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챘겠지만 나는 911호에 살았는데 이사 들어올 때 남편이 말했다.
“하필 왜 테러 난 날이랑 같냐, 재수 옴 붙는 거 아냐, 씨발.”
난 그 말이 어찌나 끔찍한지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씨를 발라내다니! 테러도 끔찍하지만 나는 씨발이라는 말이 늘 끔찍해서 그 말을 들으면 몇날며칠을 사무치게 끔찍해했다.
살인마 오광춘이 소나 돼지를 잡고 난 뒤 부위별로 칼질하듯 살인한 시신을 126개로 발라냈다는 그 엽기적인 사건을 접했을 때처럼 누군가 내 몸을 다 발라낸 뒤 비닐봉투에 담는 광경을, 육신을 빠져나온 내 영혼이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오른 팔은 이 봉투, 왼쪽 다리는 저쪽 봉투, 심장 따로, 간 따로. 이런 식으로 내 몸이 까만 비닐봉투에 피를 뚝뚝 흘리며 담기는 모습이 연상되는 것이다.
지금 나는 세 번째 신호등 앞이다.
나는 신호대기 때마다 멀뚱멀뚱 앞만 쳐다보는 것이 하도 지루하길래 페이스북에 포스팅해놓은 내 소설을 언제부턴가 휴대폰으로 읽고 있다. 말하자면 퇴고인 셈이다. 읽어도 읽어도 손 볼 곳이 눈에 띈다.
조금 전 읽은 소설의 제목은 <우리는 행복해야 해>이다, 나의 열 다섯 번째 소설.
아랫집에서는 다투는 소리보다 우는 소리가 자주 들렸는데 우리 집에서는 우는 소리보다 다투는 소리가 자주 들렸을 거다. 나는 남편과 다투는 소리가 신경 쓰여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1층에 내려갈 때마다 아파트 베란다 쪽을 쳐다보며 창문이 열린 집에서 새어나오는 소리에 귀 귀울이곤 했다.
어느 날 어느 집에선가 개구쟁이 아이들을 잡는 소리가 너무도 또렷이 들리길래 우리가 악다구니 쓰는 소리도 당연히 새어 나오겠다 여겼다.
그 후 나는 다투기 시작할 때마다 베란다 문과 방의 창문을 항상 닫았다. 다투다가 내가 베란다 문을 닫기 위해 일어나면 남편은 어디가노! 라며 더 크게 악을 썼다. 어차피 그 무렵 나는 남편에게 점점 더한 미친년이 되어가고 있었으므로 신경 쓰지 않았다. 뭐 하는 짓이고 그게 그리 중요하나!!!! 라며 또 다시 그는 악을 썼지만 역시 난 개의치 않았다. 그러면 남편은 더해졌다. 난 폼생폼사이기 때문에 내가 점점 그런 식으로 무너져가고 있는 걸 참기 힘들었다.
언젠가 남편과 크게 다툰 다음 날 윗 층에 사는 아주머니와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는데 평소에 늘 나에게 환하게 웃어 주시던 분이 그 날은 나를 쳐다보지 못하셨다. 나는 몹시 수치스러웠다. 그 전날 남편은 주먹으로 벽을 쾅쾅 치기도 했고, 빗자루 같은 걸 던지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아랫집 여자처럼 울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랫집에서 우는 소리가 멈춘 건, 아침 출근길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던 아랫집 아저씨가 사라진 뒤부터이다. 그 후 세 모녀는 그 집에서 조용하게, 우는 소리 없이 계속 잘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그 집에서 이사 나올 때까지 내 눈을 쳐다보지 못하는 건 여전했다. 난 아랫집 여자처럼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사람들 눈도 못 쳐다보느니 차라리 이사 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한참 뒤 나도 아랫집 여자처럼 그렇게 된 후 집이 안 팔려서 2년 쯤을 윗 층 아주머니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 채 살아야 했다. 같은 처지가 되고 나니 아래층 여자가 왜 내 눈을 쳐다보지 못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윗층 아저씨는 의사였다. 의사씩이나 되는 사람이 왜 이렇게 후줄근하고 오래된 아파트에 사는지 몰랐지만, 일요일 오전이면 윗 층에서는 가끔 바흐나 모차르트 음반을 틀었다. 우리 집까지 스피커가 쿵쿵 울리는 걸로 봐서는 수천만 원 한다는 스피커가 있을지도 몰랐다.
윗층 아주머니에게서 나던 냄새와 아랫층 아주머니에게서 나던 냄새가 다른 걸로 봐서 남편의 직업이나 본인의 직업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그땐 했었다. 그리고 나에게선 어떤 냄새가 나는지도.(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