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이방인』과 애니매이션 『몬스터』 분석해보는 허무주의와 회색지대
1980년대 독일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일본인 의사 텐마와 연쇄살인마 요한 사이의 추격전을 그린 심리 스릴러이다. 천재 외과의사 켄조 텐마는 응급실에서 시장과 어린 소년 사이의 선택을 강요받는다. 텐마는 “모든 생명은 평등하다”는 신념으로 시장보다 먼저 병원에 도착한 소년, 요한 리베르트의 생명을 구한다. 그러나 그의 선의는 역설적으로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 텐마가 살린 소년 요한은 자라나 연쇄살인마가 되어 다수를 무참히 살해하고, 텐마에게 “당신은 나를 살려준 부모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선의의 행동이 악행을 낳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선과 악의 경계는 무너지고 절대적 진리가 부재한 “회색 지대”가 펼쳐진다. 직업윤리에 기대어 잘못이 없다고 변명했어도 그 누구도 쉽게 잘못이라고 지적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텐마는 방황한다. 결국 텐마는 의사를 그만두고 자신의 손으로 요한을 막기 위해 긴 여정을 시작한다. 그가 쉽게 선악을 구분하지 않고 고민과 방황하는 태도는 눈여겨 볼 점이다. 이야기 전반에 걸쳐 그는 만나는 사람들의 부서진 관계를 하나씩 복구하며 다닌다. 이에비해 요한은 사람들의 관계를 파괴하고 생명을 경시하는 허무주의적 악마로 그려진다. 작품은 이러한 대비를 통해 인간존재의 가치와 도덕적 딜레마를 탐구한다.
『몬스터』는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1942년 출간된 이 소설은 알제리의 평범한 사무원 뫼르소를 주인공으로, 부조리한 세계와 인간 삶의 무의미함을 그리고 있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도 울지 않고, 우연한 충동으로 살인을 저지른 후에도 특별한 죄책감이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사회와 타인의 기대에 무관심하고 극도로 냉소적·허무적 태도로 일관한다. 결혼이나 승진 같은 제안에도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반응을 보이고, “사랑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세속적 가치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습에 사회는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괴물” 취급하지만, 사실 뫼르소는 의도적인 악인이 아니라 삶의 본질적 무의미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인간이다. 카뮈는 이 인물을 통해 합리적 질서나 절대적 의미가 부재한 세계, 즉 부조리한 현실을 보여주며, 인간이 마주한 허무를 정직하게 드러낸다. 『이방인』의 핵심 주제는 세상의 무의미와 삶의 부조리(Absurd)이며, 소설은 주인공이 결국 그 부조리를 깨닫고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두 작품 모두 허무주의(무의미에 대한 인식)를 주요 모티프로 삼지만, 그 나타나는 방식과 인물들의 반응은 극명히 대조된다.
요한 리베르트는 작품 속에서 철저한 허무주의의 화신으로 그려진다. 그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와 실험체로 자란 과거는 그에게 삶의 본질적 불공평함을 깨닫게 했다. 요한은 “모든 생명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잔혹한 진실을 어릴 때부터 체득했다. 실제로 요한은 어머니가 쌍둥이 중 자신이 아닌 여동생 안나(니나)를 실험시설로 보낸 사건을 겪으며, 삶과 죽음이 무작위적 선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때부터 요한은 “세상에 태어난 생명은 그저 하찮은 먼지에 불과하며 존재로 셈할 가치조차 없다”고 여길 만큼 극단적인 허무주의에 빠진다. 그는 자신과 여동생 안나를 제외한 모든 존재를 없애는 것을 목표로 삼고, 인간의 관계와 공동체마저 무가치하게 여긴다. 이러한 세계관 때문에 요한은 살인을 저지를 때조차 직접 손을 더럽히기보다는 타인의 마음을 조종하여 서로를 파괴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그는 다른 살인마를 조종해 목표를 제거하게 하고, 심리조작으로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유도하는 등 “사람의 심리를 통해 살인을 완성하는 예술”과 같은 행태를 보인다. 또한 요한은 “관계의 말살”이라는 방식을 쓰는데, 목표한 인물을 죽이기 전에 그 사람 주변의 모든 소중한 인물들을 하나씩 없앰으로써, 대상이 완전한 고독 속에 절망하도록 만든 후 마지막에 목숨을 빼앗는다. 이는 그 대상에 관한 모든 기억과 흔적까지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행위한다. 요한은 인간 사회의 유대 자체를 파괴함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말살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 악행 이면에는, “인간은 죽음 앞에서만 평등하다”는 왜곡된 신념이 자리한다. 실제로 요한은 텐마에게 자신을 쏘라고 유도하며, 죽음만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을 똑같이 만들어주는 유일한 해방이라고 여긴다. 요한의 삶의 태도는 이처럼 공허와 파괴로 일관하며, 그는 스스로도 “내 안의 몬스터”에 잠식되어 완벽한 허무를 향해 나아간다.
