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초심을 부르는 질문

일하기 싫은 날 보는 책


「 일하기 싫은 날 보는 책 」

   - 초심을 부르는 질문 



[큐슈의 저녁]은 지하철 2호선 합정역 메세나폴리스 빌딩에서 도보 10분 거리라고 했다. 줄곧 고백하지만 나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길치다. 남들 눈에는 쉽게 보이는 메세나폴리스 빌당을 발견하는 것부터가 난제이고, 도보 10분이라는 말은 무척이나 애매하고 단편적이어서 내게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정보에 불과했다. 컨설팅 시간은 두 시간으로, 식당의 폐점시간인 밤 11시 30분부터 자정을 넘어선 새벽 1시 30분까지다. 가는 차편은 내가 사는 온수역 7호선 라인을 타고 신도림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탄 후 합정역에서 내리면 된다. 그리고 오는 차편은 서울역과 인천시를 잇는 급행버스 1601번을 타고 부천까지 들어온 후에 기본요금 정도로 택시를 타야 한다. 급행버스가 그 시간까지 다니는 것에 감사하며 택시요금에 새벽 할증이 붙는 건 감수하기로 했다. 차편은 그 정도면 무난한데 문제는 내가 도보 10분으로 그 가게를 찾을 수 없는 인간형이라는 것이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전반적으로 무능한 인간으로 낙점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므로, 서둘렀다.      



                      

식당의 위치는 꽤나 깊숙한 골목 안쪽이었다. 오래된 3층 건물의 1층 안쪽 가게였는데, 실제로 가정집이었던 주택의 느낌을 그대로 살려서인지 내가 초등학교 때 살았던 부산의 전포동 골목에 온 것처럼 편안했다. 향수병에 걸린 여자의 나른한 기분으로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아차 싶어, 시계를 보니 약속시간보다 50분이나 일렀다. 약속시간에 늦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일찍도 매한가지로 문제다. 장사하는 식당에 들어가 밥도 먹지 않고 멀뚱히 자리만 꿰차고 있을 수도 없고 손님인양 한 그릇 시켜 먹는 것도 어색하다. 게다가 난 저녁식사를 하고 온 상태라 배도 고프지 않았고.          



                

결국 때를 기다리는 저승사자처럼 식당 주변을 뱅글뱅글 돌면서 30분을 보낸 후, 약속시간 20분 전에 맞추어 미닫이로 된 식당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오픈 주방을 중심으로 다찌(바 테이블) 석이 둘러져 있었고, 그 건너편으로 몇 개의 다인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작은 공간 여기저기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들이 푸근했다. 주방에서 그릇을 닦던 도영이 나를 발견하고는 “어서 오세요. 잠시 앉아서 기다리시겠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붉은 고동색의 다찌석 끝자리에 살포시 앉았다.      




정확히 20분 뒤, 그는 주방정리를 마쳤다. 세트로 맞춘 것처럼 보이는 검은색 두건과 앞치마를 벗고 나와 간판 불을 끄고 안쪽 테이블 방향으로 엄청나게 밝은 형광등을 켰다. 이 야밤에 무슨 그렇게나 밝은 스포트라이트 조명을!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에 따르는 심정으로 순순히 도영이 마련한 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도영과 나는, 한 여름 날씨처럼 이글이글한 형광등 아래에서, 뽀글뽀글 탄산이 올라오는 레몬수 두 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드디어, 컨설팅이 시작되었다.                     


ⓒ 일러스트 김유은


“메일로 보내 주신 자료들은 잘 봤어요. 지방을 태우는 이야기 콘텐츠라는 발상이, 독특하네요. 창업하신 지 8개월 차에 접어드셨던데, 저도 식당 개업한 지 그쯤 됐습니다.”  

“아, 교수님도 얼마 안 되셨군요?” 

“하하, 요즘은 학생들도 시간강사한테는 교수님 소리 안 해요. 그나마 모교에서 강의할 때는 선배님이라고는 해 주는데, 타 대학에서는 그냥 강사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대표님께 강의하는 입장은 아니니까…, 음, 그냥 이름 불러 주세요. 최도영입니다!”             



