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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의 시작

일하기 싫은 날 보는 책


「 일하기 싫은 날 보는 책 」

   - 이 이야기의 시작



보통은 자신이 좋아하는, 아니 사랑까지 할 수 있는 일을 창업아이템으로 삼으라고들 한다. 하지만 내 경험을 빌어 한 가지 조언을 하라면, 그럴 경우 콩깍지가 ‘더 단단히’ 씌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연애라면 내 남자의 수박만 한 점도 사랑하면 그뿐이지만, 창업은 비용을 지불하는 고객에게 분명한 가치를 주지 못하면 망한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자기 손에 쥔 동전과 자기가 먹고 싶은 사탕이 바꿀 가치가 있는지를 귀신같이 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비스와 상품에 대한 가치교환은 모든 구성원의 본능이니까.     



                          

도영을 만나게 된 건 ‘그분’ 때문이었다. 하루 종일 비가 온 날이었다. 억수같이 왔다.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다 해가 졌다. “내일 뵙겠습니다!” 모두가 퇴근했다. 그곳은 지은 지 30년이 넘은 18평 아파트였고, 나는 작은 방에 거주하고 있었다. 거실과 큰 방은 창립멤버들과 함께 일하는 공용공간이었다. 그러니까 방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옆 칸이 사무실인 것이다. 나는 어차피 계속 일만 할 거니까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라 생각했다. 하지만 밤이 되면 조금 무서운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시세보다 저렴한 월세를 찾느라 살짝 후미진 곳을 선택했기 때문에 해가 지면 현관문을 꼭꼭 잠갔다. 내 방구석에서 무릎을 모으고 앉았다. 오래된 벽지에서 장마 초입의 비린 곰팡이 냄새가 진하게 올라왔다. 왜 이런 날에는 빨간 장미를 선물하라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눅눅하고 우중충했다. 공기도 기분도.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 입 속에 타이레놀 두 알을 털어 넣었다. 순간 싸하게 약기운이 돌면서 정수리 위로 새가 쪼아 대는 것 같은 두통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그분’이 떠오른 것이다. 왜 그런 확신이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그분이라면 답을 줄 것 같았다.      



           

그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 때 내가 좋아했던 남자 배우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의 원작 소설가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 지난 후에 도서관에서 원작 소설을 찾아 읽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원작 소설이 영화보다 열 배는 좋아서 서점으로 달려가서 단숨에 구매해 버렸다. 취향을 저격하는 책은 세 번쯤 반복하여 읽는 오랜 습관 때문에 그분의 책은 몇 달 동안 내 책상에서 명당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창업을 준비하면서 <지방을 태우는 이야기 콘텐츠>를 기획하던 중에, 그분이 집필한 글쓰기 강좌 책을 접하게 되었다. 글을 소비하는 독자의 입장에서 글을 읽는 생산하는 작가의 입장이 되어 보니, 그분이 쓴 문장 하나하나가 비수가 되어 꽂혔다. 나는 읽고 또 읽었다.                               




그런데! 여성능력개발원에서 우리 사업에 지원하는 ‘60인의 자문위원단’ 명단에서 그분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갑자기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서 한 숨 고른 뒤 자세히 보니, 그분은 올해 자문위원단이 아니라 지난해 자문위원단이었다. 다시 말해 나에게는 그분께 자문을 요청 드릴 자격이 없었다. 그분의 연락처라도 알 수 없겠냐고, 센터에 간곡히 사정해 봤지만 규정 상 안 된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가지지 못하면 더욱 간절해지는 법. 다음 날 검색창을 뒤져서 그분이 부교수로 몸담고 있는 대학을 찾아냈다. 학과 사무실에 자초지종을 말하고 통사정을 했다. 조교는 다음 주 금요일에 자기네 본교에서 그분의 글쓰기 강연이 있으니 직접 뵙고 부탁드려 보라는 힌트를 주었다.          



      

그 대학은 서울 외곽 소도시에 위치해 있었다.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길치인 나는 거기까지 가는 경로를 탐색하며 골몰했다. 길 찾기 서비스는 5가지 경로를 추천했다. 짧은 경로가 1시간 50분, 긴 경로로는 2시간 30분이 걸리는 여정이었다. 나에게는 걸리는 시간보다 갈아타는 횟수가 중요하기 때문에 두 번만 갈아타면 되는 네 번째 코스(2시간 30분)로 낙점했다.               



           

강연이 열리기까지 열흘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그분을 만나기 전까지 내 나름의 준비를 철저히 하고 싶은 욕심에 그 시간이 천금만금같이 느껴졌다. 연도 별로 정리된 파일을 꺼내어 보았다. 창업 전에 7년간 수집한 자료를 한데 모아 놓은 것들이다. 그중 빨간색 파일의 첫 장, 프린트된 글을 소리 내어 읽어 보았다.     