요한과 대조적으로, 켄조 텐마는 『몬스터』에서 인간 생명의 의미와 도덕적 신념을 끝까지 붙드는 인물이다. 앞서 언급했듯 텐마는 “모든 생명은 귀중하다”는 이상을 좇아 요한을 살렸지만, 그로 인해 자신이 구한 생명이 타인의 생명을 앗아가는 끔찍한 현실에 직면한다. 이는 텐마에게 극심한 죄책감과 도덕적 혼돈을 안겨주지만, 그는 끝끝내 인간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다. 요한을 추적하는 여정에서 텐마는 피해자들과 주변 인물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의 망가진 삶과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범죄로 인해 마음에 상처 입은 사람들의 사연을 들어주고 돕는 등 연대와 공감을 실천하며 다닌다. 아이러니하게도 텐마 자신은 요한을 막기 위해 총을 들고 괴물(살인자)이 되려는 결심까지 하지만, 막상 마지막 순간에는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 그는 요한 안에 괴물과 인간이 공존함을 알았기에, 괴물을 죽이고자 인간까지 함께 죽이는 것을 망설인 것이다. 결국 요한을 쏜 것은 우연히 그 자리에 있던 한 평범한 아버지였고, 이 장면은 “괴물을 막기 위해 꼭 괴물이 될 필요는 없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텐마는 다시 한 번 의사로서 요한의 목숨을 구해내며,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증명한다. “버려도 좋은 생명은 없다”는 것이다. 요한마저 살려낸 텐마의 선택은 요한의 지독한 허무주의에 균열을 낸 결정적 사건으로 볼 수 있다. 결국 텐마의 삶의 태도는 요한의 허무와 대비되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인간다움과 생명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뫼르소는 요한처럼 폭력을 휘두르거나 거창한 이념을 설파하지는 않지만, 그 내면의 태도 만큼은 철저히 허무주의적이다. 뫼르소는 세상의 관습이나 타인의 기대를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는 인물이다. 그는 삶에서 가족애, 사회적 성공, 도덕적 판단와 같이 흔히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큰 의미가 아니다. 어머니의 죽음에도 그는 울지 않고 담배를 피우며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고, 연인 마리가 청혼했을 때도 “그녀가 원하면 결혼하겠다. 사랑이란 말은 별 뜻이 없다”고 답한다. 직장 상사가 파리에 발령 내주겠다는 제안에도 그는 “일은 지금이나 거기서나 별 차이 없다”며 무심히 거절한다. 이러한 태도는 뫼르소가 삶의 모든 선택과 사건을 결국 무가치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뫼르소는 회상에서 “공부를 그만두던 순간 모든 것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걸 빨리 깨달았다”고 말하며, 세상의 질서나 자기 인생의 계획이 무색해진 경험을 털어놓는다. 뫼르소의 무감각하고 냉한 모습은 어찌 보면 요한의 살의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표출된 허무주의라 할 수 있다. 요한이 적극적으로 세상을 파괴하며 허무를 외친다면, 뫼르소는 세상이 본래 무의미함을 조용히 수용하고 그저 주어진 감각적 현재에만 반응 한다. 이는 그가 알제리 해변에서 해묵은 갈등도 없이 낯선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이게 된 장면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뫼르소는 그 순간 내리쬐는 태양과 땀, 권총의 존재에 이끌려 방아쇠를 당겼고, 이후에도 자신이 왜 그랬는지 깊이 성찰하지 않는다. 결국 그는 살인 혐의로 재판에 서지만, 법정에서 문제로 여겨진 것은 그의 반사회적 태도였다. 검사는 “이 인간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냉혈한” 이라며 뫼르소를 도덕적 괴물로 규정하고 엄벌을 요구한다. 사회는 뫼르소의 감정 결여와 무신앙을 용납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흉악범보다도 더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한다. 뫼르소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거짓을 꾸미거나 뉘우치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데, 이는 그의 솔직한 허무주의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끝내 그는 사형 선고를 받지만, 마지막까지도 종교나 회개를 거부하고 자신이 느끼는 대로만 반응한다. 이러한 뫼르소의 태도는 일견 반사회적이고 비도덕적으로 보이지만, 카뮈의 철학적 의도에서는 오히려 인위적인 의미 부여를 거부한 진실한 인간으로 해석된다. 뫼르소는 세상의 부조리에 순응하거나 반항하는 대신, 담담히 마주 보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담백한 허무주의를 체현한 셈이다.
『몬스터』와 『이방인』은 삶의 무의미 앞에서 각각 매우 상반된 대응 방식을 보여준다.
『몬스터』는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낸다. 작품 속에서 요한이 구현하는 허무와 악을 결국 이겨내는 힘은 다름 아닌 인간관계와 연대에서 나온다. 요한은 모든 인간관계를 파괴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지우고자 했지만, 텐마와 안나 같은 인물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요한과의 유대를 완전히 끊지 않는다. 다만 그의 잘못을 지적할 뿐이다. 요한이 저지른 죄악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텐마는 두 번째로 요한의 목숨을 구했고, 안나(여동생) 역시 마지막까지 오빠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러한 조건 없는 관계의 지속 자체가 요한에게는 일종의 충격이자 새로운 경험이 된다. 그가 무가치하다고 여겼던 하나하나의 생명들이 모여 만들어낸 관계의 힘을 처음으로 목도한 것이다.
결국 요한의 내면에 있던 “괴물”은 이러한 관계성과 연민의 빛 앞에서 자취를 감춘다. 작품의 결말부에서 텐마는 요한의 친 어머니를 찾아 그녀가 요한에게 지어주려 했던 진짜 이름을 알아내고, 혼수상태의 요한에게 “너에게는 이름이 있어”라고 들려준다 . 비록 작품에서는 그 이름을 밝히지 않지만, 이름 없는 괴물로 살았던 요한이 이름을 되찾으며 그가 상실했던 정체성과 인간성이 그의 내면에서 발견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텐마는 바로 그 순간에 요한의 마지막 질문이자 시험을 받는 환영을 보게된다. 그 환영에서 요한은 어릴적, 요한의 어머니가 실험체로 보내질 아이로 안나(여동생)을 선택한 것은 자신을 사랑해서 안나를 선택한 것인지, 자신과 안나를 헷갈려서 선택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그의 냉소적인 눈빛이 텐마의 눈을 차갑게 응시하는 환영이다. 하지만 이것은 말그대로 요한의 환영이며 텐마는 거친 호흡과 함께 그 환영에서 깨어나며, 눈을 감고 병상에 누워있는 요한이 보인다. 비록 한영이었지만, 텐마는 그 환영을 통해 어린 요한이 느꼈던 고통과 공허를 이해하는데 한 걸음 더 내딛게 된다. 이후 요한은 병실에서 자취를 감추는데, 이는 요한의 내면에서 괴물이 사라지고 정신적 평온을 되찾았다는 해석과도 연결된다. 결국 『몬스터』는 허무주의를 정면으로 다루되, 그것을 인간의 사랑과 헌신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적 메시지로 마무리한다.
즉, 객관적 도덕이나 절대 진리가 부재한 혼돈 속에서도 타인과의 관계 맺음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할 실마리임을 말한다.
『이방인』은 허무주의를 극복하기보다는 끝까지 마주 보는 방식을 취한다. 뫼르소는 자기 삶에 어떤 구원이나 전환을 시도하지 않는다. 그는 감옥에 수감된 이후 사형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여전히 주변의 부조리한 권유를 받아넘긴다. 신부가 찾아와 신앙에 기대어 참회하기를 권하지만, 뫼르소는 처음으로 격렬한 감정을 터뜨리며 이를 거부한다. 그는 오히려 신부에게 자신은 “세상의 부조리에 이미 익숙하며, 다른 누구도 자신을 바꾸게 할 수 없다”고 절규한다. 이 분노의 폭발을 계기로 뫼르소는 한층 각성된 의식 상태에 이른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그는 스스로가 우주의 “온화한 무관심(gentle indifference)”과 하나가 되었음을 느낀다. 그 순간 뫼르소는 자신이 세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오히려 자기 처형일에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을 질러주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한다.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뫼르소가 세상의 무의미를 받아들여 오히려 해방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마지막에 이르러 삶의 유한성과 세계의 무관심을 완전히 인정함으로써, 오히려 두려움과 희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카뮈 철학에서 이것은 “부조리의 인정과 수용”으로 볼 수 있다. 뫼르소는 어떤 거짓된 의미에도 기대지 않고, 죽음 앞에서조차 담담함을 유지함으로써 허무주의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물론 『이방인』에는 『몬스터』처럼 누군가와 화해하거나 공동체에 다시 녹아드는 관계 회복의 순간은 없다. 끝까지 뫼르소는 철저히 혼자이며, 사회와도 유리된 채 처형을 맞는다. 그러나 그가 죽음을 앞두고 얻은 내적 평온과 자기 일치는, 어찌 보면 허무와 부조리를 이겨낸 또 다른 방식의 승리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뫼르소는 끝내 자신만의 진실에 충실했으며, 허무한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삶을 억지로 미화하지 않은 승자가 된 것이다. 이는 카뮈가 말한 “인생이 본질적으로 무의미하지만 그 속에서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며 살아가야 한다”는 주장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 실제로 카뮈는 평생 허무주의에 반대하며 인간이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야 함을 역설했는데, 뫼르소는 그 중에서도 의미 부여 자체를 거부하는 길을 택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대응 방식은 공동체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는 대신, 개인 스스로 삶의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담담히 견디는 것이다.
