 박 부장을 좋아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건 이 모든 일을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본인이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거야. 맞제?"
" 흠. 맞습니다. 그렇죠!"
나는 씁쓸한 웃음을 머금고 일부러 강하게 인정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혁신학교 진로부장이다. 7월이 되면 다른 학교와 달리 우리 학교는 대규모의 진로 주간 행사를 연다. 우리 학교는 혁신 학교답게 업무에 대한 재량권이 담당자에게 대략 주어진다. 간단히 하려면 얼마든지 간단히 해도 아무도 별 말 안 하고, 크게 벌리려면 또 얼마든지 크게 벌릴 수 있다. 예산도 어느 정도 자유롭게 책정 가능하다. 이 학교에서 4년 동안 진로부장을 하면서 나는 서서히 판을 키워왔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올해는 더욱 일을 크게 벌였다. 관리자는 나의 이런 과한 열정을 당연히 열렬히 환영한다. 그의 나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여기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내가 열정을 부리는 이유는 평범하다. 연례적으로 치르는 뻔한 진로 행사가 싫다. 아이들이 정말 자신의 꿈과 진로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 보자. 미래에는 사라질지도 모르는 식상한 직업 알아보기나 위인 조사하기따위활동이 아니라 정말 나의 꿈을 꾸게 해보자고.
또 나는 동아리 업무까지 맡고 있다. 대학교처럼 초등학교 동아리를 학생들의 손으로 넘겨 활성화시키는 게 나의 꿈이기도 했다. 그 속에서 진짜 자기 꿈이 자라도록. 그래서 작년부터 과감하게 학생들이 만드는 자율 동아리를 학년단위로 구성했고, 올해는 과감하게 학년 구분 없이 동아리 구성을 할 수 있게 했다. 올해 동아리를 구성하기 위해 열린 <동아리 박람회>날, 안 그래도 좁기로 유명한 우리 학교 강당에 처음으로 300명이 넘는 4~6학년 학생들이 모두 모였다. 담당자로서 미처 예상치 못한 혼잡함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지만 각 학년 선생님들이 질서를 잡아주셔서 잘 진행될 수 있었다. 그렇게 2년 차 학생 동아리는 3월 말 화려하게(?) 출범했다. 지금 어떠냐고? 학생들이 동아리 시간을 얼마나 기다리는지 모른다. 대표 학생들은 다음 활동 거리를 열심히 준비하고 교사는 그저 지원만 할 뿐 직접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몇몇 동아리는 활동 준비가 제대로 안 되어서 관리 교사를 힘들게 한다. 그런 말이 들리면 담당자로서 마음이 편치 않다. 몇몇 동아리는 알차고 주도적인 동아리 운영으로 감탄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이런 동아리 대표들을 만나보면 그들의 자부심과 책임감이 눈빛에서 흘러넘친다. 그들이 지금 배운 자신감과 리더십 같은 경험이 그들의미래를 얼마나 빛나게 할 지 기대된다.
어쨌든 7월 진로 주간이 시작되었다. 일주일의 대장정은 담당자에게는 힘든 일정이었다. 6월 말부터 진행된 <생활 속 아이디어 경진대회>를 시작으로, 7월 1일 진로퀴즈대회, 7월 2일 직업체험의 날, 7월 3일 아이디어 경진대회 및 진로퀴즈 결과 발표, 7월 4일 동아리 마켓의 날, 7월 5일 진로특강까지 이어졌다. 진로 퀴즈대회는 꿈을 이룬 사람들의 명언을 퀴즈 형식으로 각 층 복도 곳곳이젤위에 세워 놓으면 학생들이 응모지를 들고 돌아다니며 푸는 것이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복도에 도란도란 둘러앉아 문제를 푼다고 여념이 없다. 2백여 개에 달한 응모지의 답을 확인하는 것도 나의 몫이었다. 14개의 문제 중 마지막 문제인 14번은 내가 성공한 후 남길 명언 한마디였다. 정답이 아니더라도 14번의 답만 모아놔도 꿈에 대한 멋진 주제가 나올 것 같아서 결국 계획에 없던 <나의 명언 전시회>를 추가로 하게 되었다. 문구들 중 45개를 골라서 인쇄한 후 학교 복도 곳곳에 게시했다.
7월 2일 직업체험의 날에는 각 동아리와 관련 있는 직업인들을 매칭해서 초빙하였다. 17개의 동아리에 맞춰 진로지원센터와 교육청, 개별 접촉을 통해 17명의 강사를 섭외하는데 한 달 가까이 걸렸다. 동아리 자체가 스스로의 흥미와 관심속에 자발적으로 모였기에 동아리와 맞는 직업인을 연결해 주는 것이 바로 진로교육이라고 생각했다.
