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볼 때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건 버텨온 시간과 견뎌낸 여정, 그리고 결국 이뤄냈다는 작은 성취감이다.
나는 서른셋에 결혼했다. 동양화를 전공하고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며, 꽤 규모 있는 회사의 디자인 팀장 자리까지 올랐다. 그렇게 경력을 쌓아가던 어느 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남편을 따라 미국에 오기로 결심했다.
남편은 더 깊이 공부하고 싶어 했고, 그 길에는 박사 학위가 필요했다. 여러 선택지 끝에 그는 미국을 택했고, 나는 그의 선택에 자연스레 발걸음을 맞췄다.
하지만 내 주변 사람들은 쉽게 말하지 않았다.
“너 나이에 미국에 가서 뭘 할 수 있겠니?”
“팀장까지 했는데, 그걸 그만두고 미국 가면 더 잘될 수 있을까?”
나 역시 두려움이 없었다면 거짓이다.
매일같이 갈까, 말까.
이대로 만족하며 사는 것이 정말 삶일까, 아니면 새로운 땅에서 도전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까.
이미 서른을 넘긴 나에게 새로운 시작이 남아 있을까.
그렇게 나는 F-2 비자를 가진, ‘누군가의 배우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아이는 겨우 세 달 된 갓난아기였고, 나는 전업주부가 되었다. 한국에서 다니던 회사를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만둘 수 있었던 건, 그때의 나는 남편의 꿈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땐 모든 것이 신기하고 새로웠다. 아이와 함께 맞이하는 낯선 풍경은 마치 또 다른 세상을 탐험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친구도, 가족도 없는 땅에서의 독박 육아는 점점 나를 지치게 했다. 늘 연구실에 매여 있는 남편을 대신해 아이와 하루 종일 보내는 시간, 그리고 매 끼니를 준비하며 채우는 반복된 일상 속에서, 나는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크게 다가온 벽은 영어였다.
아이와 단둘이 지내며 답답함을 달래기 위해 매일 마트를 걸었다.
어느 날, 마요네즈를 사기 위해 “Do you have a 마요네즈?”라고 물었지만 점원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두유 해브 어… 매요눼즈?”라고 발음을 굴려가며 물었지만, 여전히 알아듣지 못했다.
결국 집에 돌아와서야 마요네즈의 정확한 발음이 ‘매요(mayo)’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작은 사건 하나가 내 안에 숨어 있던 자신감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시간을 기쁘게 받아들이려 애썼다. 새로운 세상에 겁 없이 뛰어들던 나의 본성을 믿고 싶었다.
우리는 모아둔 돈으로 차를 샀고, 매달 100만 원이 넘는 월세를 내야 했다. 남편의 박사과정 첫해 월급은 약 200만 원 남짓. 집세를 내고 나면 남은 돈으로 분유와 기저귀, 그리고 우리의 하루하루를 겨우 이어갔다.
첫해에는 어시스턴트십조차 받을 수 없었다. 어시스턴트십을 받으면 학비가 절반으로 줄고 생활비도 지원되지만, 우리는 그 혜택을 기다리며 1년을 온전히 자비로 견뎌야 했다. 그 한 해 동안, 우리가 모아둔 돈은 거의 바닥이 났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미국에 온 많은 학생들이 어떻게 그 막대한 학비를 감당하는지. 그때 우리가 낸 1년치 인터내셔널 학비는, 내가 한국에서 4년 동안 다닌 대학 등록금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다행히 1년이 지나고, 남편은 어시스턴트십을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숨통이 트였고, 우리의 첫째가 한 살이 될 무렵에는 아이오와라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 조금씩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때는 몰랐다. 남편의 공부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렵고, 졸업까지는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남편이 얼마나 큰 무게와 스트레스를 홀로 감당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짐을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을까 고민하던 나는 결국 하나의 결론에 닿았다.
“아, 나도 뭔가를 해야겠다.”
그렇게 고민의 끝에서 떠오른 답은 공부였다.
나 역시 새로운 길을 걸어야겠다는 결심.
그 결심의 첫걸음으로, 나는 미국 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영어 시험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