요컨대, 『몬스터』는 허무주의를 타인과 연결됨으로써 치유하려 하고, 『이방인』은 허무주의를 개인적 각성으로서 수용한다.
인간성의 상실과 회복은 두 작품 모두에서 중요한 테마로 등장하지만, 그 양상은 다르다. 『몬스터』에서 요한은 끔찍한 환경과 실험의 산물로 자라나면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과 감정을 잃어버린 존재이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이름조차 진짜가 아닌, 실험기관이 붙인 가명에 불과하다는 사실로 인해 ‘이름 없는 괴물’로 살아왔다. 요 에게 인간성의 상실이란 곧 관계의 상실이자 자아의 소멸이었다. 그는 타인을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에 관한 모든 흔적을 지우는 완전한 자기 소멸을 계획하기까지 이른다. 이러한 요한에게 구원의 실마리를 준 것은 텐마와 안나의 변함없는 애정과 헌신이었다. 텐마가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듣게 된 요한의 진짜 이름(작중 밝 히진 않지만)은 요한에게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되돌려주는 상징이 되었다. 이름을 얻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아들로, 누군가의 오빠로 관계망 속에 위치 지어지는 것이며, 동시에 “괴물”이 아닌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일이다. 요한이 마지막에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텐마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의 내면에서는 어린 시절 잃어버린 인간성의 한 조각이 되살아났을지 모른다. 그리고 창문이 열리고 요한이 사라진 결말은, 어쩌면 요한이 괴물의 운명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났음을 암시한다는 해석도 있다. 결국 『몬스터』는 인간성의 회복을 관계의 회복과 동일선상에 두고, 텐마라는 “관계를 맺는 자”를 통해 요한 같은 “관계를 파괴하는 자”를 구원하고자 한 것이다.
반면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애초에 인간성이라 불릴 만한 전형적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타인과 깊은 정서를 나누지 않고, 사회의 도덕률이나 관습적 연대감에 동참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는 인간성의 부재 혹은 소외 그 자체가 뫼르소의 캐릭터를 정의한다. 그러나 뫼르소를 인간성이 결여된 “괴물”로만 볼 수는 없다. 소설의 말미에 뫼르소가 진실된 삶에 대한 갈망을 보여주며 그 역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진실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는 뫼르소에게서 눈물이나 회개를 강요했지만, 정작 뫼르소는 가식 없이 진실했기에 사회가 위선적으로 꾸며낸 인간성의 틀에 맞지 않았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최후 진술은 모든 인간은 다 죽기 마련이며, 자기 죽음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라는 깨달음이었는데, 이는 그가 인간 보편의 운명을 솔직히 직시한 결과였다. 이러한 통찰은 뫼르소 개인에게는 일종의 내적 회복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비록 사회와의 관계 회복은커녕 끝까지 “이방인”으로 남았지만, 죽음을 받아들이는 고독한 과정을 통해 자신 안의 진실한 인간성을 확인했다고 할 수 있다. 공감, 연대로 보여줄 수 있는 인간성과는 결이 다르지만, 스스로 선택한 가치에 충실한 인간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인간성에 대한 성찰을 제공한다.
선과 악의 경계에 대한 두 작품의 접근도 흥미롭다. 『몬스터』는 시작부터 “선행이 악행으로 이어지고, 가해자가 피해자인 이야기를 통해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 회색 지대”를 보여준다. 실제로 텐마의 선한 선택(요한을 살린 일)이 예상치 못한 악을 불러왔고, 법과 질서는 오히려 부패한 인물들에 의해 왜곡된다. 작품 전반에서 권선징악의 공식은 통하지 않으며, 인물들은 각자 나름의 명분과 사연을 지닌채 선과 악의 스펙트럼을 오간다. 형사 룽게나 의사 텐마처럼 정의로운 인물들도 집착이나 복수심에 사로잡혀 과오를 범하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몬스터』는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인간 세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며, 오히려 그러 한 모호성 자체가 현실의 진실임을 시사한다. 그래서 작품은 “회색 지대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야 할까?”라는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앞서 논한 대로 그 해답을 인간관계의 윤리에서 찾는다. 즉, 객관적 선악의 기준이 통하지 않을 때, 상호 간의 유대와 책임이 윤리적 나침반이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이방인』에서 선악의 문제는 개인 내부가 아닌 사회적 맥락에서 제기된다. 뫼르소의 재판은 형식상 그가 저지른 살인에 대한 것이지만, 정작 재판정에서 쟁점이 된 것은 그의 “도덕성”이었다.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보인 무심함, 범행 후 담배를 피웠다는 증언, 법정에서 뉘우침을 보이지 않는 태도 등은 배심원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살인의 동기나 사건의 진실보다 사회가 기대하는 선악의 기준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결국 뫼르소에게 사형이 선고된 것은 그가 사회의 도덕률에서 한참 벗어난 “비정상적 인간”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카뮈는 이 과정을 통해 부조리한 사회의 단죄를 드러낸다. 객관적으로 보면 뫼르소의 행동(울지 않았다든가, 죄책감을 표시 하지 않았다든가)은 선악의 문제라기보다 개인의 성향이지만, 사회는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그를 “악인”으로 단정한다. 즉, 절대적 선과 악이 부재한 세계에서 인위적인 선악 구분이 얼마나 부조리한 희극으로 치닫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뫼르소는 이렇다 할 변론조차 하지 않은 채 사회의 악역을 떠안고 사형장이 향하는데, 그의 침묵은 오히려 기존의 선악 기준에 대한 일종의 반항으로도 해석된다. 그는 끝까지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세상에 동의하지 않고, 자기 나름의 순수한 무감정 상태를 지킨다. 이것은 그 자체로 선악의 경계를 허무는 행동이다. 사회가 납득할 만한 선한 모습도, 전형적 악의 모습도 되지 않음으로써, 뫼르소는 규정되지 않는 인간으로 남는다. 이를 통해 『이방인』은 선과 악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상대적이고, 때로는 삶의 근본적 허무 앞에서 무력한 것인지를 드러낸다.