ⓒ 일러스트 김유은

   

    


글쓰기 강연 당일. 지하철에서 고속버스로 한 번, 고속버스에서 시내버스로 한 번, 나는 정확히 두 번 갈아타는 수고만으로 차분하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셀 수 없이 넘나드는 우리 집 가는 길도 매번 헷갈리는 내가! 예상된 시간 안에 원하는 곳에 도착하다니! 나에게는 굉장히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지금 행운의 여신이 내게 오는 중이라는 다소 유치한 생각으로 인해 콧노래가 절로 새어 나왔다. 나보다 먼저 도착해서 책을 읽으며 기다리던 사람들이 힐긋거렸다. 창피하지는 않았지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애써 넘치는 흥을 자제하면서 강의실 첫 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 일러스트 김유은



                      

글쓰기 강연 시작 5분 전, 그분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입장했다. 책날개에서 본 사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실제로 보니, 음, 뭐랄까, 학교 다닐 때 늘 보던 우리 학교 교수님 같았다. 생각보다 작은 키에, 네안데르탈인처럼 굽은 어깨와 등, 그 아래로 볼록하게 나온 뱃살을 가리는 H로고 버클의 에르메스 벨트가 눈에 띄었다. 내가 느낀 그분의 첫인상은 ‘오늘 많이 피곤하시구나’하는 정도였다.         



              

글쓰기 강연 마무리 20분 전. “교수님의 강연을 마치겠습니다. 끝으로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집니다. 질문 있으신 분은 손을 들고 질문내용을 말씀해 주십시오.” 강연이 끝날 즈음부터 교수님의 다크 서클이 1센티쯤 더 내려온 것을, 나 말고도 다들 눈치챈 모양이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 적막을 깰 것인가, 말 것인가. 손마디 끝으로 전해 오는 간질간질함과 싸우는 중이었는데, 그런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게 당연한 조교가 마무리 멘트를 했다. “질문이 없으시면 오늘 강연을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추후에 질문이 있으신 분은 PPT 아래 보이는 이메일 주소로 연락 주시면 답변드리겠습니다.”                                     



    

앗. 당황한 나머지, 문을 열고 나가는 교수님 등에 대고 다짜고짜 내 주소를 던졌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서 왔습니다.” 누가 들어도 분명한 부산 사투리 억양인데, 왜 하필 서울에서 왔다는 걸 밝혔을까? 실은 서울시 여성능력개발원에서 전문 여성 CEO 양성 사업 지원을 받은 지방태워주식회사의 단대표라는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말이다.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놀란 교수님이 뒤를 돌아보셨다. 나는 영화 러브레터에서 ‘오겡끼 데스까’하던 나까야마 미호처럼 간절함을 가득 담아 다시 외쳤다. “교수님 팬입니다!”                  



    

그 강의실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주목했다. 그 순간 나는 피곤한 학자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았다. 하지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침묵으로 버텼다. 약 5초가 지나자 교수님이 젊잖게 말씀하셨다. “멀리서 오셨군요. 연구실로 가서 차 한 잔 하시지요.” 나는 온몸으로 오케이를 표현하며 후다닥 교수님의 뒤를 따랐다. 복도에서 연구실로 걸어가는 동안 나는 속내를 밝혔다. 사실 다이어트 콘텐츠 아이템으로 창업했으며 콘텐츠의 개선점에 대해 교수님께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말이다. 이번엔 교수님이 침묵하셨다. 약속 없이 불쑥 나타난 불청객 신분이니 이 정도 고충은 마땅하다 여기며 한 걸음 한 걸음 교수님을 따라갔다.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젊은 남자가 보였다. 그가 도영이었다. 그를 보자마자 나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어렵게 구한 시간인데 지인과의 선약이 있었다면 나로서는 난감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수님이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이 급격히 신바람 난 목소리로, 그에게 나를 소개했다. “오! 자네 와 있었군. 이 분은 다이어트 사업을 하는 여성 CEO이신데, 사업상 자문을 구하러 오셨어. 연구에만 찌들어 사는 나보다는 요즘 승승장구하는 사업가인 자네가 적임자지. 자! 인사들 하게!” 도영과 나는 어색한 통성명을 했다. 이번에도 나는 보았다.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그의 이마에 잔뜩 묻어 있던 짜증을. 아까 교수님의 흔들리는 눈빛을 감당하는 것은 내 의도였지만, 이번엔 왠지 조금 억울했다.                           



    

“이 친구는 내 학부 후배인데, 작년에 서울에 식당을 하나 열더니 안 망하고 1년이나 버티네요. 근데 사실 뭐, 식당만 하기는 아까운 필력입니다. 우리 학교 다닐 때 이 친구 별명이 단테였습니다. 냉정하고 날카로운 관점을 예술인데! 아무것도 비하하지 않아요. 그거~ 자기 세계가 여유로운 사람만 가능한 건데, 이 친구가 딱 그렇습니다. 아, 아, 사족이 길었네요. 아무튼 대표님이 원하는 답을 줄만한 친굽니다.” 연구실 담장 너머로 교수님 목소리만큼이나 신난 리듬으로 한여름 풀벌레가 울어댔다.      




「 일하기 싫은 날 보는 책 」


- 프롤로그: 오늘 일하기 싫은 당신께

1. 이 이야기의 시작

2. 완전 내 편인 친구  

3. 아무 말 대잔치 일기장   

4. 초심을 부르는 질문

5. 속 시원한 수다

6. 입가엔 미소와 단잠

7. 취향 저격 아지트

8. 게으름 피우는 요일

- 에필로그: 꾸준한 사람들이 모두 가진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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