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우울증이라구요?

by 동자

약을 먹고 있다. 얼마 전부터 많은 것들이 기억나지 않았다. 했던 말을 또 하고, 들었던 것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빤히 알던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일이 반복됐다. 오후 세시쯤 아까 점심에 뭘 먹었는지 기억이 안 났다. 평소 덜렁대기는 했어도 나는 이 정도로 기억을 못 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상했다. 퍽 잘 읽어 내려가던 책도, 글도 읽히지가 않았다. 집중력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이게 말로만 듣던 성인 ADHD인가..?', '어디에선가 건망증은 우울증의 증상이라는 말도 들었는데...'

불편함의 강도가 점차 강해질 때 즈음, 병원을 찾았다. 신경정신과였다. "ADHD 검사를 하고 싶어서요. 기억이 잘 안 나고, 집중력도 떨어지고, 텍스트가 잘 안 읽혀요. 건망증이 심해진 게 우울증인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증상들을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왜 검사를 하려고 하는지 물으셨다. 요즘 힘든 일이 있는지, 요즘 화두가 무엇인지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그러더니 해달라는 검사는 안 해주시고, 우울증 약을 처방해주신다. 안정제와 함께.


사실은 놀랐다. 우울이 나를 엄습하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부정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병원에 다시 돌아가고, 매일 펑펑 울다가, 울고 또 울다가 어느 날부터는 울지 않게 되었으니까. 나는 이제 울지 않으니까, 슬픔도 그렇게 멀어져 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울지 않았던 것은, 더 이상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고통스럽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멀리 묻어둔 채 고개를 돌리는 것이 편하니까. 그러니까 나는 고개를 돌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소처럼 신나게 공연을 보고 춤을 추고 방방 뛰고 깔깔대며 농담을 하다가도, 집에 가서는 펑펑 울었다. 눈물이 나지 않을 때까지 울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픈 줄도 몰랐다.


할머니를 모셔왔을 때의 내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 고통과, 할머니가 없을 때 나의 정신적 고통은 비등비등했다. 할머니 없는 삶을 떠올려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내 눈앞에 펼쳐지자,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할머니의 빈자리를 어떻게 메꾸어야 하는지, 어느 하나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일들이 없는 일인 양 외면하는 일,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일, 그런 것들 뿐이었다.


그게 내 마음에 우울을 키웠겠다. 이제 와서 깨닫는다. 텅 빈, 할머니 침대가 놓여있던 자리를 보고서도 눈물이 나지 않을 때까지, 눈에서 눈물이 더 이상 흐르지 않는 대신 마음이 수없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짐짓 모른 체하면서, 마음이 짓무를 때까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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