두 작품의 핵심 인물인 요한 리베르트와 뫼르소는 저마다 작품의 철학을 체현하는 상징적 캐릭터로 설계되었다. 이들의 변화 과정과 삶에 대한 태도의 진화는 작품의 메시지와 직결되어 있다.
요한 리베르트는 『몬스터』에서 “괴물”의 표상이다. 금발의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 뒤에 숨겨진 요한의 실체는 순수한 악의나 광기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길러진 공허한 영혼이다. 그는 어린 시절 511 키더하임이라는 시설에서 비정한 실험과 학대를 겪으며, 인간의 선악관념 자체가 파괴된 상태로 성장했다. 그 결과 요한의 내면에는 “선과 악의 감각이 파괴될 때 깨어나는 괴물”이 자리잡게 되었고, 그는 세상 사람들을 자신의 눈으로 본 “괴물”로 규정하며 스스로도 괴물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요한의 철학은 앞서 언급한 대사 “인간이 평등한 유일한 순간은 죽음뿐” 이 나 “태어난 삶은 그저 사라지기 위해 존재하는 하찮은 것” 등에 잘 드러나는데, 이는 실존주의적 허무가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나타날 수 있는 파괴적 결론을 상징한다. 요한은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차라리 세상의 모든 존재를 지우고 자신도 사라지겠다는 완전한 허무를 꿈꾸지만, 동시에 내면 어딘가에서는 자신을 끝내줄 존재를 갈망한다. 그래서 그는 집요하게 텐마와 인연을 이어가며, 최후에는 텐마가 자신을 쏘아주길 바라며 이마를 가리키는 모습까지 보인다. 이 장면에서 요한은 마치 “나를 죽여줘, 이 지독한 공허에서 해방시켜줘”라고 무언으로 외치는 듯하다. 그러나 정작 텐마가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자, 요한은 스스로 인질 어린이에게 총을 겨누며 텐마를 자극한다. 요한의 이러한 행동은 절망적인 자기파괴 욕구를 드러냄과 동시에, 타인이 자기 의지를 꺾어주길 바라는 모순된 갈망을 보여준다. 결국 요한은 제3자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다시금 텐마의 수술로 목숨을 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번째 삶이 요한에게는 결정적 전환점이 된다. 그는 의식은 없었지만, 살아남은 후 텐마와 안나가 여전히 곁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어머니가 지어준 자신의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요한 내면의 괴물에게 치명타를 날렸다고 볼 수 있다. “그토록 비정하게 굴었어도 끝끝내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깨달음은 요한에게 생명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요한은 최종적으로 아무 말 없이 사라졌지만, 많은 독자들은 그의 변화를 직감한다. 처음에는 삶을 부정하던 괴물이 마지막에 가서는 침묵 속에 삶을 받아들이는 인간 으로 돌아갔다고도 해석된다. 요한이라는 인물의 상징성은 이렇게 변주된다. 그는 인간 내면의 괴물성을 상징함과 동시에, 그 괴물성을 넘어서 인간성을 회복할 가능성까지 암시하는 존재로 변화한 것이다.
뫼르소는 『이방인』에서 “이방인”라는 제목 그대로, 사회와 인간적 정서의 문맥에서 벗어난 아웃사이더를 상징한다. 처음 등장부터 마지막까지 뫼르소는 타자의 시선에 무감각한 인간으로 일관한다. 그의 상징성은 기존의 소설 속 영웅상과 정반대에 있다. 그는 용기 있는 행동도, 깊은 사랑도, 극적인 성장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무위와 무관심의 태도로 서사를 채우며, 독자들로 하여금 “저런 인간도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그러나 뫼르소는 단순 냉담한 인물이 아니라, 철학적 문제 제기를 위한 거울과도 같다. 뫼르소를 통해 카뮈는 독자에게 묻는다 “과연 우리의 삶에 본질적 의미가 있는가? 사회가 규정한 ‘인간답게 삶’이라는 것이 진실인가, 아니면 모두가 각자 고독하게 태어났 다 사라질 뿐인가?” 뫼르소의 무표정한 얼굴과 건조한 어투는 이러한 질문을 보여주며, 그의 재판 과정은 사회적 가치관과 개인의 실존적 진실 사이의 충돌을 상징한다. 뫼르소는 끝내 사회로부터 단죄당하고 제거되지만, 그렇다고 그의 내면의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지막 장에서 뫼르소는 처음으로 주체적인 사유와 감정의 폭발을 경험한다. 신부와 언쟁을 벌이며 화를 내는 장면에서 뫼르소는 생애 최초로 자신의 삶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변화는 미묘하지만 중요하다. 뫼르소는 처음부터 끝까지 냉담한 허무주의자로만 머물지 않고, 스스로 선택한 죽음 앞에서 일종의 평온과 연대감을 발견한다. 그가 바란 군중의 증오는 역설적으로 그가 세상의 일부임을 체험하고 싶어한 마지막 욕망이었다. “사람들이 증오의 함성을 질러준다면 덜 외로울 것”이라는 그의 생각.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에야 비로소 타인과의 연결을 갈구한 모습으로도 해석된다. 이 대목에서 뫼르소라는 캐릭터는 완성된다. 그는 여전히 사회와 화해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삶과 자기 자신과 화해한 상태로 최후를 맞이한다. 뫼르소의 이러한 태도 변화는 『이방인』의 핵심 메시지와 연결된다. “인간은 부조리한 세계에서 결국 혼자이지만, 그 고독을 인정하는 순간 이상한 평화에 이른다.” 뫼르소는 바로 그 메시지의 구현체로서, 허무를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 자기만의 진실에 도달한 인물이다. 그의 상징성은 사회의 위선과 허구적 의미를 깨부수는 파괴자이면서, 동시에 무의미 속에서도 자기 삶을 온전히 받아들인 초 연한 인간의 모습으로 승화된다.
『몬스터』에서 요한 리베르트는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 타인의 심리를 조종해 살인을 유도하는 두 가지 주요 방식을 구사한다.