             

일전에 분명, 마지못해 떠맡은 이 컨설팅이 탐탁하지 않다는 것을 거침없이 드러냈던 도영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다시 만난 오늘은 친절했다. 하루 종일 식당 손님들을 응대하던 여운이 남아서였을까? 이왕 시작하기로 한 거니까 마음을 바꿔 먹어서였을까? 이유야 어찌 되었던 ‘말하는 뉘앙스’에 감성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 나로서는 감사한 일이었다. 도영은 목소리가 좋았다. 훌륭한 발음이어서도, 뭇 여성들의 로망인 중저음 톤 이어서도 아니었다. 다만, 문장으로 따지만 쉼표와 마침표 직전의 끝음절마다 그만의 독특한 패턴이 있었는데, 그 음색이 듣기에 좋았다.              



  

“지태주가 제 이름인 줄 아셨군요. 아니에요. 지태주는 지방태워주식회사의 줄임말이에요.” 

“재밌는 이름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디어는 언제 시작된 건가요?”               




그것은 「사업 시작 동기(창업동기)」를 묻는 질문이었다. 사업계획서에 빠지지 않는 항목 중에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처음 그 칸을 채워야 했을 때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모니터 위에서 재촉하듯 깜빡이는 커서에게 못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한 마디로 말하긴 힘든데…… 하고.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내 창업동기, 그것은 팥빵이 되기를 희망했다. 미세한 밀가루였던 여러 사건과 경험들이 뒤섞여 반죽이 되었고, 숙성 시간을 거쳐 탄력성과 신장성이 최대가 되자, 그것은 자신의 짝꿍인 팥 앙금을 그리워했다. 그리움이란 깊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내 안에서 ‘하고 싶지?’에서 ‘할 수 있어’로, 마지막으로 ‘해야만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갔다. 그쯤 되니 이유와 가능성과 확신의 문장들이 일필휘지로 마구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것들을 지면에 옮겨 사업계획서를 완성했다. 이후 6군데 기관에 접수하는 시간과 낙방하는 시간이 차례로 이어졌다. 결국 나의 사업계획서를 알아봐 준 곳은 서울시 여성능력개발원이었다. ‘전문 여성 CEO 양성 지원 사업’에 최종 합격 대상자가 되었다는 메일을 받았을 때 나는 울상이 되어 촌스럽게 “야호!”를 외쳤다. 메일의 끝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었다. 서울특별시 여성능력개발원은 서울여성의 잠재된 능력을 개발하고, 서울시 여성인력개발기관과의 협력적 파트너 역할을 합니다. 21세기 여성의 시대, 높고 큰 꿈을 품은 여성을 위해 저희 여성능력개발원이 언제나 함께 하겠습니다. 세상에! 서울여성, 높고 큰 꿈을 품은 서울여성이라니! 감격에 겨운 나머지 냉수를 몇 잔이나 벌컥벌컥 들이켰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사표를 쓰고 서울을 가겠다고’ 말했다.     



           

도영은 나의 창업동기가 밀가루였던 시절을 떠올리는 동안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하도 자연스러운 폼으로 기다려주어, 한참 동안 마음 놓고 생각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아이스커피의 얼음을 와사삭 깨물어 먹듯 침묵을 깼다. “그건요……” 내가 단 한마디를 내뱉었을 뿐인데, 도영이 조용히 집중해오는 기운이 느껴졌다. 어쩐지 고마웠다. 결국 나는 주책을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업계획서에는 지면이 모자라서 쓰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몽땅 털어놔 버린 것이다. 처음 마주 앉은 남자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보통 남자라면 이야기를 듣는 도중에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어서 결론을 말하라는 투로. 하지만 그는 분명 보통이 아니었다. 소설을 쓰는 남자여서인지, 달랐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혹여나 상대가 지겨워할까 봐 지레짐작으로 편집하여 잘라버리는 부분이 생긴다. 그때마다 도영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그 부분을 짚어냈다. 그러면 말하는 사람은 신이 나 버린다. 그날 나는 스무 살 어느 여름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일하기 싫은 날 보는 책 」


- 프롤로그: 오늘 일하기 싫은 당신께

1. 이 이야기의 시작

2. 완전 내 편인 친구 

3. 아무 대잔치 일기장 

4. 초심을 부르는 질문

5. 속 시원한 수다

6. 입가엔 미소와 단잠

7. 취향 저격 아지트

8. 게으름 피우는 요일

- 에필로그: 꾸준한 사람들이 모두 가진 이것  





이전 07화 일하기 싫은 날 챙기는 아이템 #일기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일하기 싫은 날 보는 책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