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토 형님과 어린 딸이 준 메시지가 나를 움직이게 한지 딱 반년만이었다. 거친 숨결 너머로 내 안의 열정이 간질대듯 꿈틀거렸다. 달리며 점점 기분이 좋아지고 자연스럽게 대학교 때 육체적으로 가장 힘들었을 때가 생각났다.
자전거동아리에 참가해 전국 국토 순례를 떠났다. 각자 20kg이 넘는 배낭을 둘러메고 노숙도 해가며 며칠째 한여름 태양 아래 대지를 달렸다. 늦은 밤 시골길 비포장도로를 동기들과 걸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머리 위로 내가 지금껏 보았던 별보다 더 많은 별빛이 가득했다.
친구 어머니가 차려주신 토종닭 백숙에 웃음꽃이 가득했던 밤. 대문 옆 외양간 황소도 ‘음머’ 하며 함께 웃어 주었던 날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우리는 함께 달리고 또 달렸고 서서히 지쳐갈 무렵 정말 피하고 싶었던 육십령고개 앞에 도착했다.
차들도 힘겹게 기어오르던 그 길. 가파르고 구불구불 이어진 고갯길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난 죽을힘을 다해 페달을 밟았다. 너무 지쳐 자전거에서 내려서 걷고 싶었지만, 그것은 포기를 의미했다.
두 발을 자전거 페달 위에 둔 채 한 손으로 난간을 붙잡고 쉬고 있을 때였다. 급경사를 오르느라 묵직한 굉음을 내던 버스가 나를 지나쳤다. 그때 버스 안 승객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처음 본 나를 위해 엄지를 세워가며 응원을 보냈다. 뒤따르던 차 창문이 내려갔고 “힘내요. 파이팅!”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시선을 돌려 그쪽으로 보았을 때 그 목소리의 주인공과 눈이 마주쳤다.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페달 밟을 힘이 생겼다.
육십령고개 그 끝도 없는 경사를 포기하지 않고 오를 수 있었고 정상에 도착하자 온몸이 짜릿했다. 그때 그 사람들이 보내준 따뜻한 응원 덕분이었다. 그 당시엔 러너스 하이가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하지만 달리기를 마친 이 순간, 다시 그힘차던 그날로 돌아간 듯했다. 달리기가 사람에게 얼마나 큰 에너지를 되찾아 주는지 처음 경험했던 순간이었다.
며칠 뒤 아침 달리기를 마치고 전신 거울 앞에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모습이 조금은 괜찮아 보였다. 꾸준히 달렸다는 것만으로도 내 삶이 조금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느껴졌다. 그 꾸준함의 원동력에는 러너스하이가 있었고 그 매력을 느껴 본 사람들은 말했다.
“신나게 달리며 밀려드는 짜릿함.”
“황홀감에 도취된 상태.”
“살아 있어서 행복해.”
“혼자이지만 세상 모두와도 연결된 것 같아.” 등등 다양했다.
러너스 하이 (Runner's High)는 장시간의 유산소 운동 이후에 느껴지는 긍정적이고 황홀한 심리적 상태를 말한다. 이는 뇌에서 엔도르핀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면서 발생하며, 통증 완화, 스트레스 감소, 기분 고양, 몰입감 등의 효과를 동반한다.
러너스 하이는 일반적으로 체력의 한계를 넘어서 지속적으로 운동을 수행할 때 나타난다. 이는 단순한 운동의 기쁨을 넘어, 일종의 명상적이고 초월적인 경험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의 첫 번째 러너스 하이는 마치 달고나 같았다.
'뜨거운 불에 설탕을 녹이다가 베이킹소다를 넣으면 하얗게 거품처럼 부풀어 오른다. 휘휘 젓다 보면 내 마음도 점점 달뜨다가 침이 고인다. 딱딱하게 굳은 겉면을 살짝 깨물면 바삭하면서도 부드러운 조각이 혀에 닿는 순간 사르르 녹아내린다. 은은한 쓴맛과 고소함이 더해진 강렬한 단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내 첫 번째 러너스 하이는 바로 달고나 맛이었다.
단번에 매료되고 말았다.
두 번째는 ‘저기, 지나가는 낯선 사람과 반갑게 인사하면 그도 나를 반갑게 대할 것이다.’와 같은 열린 마음이었다.
세 번째 느꼈을 때는
‘와 이 멋진 세상에, 살아 있어 얼마나 행복한가.’ 소리치고 싶었다. 러너스 하이는 성취감과는 조금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