첫째는 심리적 조종이다. 요한은 자신의 목표를 제거하도록 다른 사람의 마음을 교묘히 흔든다. 예컨데, 그는 죄책감이나 분노를 통해 심리적으로 불안정해진 이들을 부추겨 범죄를 저지를 의도가 없던 이들이 살인을 저지르게 만든다. 그는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한 어둠을 이용하는 능력을 지닌 악의 화신’으로 표현되며, 이 어둠을 자극하여 타인이 스스로 살인에 이르게 한다. 이는 마치 요한 안에 내면의 괴물을 보듯, 타인의 내면에 있는 괴물을 꺼내는 것 처럼 보인다
둘째는 관계의 말살이다. 요한은 목표와 관련된 모든 사람과 관계를 제거한 뒤에야 그 대상을 제거한다. 구체적으로는, 목표를 지지하거나 기억해줄 수 있는 주변인을 먼저 차례로 제거함으로써 목표를 완전히 고립시킨다. 관계가 끊긴 그 순간에야 요한은 대상에게 직접 최후를 내리는데, 이 과정에서도 그의 손에는 직접 피가 묻지 않는다. 요한은 이렇게 인간관계를 파괴함으로써 대상을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살인을 완성한다.
요한은 “인간의 생명은 평등하지 않다”, “누구나 괴물이 될 수 있다”, “죽음 앞에서만 평등하다”는 세계관을 가진다. 타인의 심리를 이용한 죽음은 그 세계관에 부합한다. 그들도 괴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방식이며 자신의 가치관이 타인의 내면을 이용해 죽임으로서 증명된다. 또한 심리학적으로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와 유사한 기제로 보인다. 요한은 자기 내면의 파괴성과 허무를 타인의 내면 속에서 구현함으로써, “봐, 나만 괴물이 아니야. 너희도 본질적으로 그렇잖아.” 라는 식의 정당화를 얻을 수 있다. 자신을 비정상이나 예외적인 존재가 아닌, 세상 전체의 일면으로 보편화와 같다. 요한에게 있어서 타인을 괴물로 만드는 일은 곧 자기 자신의 존재를 더 이상 외딴 섬으로 두지 않게 만드는 작업입니다.
요한은 철저히 타인을 통해 살인을 실행한다. 이것은 죄책감의 외주화이자 도덕적 회피이기도 하다. 전쟁을 지휘하는 사람과 직접 총을 들고 있는 사람의 죄책감은 다르듯이 자신은 폭력의 중심에 서있으면서도 직접적인 가해자가 아님을 연출한다.
이런 그의 대표적인 파괴행위의 예는 511 킨더하임(Kinderheim)에서 벌어진 집단살인이다. 8세 소년이던 요한 자신도 이곳에서 잔혹한 실험을 겪었는데, 그의 기억에 갇힌 분노와 두려움을 외부로 분출한 사건이다. 당시 요한은 어린아이들의 정서와 도덕 감각이 완전히 말살된 상태를 활용했다. 그는 친구를 포함한 모든 아이 들을 상대로 상호 살인 명령을 내렸다. 결국 아이들은 서로를 처절하게 죽이는 상황에 이른다. 이러한 사건에서 요한은 두려움과 생존 본능을 자극해 아이들 간에 불신과 적의를 조장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은 채 완벽한 살인을 실행했다. 이 장면은 요한의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간관계와 정체성이 붕괴된 상황에서 악이 폭발한다는 “사람은 뭐든지 될 수있다”는 명제가 실제로 실현된 것이다.
반면, 예술가가 자기 내면의 것을 예술로서 표현하는 것처럼 요한은 죽음으로 자기의 가치관을 증명해나가려는태도는 죽음이 일종의 예술로서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타인의 내면의 어둠을 활용하여 악을 행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의 어둠이 자신만이 할 수 있는 특수성이 아니는 보편성을 증명한다.
반면 뫼르소의 허무주의적 태도는 능동적이기 보다 수동적이다. 뫼르소의 살인은 분노가 아니라 수동적인 감각에 의해 이성의 긴장을 놓치면서 생긴 ‘감각의 절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태양, 열기, 땀, 바다의 햇살, 총의 무게를 오롯이 신체 감각으로 묘사하지만, 첫 번째 총알을 발사하기에 살해 이유는 명확히 없다. 그는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라는 말만 반복한다. 격발 이후 그는 네 발을 더 쏜다. 긴장의 해방감과 죄의식의 부재에 부둥켜앉은 추가 사격이었다. 이로인해 뫼르소는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았다."라고 말한다. 책임에 대한 긴장을 포기하는 것이 불행으로 가는 일이었음을 뫼르소는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그의 살인사건과 더불어 사건에 대한 무관심과 사건의 진상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 무책임, 피해자에 대한 어떠한 죄책감도 없는 태도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는다. 하지만 그는 사형집행을 앞두고 삶의 강렬한 활력을 느끼며 외친다. "많은 이들이 나의 죽음을 보았으면 좋겠다"
이 말은 사형집행을 앞두고 같은 말을 했던 나치 전범 아이히만과 동일하다. 그 또한 죽음 앞에서 많은 이들이 자신의 죽음을 보기를 외쳤다. 자신의 삶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 끝끝내 자신의 존엄을 외치며, 자신의 악행에 대해 인정하지 않은 무책임한 자기 기만을 보여준다. 뫼르소 또한 그랬으나 중요한 차이는 있다. 아이히만이 끝까지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며 자신의 행위를 체계 속에 녹여냈다면, 뫼르소는 오히려 어떠한 명령도, 어떤 이념도, 누구의 기대도 따르지 않은 채 살인을 저질렀다. 아이히만이 자신을 ‘기계’로 만들며 도덕적 책임을 회피한 것이라면, 뫼르소는 도덕적 책임 자체를 무의미한 언어로 간주하고 침묵했다. 그는 자신의 행위에 아무 의미도 덧씌우지 않았다. 아니, 덧씌울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사과하지 않는다”거나 “잘못했음을 모른다”는 식의 변명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랬다”고 말할 뿐. 이것이야말로 뫼르소가 선택한 심리적 방어기제의 핵심이다. 그는 감정을 억제함으로써 죄책감을 피하고,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의 고통을 통과한다. 그의 냉소는 세상을 향한 공격이 아니라, 세계의 무의미를 견디기 위한 방어막이다. 감정 외면, 해석의 유보, 설명의 생략. 뫼르소는 이 모든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지킨다.
이런 그의 심리적 방어기제는 마리와의 대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리가 뫼르소에게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라고 물었을 때, 그는 “그런 것 같지는 않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곧 이어 덧붙인다. “결혼하고 안하고는 중요하지 않아. 너가 원한다면 할게” 뫼르소는 사랑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말을 믿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다.
그에게 있어 사랑이란, 인생에서 어떤 특별한 순간이나 전환을 의미하지 않는다. 결혼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 결혼, 책임, 미래과 같은 사회적 언어에 대해 그 어떤 것도 그에게는 강요력이 없다. 그는 말한다. “그녀가 원한다면.” 그 한 문장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는 감정을 느끼는 것을 피하지 않지만, 감정을 정의하고 소유하고 책임지는 것에는 철저히 침묵한다. 이런 행위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않음으로써, 그 감정이 요구하는 어떤 결과나 책임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한다. 감정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기대가 생기고 관계가 형성되고 상처가 따라오기에, 그는 그 전 과정을 통째로 건너뛴다. 이름 붙이지 않음으로써, 그는 살아남는다.