7월 4일 마켓데이. 내가 가장 두려워한 날이다. 마켓을 지원한 일부 동아리가 창업 활동을 하는데, 내가 지도한 동아리인 <텃밭 동아리>도 참가했다. 슬프게도 내가 맡은 3학년은 학생 자율동아리가 아니기 때문에 교사의 계획과 주도로 움직인다. 우리 동아리는 3학년에서도 유명한 개구쟁이 남자아이들이 모여있다 보니(구성이 남 13, 여 4명이다) 이 아이들을 데리고 농사를 짓고, 음식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초보 농부인 나와 키울 생각은 없고 먹을 생각은 가득한 17명의 꼬맹이들이 4월에 심은 감자와 토마토의 수확물은 역시나 결과가 좋지 않았다. 결국 마트에서 감자와 토마토를 한 상자씩 추가로 구입하는 꼼수를 썼다. 어쨌든 그렇게 우리가 생산한 감자와 토마토로 어떤 음식을 만들어 팔지 아이들의 의견을 물었다. 아이들은 <버터에 빠진 감자>와 <아이스 토마토>를 만들어 팔겠다는 야심찬 의견을 내놓았다. 나의 걱정과 달리 아이들은 나름 잘 만들어 냈다. (요리 과정은 나의 손이 80%였으나 레시피는 아이들 의견 100%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상품은 걱정과 달리 순식간에 팔렸다. (맛과 상관없이 초등학교에서만 가능한 음식장사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손님들이 몰려 걱정되었지만 평소에는 대책 없던 아이들이 이날은 정말 의젓하게 땀을 흘리며 물건을 팔고 돈을 받으며 잘 해냈다.(후기에 써낸 글을 보니 아이들이 말은 안 했지만 힘들었다고 한다.) 막내 동아리인 우리 동아리 외에도 4~6학년 동아리인 합창부가 만든 자신들의 노래를 녹음한 cd, 요리부의 카나페와 수박화채, 독서부의 미니 공책과 책갈피, 배드민턴부의 배드민턴 강습회가함께 열렸다. 이렇게 다섯 동아리가 함께한 강당과 복도는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럽고 말 그대로 시장통이었다. 선생님들도 잠시 돌아보다가 엄청난 시끄러움에 도망치듯 지나갔다. 나는 속은 타들어 갔지만 겉으로는 침착한 척 안전에 문제가 없는지 돌아보며 열심히 돈통을 챙겼다. 많이 팔렸지만 워낙 싼 값에 판 것이라 번 돈은 많지 않고, 50%는 기부하기로 했기 때문에 아이들 손에 떨어지는 순수익은 얼마 안 되었다. 하지만 온전히 스스로가 힘들여 번돈이고 그 과정에서의 경험은 돈의 가치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진로 주간 마지막 날 5, 6학년과 학부모 대상의 진로특강이 열렸다. 주변의 우려에도 나는 좋은 강사를 섭외하고자 굳이 서울에 있는 유명강사와 접촉해서 강연 수락을 받아냈다. 비싼 강연비로 인해 학교에서는 여러 차례 회의가 열리고 그 근거 자료를 만드느라 나는 두배의 일을 해야 했다. 비싼 강사를 부른 만큼 강연의 질도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무사히 진로주간을 마쳤다. 일하다 보면 가끔 허무에 빠진다. 매번 문자 폭탄을 전체 선생님들에게 날리면서 미안해지고, 선생님들의 격려와 응원이 부담이 되기도 하고, 과연 속으로도 그렇게 생각할까 혹시 너무 벌인다고 생각하지 않을까하는 소심함이 고개를 들기도 한다. 아이들은 나의 노력처럼 정말 진짜 꿈을 꾸게 될까? 모든 일이 끝났을 때의 허무함은 이런 복잡미묘한 감상과 함께 텅 비어버린 내 가슴을 쓸고 지나간다.
행정실에서는 진로 행사로 인한 예산 관련 업무 폭주로 표정이 좋지 않고, 마켓을 신청한 동아리를 관리하는 교사 중 누군가는 힘들었다는 이야기가 다른 사람을 통해 나에게 전달된다. 경비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려면 서류를 잘 만들어야 한다고 관리자와 행정실장은 걱정스럽게 신신당부한다.
나는 왜 이 고생을 사서 할까? 좋아서? 맞다. 내가 생각한 일이 현실로 실현되는 모습을 보니까. 하긴 이번 진로퀴즈 문제 중 하나처럼 '위대한 일을 해내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라는 말처럼 내 일을 사랑하기 때문에 힘들어도 힘들지 않게 달려온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아이들의 꿈을 키우는 것을 나의 꿈으로 삼으면서도 정작 50이라는 나이가 무색한 한 진로교사는정작 자신의 진로와 꿈은여전히혼돈속을 걸으며자꾸만 길을 잃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