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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리 Jan 02. 2022

아파트 마을의 역설

25평 전셋집에서 행복하게 살기

두돌이 된 아가는 16층 우리집 베란다에서 창문 밖을 내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밤이면 건너편 아파트에서 불빛이 깜박이는 광경을 특히 흥미롭게 지켜본다. 간혹 내부가 들여다보이는지 “미끄럼틀이 있네” 하면서 손가락질을 한다.  


훔쳐보는 건 옳지 않지만 보지 않으려 해도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애써 눈을 돌릴 수밖에. 세상 산 지 2년 된  아이에게 타인의 사생활을 지켜줘야 한다는 점을 일찌감치 가르칠 수밖에 없는 환경인 거다. (다행인 건가...)


우리 그만 보자” 아가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며 슬쩍 곁눈질한 바깥 풍경은 현기증을 일게 했다. 우리 집과 똑같은 크기, 똑같은 구조에 비슷한 모양새의 살림살이를 갖춘 집들이 하늘 위로 층층히 쌓여 있는 모습.   


"부엌위에 부엌있고 부엌위에 부엌있는 / 아파트 아파트마을 아파트마을

마루위에 마루있고 마루위에 마루있는 / 아파트 아파트마을 아파트마을"


문득 16년 전 중학생  배운 노래가 떠올랐다. 아가에게 불러주니 제법 관심을 보였다. 신나게 노래를 부르면서 머릿속으론 정 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언젠간 고층 아파트 생활을 끝내고 싶다고. 아주 먼 미래에나 겨우 가능한 얘기겠지만.


커텐을 치지 않으면 일거수 일투족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너무나 가까운 동 간격. 노래 가사처럼 ‘부엌 위에 부엌 있는’ 일률적인 구조. 아파트를 마주하면 ‘삶’보다는 ‘사육’이란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가끔 절벽 위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아파트 한 개 층의 높이는 2.4~2.6m 정도 된단다. 10층이면 24m, 20층이면 최소 48m인 거다. 까마득한 높이의 이곳에서 우리는 잠을 자고 밥을 먹고, 하루를 보낸다.  


평소엔 실감하지 못하다가도 베란다 창문을 열 때마다 호흡을 가다듬게 된다. 쉽게 뜯기는 방충망과 쉽게 넘을 수 있는 난간 너머로 수십미터의 낭떠러지가 펼쳐지는 아찔한 구조.


나만 느낀 건 아니었나보다. 서방 국가에선 60년대부터, 우리나라에선 초고층 아파트가 빠르게 확산된 90년대부터 관련 연구가 활발히 진행됐다. 명확히 인과관계를 따지기는 어렵지만 고층에 거주할 수록 우울증이나 조현병 같은 정신질환이 발생할 확률이 높다는 결과들이 쏟아졌다. 특히 취학 전 아이의 경우 사회적, 심리적 발달에 악영향을 준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당장은 선택권이 없다. 전세 계약이 끝나면 우리 가족은 또 서울을 뒤덮은 고층 아파트 중 어딘가에 정착하겠지. 그나마도 들어갈 자리가 생기면 다행이다. 전세값은 연일 고공행진 중이다. 주거 환경 따위를 논하는 건 사치일 수 있다.   




쓰고 보니 너무 우울한 얘기만 했다. 이제 엄마의 특기를 발휘할 때가 왔다.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직업적 특성 때문에 난 대체로 염세적인데다 가벼운 우울증세까지 있다. 하지만 그게 내 일상을 완전히 삼키지 않도록 하는 방법도 잘 알고 있다.  


고층인 우리 집에선 환한 달과 반짝이는 별이 비교적 잘 보이는 편이다. 아가는 나와 담요를 두르고 베란다에 앉아 별과 달에게 인사하는 걸 즐긴다.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모습을 드러내면 신이 나서 나를 베란다로 이끈다. 최근엔 "저거봐! 별이 떴어. 정말 아름답다!"라고 외쳐 남편과 나를 감동하게 만들기도 했다.


산타 할아버지의 존재를 어렴풋 알기 시작하면서 "산타 할아버지에게 소원 빌러 가자"라며 베란다로 달려나가기도 한다. 산타가 썰매를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을 책에서 본 거다. 그 작은 머리로 온갖 상상을 하며 아무것도 없는 컴컴한 밤하늘을 진지하게 올려다 보는 천사같은 모습.


별도 달도 뜨지 않는, 혹은 보이지 않는 날도 물론 많다. 아가는 낙담하지 않는다. "달님이 맘마 먹으러 갔나보다." "마트에 갔나보다." "딸기우유 사러 갔나봐." 라면서 다음을 기약한다. 따지기 좋아하고 염세적인 이 엄마도 이 때 만큼은 아이와 진심으로 상황극을 즐긴다.


그렇게 아가와 소곤거리고 나면 다소 기괴해 보였던 아파트 마을도 꽤나 정감있게 느껴진다. 앞동 18층 할머니네, 옆동 5층 개똥이네...불 켜진 집집마다 누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살아가는지 살풋 궁금해 진다. 잃었던 인간성을 되찾는 느낌이라고 할까. 우리의 하루가 척박하고 고되고 지쳤을 지라도 이 좁디 좁은 보금자리에서 저마다 하루에 행복 하나 쯤은 만들어나가고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그러고 보니 '아파트 마을'의 또 다른 구절이 떠오른다.


"창문마다 불을 켜고 창문마다 웃음이 새는 / 아파트 아파트마을 아파트마을 / 이웃이 포개어진 아파트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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