그의 말을 정직함, 솔직함으로만 정의하기는 불편한 점도 있다. 덤덤한 대답처럼 들리는 그 말들은, 어쩌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해 버벅이는 일종의 자기 방어로 보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진짜 ‘사랑이 아닌 상태’를 정확히 아는 자의 말이라기보다는, 사랑이란 감정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에 단정적으로 말해버린 태도일 수도 있다.
사실 결혼에 대한 대답에 "나는 잘 모르겠다"를 고백하는 일은 꽤 용기가 필요하다. 대신 그는 무표정하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만다. 하지만 마리는 결혼이 중요한지 묻지 않았다. “당신은 나와 결혼하고 싶은가요?” 라고 물었을 뿐이다. 그 질문은 감정의 유무가 아니라, 관계 속의 의지를 묻는 말이었다. 하지만 뫼르소는 그 질문마저 자신이 정한 삶의 언어, 삶의 무의미라는 세계관의 잣대 아래에 끌어와 묵살한다. 그에게 무의미한 것일지라도, 마리에게는 의미가 있는 것이었으니
한편으로는 그의 허무주의는 정직이라기보다는, 두려움의 무장이라고 볼 수 있다. 삶의 의미를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오히려 자기만의 기준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무의미를 진실로 받아들인 사람이기보다, 의미를 감당할 언어가 없었던 자. 그는 묻지 않는 자이기에 대답할 수 없는 자다. 스스로 질문하지 않으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는 어렵기에, 그 누구보다 타인의 세계로 채워진 자였으며, 자신의 언어가 아닌 타인의 언어로 채워진 그는 이방인으로 외딴 섬이 되어 세상을 마주했다.
《몬스터》의 서사는 처음과 끝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배치되어 있다. 요한과 텐마의 서사는 병실에서 시작하고, 끝이난다. 하지만 두 장면은 빛과 어둠, 탄생과 소멸, 죄와 구원의 대극을 이루며, 같은 구조 안에서 완전히 다른 메시지를 전달한다.
작품 초반, 요한은 텐마의 수술로 살아난다. 어두운 병실 안, 텐마는 혼수상태의 아이에게 '병원장에게 환멸을 느꼈고, 요한을 살리면서 생명의 가치가 무엇인지 처음 알게 되었다'고 말하며 조용히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 고백은 따뜻했지만, 요한은 사라진다. 그리고 ‘괴물’로 세상에 나왔다. 텐마의 말을 듣고 병원을 나서며 죽음을 만든 것이다. 병원은 더 이상 생명을 구하는 곳이 아니라, 괴물의 부화를 허락한 실험실처럼 보이기도 하다. 의사라는 직업은 더 이상 윤리적 고지에 있지 않다. 옳은 판단을 하려고 했던 성실하고 능력있던 텐마의 손끝에서 악행이 의도하지 않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작중후반은 달랐다. 똑같은 병실이었으나 창밖은 대낮이었다. 병실 안은 하얗게 빛났고, 요한은 또다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텐마는 요한에게 조용히 그의 진짜 이름을 불러준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실험체로 만들어진 이름이었다. 그렇기에 요한은 이름 없는 괴물로서 존재했다. 하지만 그런 괴물에게도 관계를 놓지않은 텐마의 노력과 함께 요한의 어머니로부터 진짜 이름을 알게 된 것은(직접 전달한 것은 텐마였지만) "이름 없는 괴물"이 진정으로 구원받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텐마가 잠시 고개를 돌린 사이, 요한은 다시 사라졌다. 이번에는 누구도 죽지 않았고, 병원은 피흘리지 않았다. 대신 창문이 열려 있었고, 그 사이로 햇살이 병실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이 작품의 첫화와 마지막화의 병실 구조는 “인간은 언제 괴물이 되는가?” 그리고, “괴물은 다시 인간이 될 수 있는가?” 를 묻는 상징이 된다.
그리고 이런 질문에 괴물을 만든건 신이 아니라 인간이며. 그것도 텐마처럼 누구보다 선하고 능력 있고 성실한 인간조차 괴물을 만들 수 있다는 점. 하지만 그 괴물을 되돌릴 수 있고, 되돌리는 방법은 신이 아닌 인간의 몫임을 작품이 대답한다. 또한 괴물을 만들 수 있는 자격이 인간에게 있다면, 괴물을 되돌릴 책임 또한 인간의 몫이라는 선언. 요한의 구원은 초자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관계를 끊지 않을려는 인간이 이름 하나를 불러주는 것에 비롯되었다.
이런 구조는 요한 파멸과 구원을 상징하지만, 텐마 또한 이 구조속에서 파멸되고 구원된다. 병원에서 그의 죄책감이 시작되었으며 그 죄책감으로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끝끝내 의사로서 다시 생명을 살렸다. 밝은 햇살이 병실을 채울 때, 구원받은 건 요한만이 아니었다. 그를 살리고, 후회하고, 끝까지 책임지려 했던 텐마 역시 구원받았다.
《이방인》의 구조는 무감각한 삶에서 죽음을 향한 자각으로 가는 여정을 둘로 나눈다. 그것이 1부와 2부다. 작품의 초반, 뫼르소는 철저히 외부 자극에만 반응한다. 태양, 땀, 피로, 바다, 담배, 식사, 섹스. 모든 것은 감각의 층위에서 머무른다. 그 이상의 층위로는 나아가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그 이상의 층위는 사회적 규범이나 책임 뿐만 아니라 타인의 감각에 대한 공감도 함께 있다) 어머니의 장례식조차, 단지 ‘너무 덥고 피곤했던 하루’로 기억되며, 마리의 고백에도 자신의 기준만을 설명했을 뿐이다.
여기까지가 독자가 관찰할 수 있는 뫼르소의 상태이자 1부 2부로 나뉜 소설에서 1부의 내용이다. 2부부터는 반전된다. 감각으로만 구성된 1부의 세계가 2부에 접어들면서 말과 시선, 재판과 판단, 도덕과 죄의 언어로 완전히 대체된다. 뫼르소는 이제 세상의 무관심에서 벗어나 세상의 지나친 관심과 도덕적 폭력 속에 들어간다. 처음엔 아무도 그의 감정에 관심이 없었지만, 이제는 모두가 “왜 울지 않았는가”, “왜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를 문제 삼는다. 이 순간, 그는 타인의 시선이라는 감옥에 갇힌다.
《이방인》은 죽음을 세 번 통과한다. 어머니의 죽음, 아랍인의 죽음, 그리고 뫼르소 자신의 죽음. 재미난 점은 이 세 가지 죽음은 단지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뫼르소의 내면적 거리와 관여의 정도, 그리고 그에 따른 인식의 변화를 단계적으로 보여주는 연출이자 구조다.
처음은 어머니의 죽음이다. 뫼르소는 장례식 내내 침묵한다. 눈물도 없고, 회한도 없다. 피곤하고 덥다는 말만 반복된다. 죽음에 관여하지 않았다. 죽음은 ‘남의 일’이었고, 그는 ‘관찰자’에 머물렀다. 그에겐 어머니의 삶도, 죽음도, 그로 인한 애도도 ‘크게 중요하지 않은’ 주변부였다. 어머니가 없는 방이 넓게 느껴졌고, 이웃의 울음에 어머니가 생각났지만, 여전히 어머니의 죽음은 뫼르소의 내면을 흔들지 못하고 거기까지에서 머문다.
두 번째는 살인이다. 이번엔 뫼르소가 직접 죽음의 행위에 가담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감정이 없다. 분노도 없고, 이유도 없다. 다만 “태양이 너무 눈부셨다”고 말할 뿐이다. 그는 죽음의 행위 중심에 있었지만, 의미를 거부했다. 자신의 행위조차 해석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관찰자에서 행위자가 되었지만, 책임지는 자로는 나아가지 않는다. 더 이상 관찰자로 머물 수 없음에도 관찰자로 머문다.
마지막 죽음은 뫼르소는 자신의 죽음이다. 자신의 죽음이라는 결정적인 사건 앞에서 그는 처음으로 생각한다. 감정을 느끼고, 분노하고, 받아들인다. 죽음을 예감한 그날 밤, 그는 말했다. “많은 이들이 나의 죽음을 보러 왔으면 좋겠다." 그것은 자기 삶이 타인의 시선과 연결되었음을 처음으로 인정하는 고백이자, 존재의 증명을 갈망하는 마지막 외침이다.
이런 흐름을 뫼르소 내면의 성장이라고 본다면, 그의 성장은 혼자의 고요 속에서 일어났다. 그는 누구의 도움도, 어떤 관계도, 변화의 매개로 삼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혼자다.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무심했고, 법정에서도 침묵했고, 죽음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세계를 응시했다. 그의 성장은 세상과 무관한 자가 세상과 무관함을 받아들이는 데서 완성된다.
고립된 두 인물의 극복 방식이 달랐고, 그 결과 또한 달랐다. (블랙코미디로 표현한다면, 죽음을 앞두고 나서야 깨달음을 얻는 뫼르소는 손가락이 잘리고 나서 정신을 차린 것일테고, 손가락이 짤려 괴물이 된 요한은 떨어진 손가락을 다시 붙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어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일 수도) 이것은 관계와 연대로 구분지을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은 관계속에서 파괴되지만, 관계속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뫼르소는 관계를 경험하지 못한채 무대에서 퇴장된다. 소설 《이방인》이 세상에 나오고 몇 년 뒤, 카뮈는 그의 소설《페스트》발표한다. 《페스트》에서 카뮈는 허무 앞에서 《이방인》과는 다른 방식의 응답을 시도한다. “나는 끝까지 싸울 겁니다. 사랑 때문이죠.” 의미 없는 죽음이 퍼지는 세상, 신도 없고 정의도 없는 세상에서, 주인공 리외는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병을 없애겠다는 희망 때문이 아니라, 자기 옆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견디기 위해 행동함으로써.
《몬스터》는 선과 악의 경계를 흐리는 이야기다. 살인을 저지른 자가 악인이라면, 그를 살린 자는 무엇인가? 악을 낳은 손끝이 선의에서 비롯되었을 때, 우리는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몬스터》 전체를 지배하는 불편한 핵심이다. 그리고 이 질문 앞에 놓인 것이 바로, 도덕감각의 시험대다.
작품의 출발점은 단순했다. 텐마는 선한 사람이다. 생명을 구하는 의사이며, 누구보다 성실하고 능력 있는 인간이다. 하지만 그가 구한 생명이 요한이었다. 괴물이었다. 그 순간, 도덕의 지형은 바뀐다. 그는 옳은 일을 했지만, 결과는 옳지 않았다. 이 작품은 단호하게 묻는다. “그럴 경우, 도덕은 여전히 옳은가?”
요한은 누구보다 잔혹한 방식으로 사람을 죽인다. 그는 스스로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 대신 타인의 마음을 조작하여, 타인이 스스로 살인을 저지르게 만든다. 그는 죄책감을 생산하지 않으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그의 살인은 ‘예술’이라 불릴 만큼 정교하고 비가시적이다. 그는 말한다. “사람은 뭐든지 될 수 있다.” 이 문장은 도덕적 명제라기보다, 도덕 자체를 해체하는 선언처럼 들린다.
《몬스터》가 무서운 건, 바로 여기다. 요한은 단순 범죄자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는 존재 자체가 도덕의 경계를 시험하는 실험자다. 그의 범죄는 단지 살인이 아니라, 도덕이라는 허상을 무너뜨리는 행위로 이 작품은 범죄에 대한 응징을 멈추고, 그에게 질문하며 용서하는 방식을 이끈다. "당신은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리고 이 질문에 마주하는 인물이 텐마다. 텐마는 의사이지만, 수많은 죄책감과 분노 속에서 결국 총을 든다. 하지만 끝내 쏘지 않는다. 그는 요한을 다시 살린다. 처벌이 아니라, 회복을 바란다. 그 순간, 《몬스터》는 또다시 질문한다. “도덕은 응징인가, 회복인가?” 작품은 명확한 답을 내린다기보다, 무너진 도덕의 폐허 위에, 인간의 책임을 남긴다. 괴물을 만든 것도 인간이고, 괴물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인간이다.《몬스터》는 범죄를 미화하지 않는다. 하지만 도덕적 단죄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통해, 도덕감각 그 자체를 해부대 위에 올려놓는다.
도덕이란 과연 절대적인 것인가, 아니면 조건과 맥락 속에서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도덕과 윤리 앞에서 합리화하지 않고 합리적으로 대할 수 있을까?《몬스터》는 그 질문을 텐마의 떨리는 손과 요한의 사라진 침대 위에 남겨둔다.
뫼르소의 문제는 사람을 죽인 행위다. 그럼에도 『이방인』은 뫼르소에 대한 동경과 연민을 만든다. 그렇기에 범죄 미화에 대한 논란을 말할 수 있지만, 작가의 의도는 범죄의 미화를 의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작가는 뫼르소를 통해 사회가 요구하는 위선적 가식을 벗어던지고 끊임없이 진실을 추구하는 인간상을 그리고자 했을테니까. 뫼르소가 살인에 대해 뉘우침을 표하지 않는 것은 악행을 개의치 않는 냉혈함이 아니라, 가식적인 후회의 언어까지 거부하는 철저한 정직함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살인 자체는 부정되고 처벌받아 마땅한 행위이며, 작품에서도 결국 주인공이 사형으로 대가를 치른다. 다만 소설 속에서 카뮈의 서술은 왜 뫼르소가 사회로부터 괴물로 취급받는지 그 과정만 보여주는 데 치중한다. “뫼르소는 사회에 순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죄가 되었다”고 설명하며, 뫼르소의 소외가 개인의 비도덕성 때문이 아니라 공동체의 부조리한 관습과 가치관 때문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이방인』은 독자의 도덕 감각을 흐리기보다, 기존 도덕의 기만을 폭로함으로써 오히려 더 근원적인 윤리의 물음을 던지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시각 에서 볼 때 피해자인 아랍인의 존재가 지워져 있는 서사는 분명 한계다. 아랍인을 죽여도 괜찮다는 인식을 변명으로 사용할 수 없는 시대가 왔다. 그때는 그랬으니 이해해야된다는 식은 이해는 가능할지는 몰라도, 잘못되었으니까. 알제리 출신 작가 카멜 다우드가 소설 『뫼르소, 살인 사건』을 통해 『이방인』의 희생당한 아랍인에게 이름과 목소리를 되찾아주며 『이방인』에 대한 한계를 보완했다.
또한 『이방인』서문에서 작가가 직접 쓴 글 중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라고 언급하며, 뫼르소에 대한 공감과 규범이 만든 도덕적 기만에 힘이 더해졌다. 하지만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으면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뫼르소가 사형선고를 받은 까닭은 사람에게 총을 쏴서 죽인 것, 응급조치를 시도하지 않고 추가 격발을 한 것, 사람을 죽인 후에도 죄책감을 보이지 않는 것, 어떻게 비극이 일어났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은 무성의함에 있다. 과정에서 어머니의 장례식에 보여주었던 태도가 더해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전부 빼고 어머니의 장례식에 울지 않은 것만을 강조하며 사건의 본질을 왜곡시킨 카뮈의 서문은 카뮈 스스로도 사건을 진실되게 바로 보지 않고 이야기를 뫼르소를 위한 연극으로 만드는 일에 동참했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내게 『이방인』 은 도덕감각을 극한까지 시험한 소설이다.
『몬스터』와 『이방인』은 겉보기에는 전혀 다른 시대와 매체의 작품이지만, 둘 다 허무의 심연을 응시하며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맞닿았다. 『몬스터』는 스릴러 장르의 외피 아래 선과 악, 죄와 구원, 관계와 단절이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들의 중심에는 “인간의 삶은 과연 가치 있는가?”, “절대적 선이나 악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가?” 같은 문제들이 놓여 있다. 결국 비정한 현실과 무의미가 삶을 덮칠지라도 결국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다른 인간과 맺는 유대임을 역설한다. 요한이라는 절대적 허무의 괴물을 무찌른 것은 총칼이 아니라 텐마와 안나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과 연민이었다는 점에서, 『몬스터』는 궁극적으로 인간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희구(바라고 구함)를 보여준다. 작품은 관객에게 “도덕이나 법이 모호해도, 당신이 소중히 해야 할 것은 당신이 맺은 인간관계”라고 속삭이며, 인간성 회복의 가능성을 힘주어 노래한다.
반면 『이방인』이 우리에게 주는 깨달음은 보다 내면적이고 실존적인 차원에 있다. 카뮈는 뫼르소라는 인물을 통해 사회적 의미에 대한 반항과 삶의 부조리한 진실에 대한 직시를 표현했다. 삶이란 결국 죽음으로 끝나고, 우주는 인간에게 무관심하며, 그 안에서 우리가 세운 질서나 규범은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냉혹한 진실 앞에서 카뮈는 결코 도피나 절망을 권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방인』은 뫼르소의 입을 빌려 “우리는 이 온화한 무관심과 닮았으며, 그렇기에 절망조차도 한낱 기분에 불과하다”는 통찰을 전한다 . 이는 허무주의를 넘어선 부조리 철학의 정수, 즉 있 는 그대로의 삶을 끌어안는 태도를 의미한다. 뫼르소는 결국 자신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어떠한 거짓된 희망에도 기대지 않은 채 자유로운 영혼으로 최후를 맞는다. 이 모습에서 우리는 한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엿볼 수 있다. 카뮈가 평생 추구했던 “반항하는 인간”의 모습이 뫼르소를 통해 구현된 것이다 – 비록 그는 외롭게 죽지만, 그 죽음 앞에서 자 신만의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허무를 스스로 극복했다고도 볼 수 있다 .
독자로서 이 두 작품을 마주하면, 우리는 자연스레 몇 가지 근본적인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삶에 본래적인 의미가 없다면 무엇을 붙잡아야 할까? 절대 선이나 절대 악이 없다면 과연 옳은 삶이란 무엇인가? 『몬스터』는 이에 대해 우리 각자가 맺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책임과 연민이야말로 의미의 원천이라고 가르쳐준다. 반면 『이방인』은 개인의 진실한 자각이야말로 삶을 살아내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해준다. 한쪽은 연대의 윤리, 다른 한쪽은 고독한 진실성을 제시하지만, 궁극적으로 두 작품 모두 허무를 직시하되 거기에 침몰하지 않고 자기식으로 답을 찾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냈다.
두 작품의 철학적 성찰을 종합해 보면, 인간은 때로 괴물처럼 잔혹해질 수도, 이방인처럼 고립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선택의 자유와 의미를 부여할 힘이 남아 있다. 텐마가 손을 내밀 때, 절망과 허무로 인한 파괴적인 세계에 있는 요한은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가능성을 얻었고, 뫼르소가 무의미를 받아들였을때 그는 세상의 허무로부터 자유로운 자신을 발견했다. 이것이야말로 두 작품이 전하는 역설적인 희망이다. 허무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괴물에 맞선 텐마의 용기이자, 부조리를 견딘 뫼르소의 정직함일지 모른다.(겁나 어렵겠지만...) 삶이 아무리 무의미해 보여도, 그 속에서 인간성의 빛을 포기하지 않는 선택, 그것이 『몬스터』와 『이방인』이 우리에게 건네는 깊은 위로이자 도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https://www.youtube.com/watch?v=dP859IGD5sg&t=101s
https://www.litcharts.com/lit/the-stranger/themes/meaninglessness-of-life-and-the-absurd
https://www.sparknotes.com/lit/stranger/quotes/page/5/
https://medium.com/@winterjart/urasawas-monster-and-its-unconditional-hope-for-humanity-8d6bce577ee0
https://modeoflife.tistory.com/233
https://villains.fandom.com/wiki/Johan_Liebert/Galle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