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속 시원한 수다

일하기 싫은 날 보는 책


「 일하기 싫은 날 보는 책 」

   - 속 시원한 수다



저녁밥을 먹은 직후였어요. 엄마가 냉장고에 반찬통을 정리하시는 걸 거들면서 귀로는 TV 소리를 듣고 있었어요. 9시 뉴스 남자 앵커가 반듯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UN의 보고에 따르면 세계 성인 비만 인구가 3억 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그 소식을 전해주는 앵커가 명절날마다 만 원짜리 지폐를 손에 쥐어 주는 우리 삼촌이라도 되는 양, 괜히 반가운 거 있죠? 내가 자꾸 살이 찌는 건 내 탓이 아니야. 이건 전 세계적인 문제야. 해결책이 시급해! 이렇게 속으로 쾌재를 불렀죠. 내친김에 천하장사 소시지를 한 개 더 까서 입에 넣고 오물오물 거리며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어요. 손가락이 멈춘 곳은 KBS2. 연예인들 소식을 전하는 연예정보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는데, 세상에, 좀 전에 9시 뉴스에서 발표한 UN의 통계를 비웃기라도 하듯, 완벽한 보디를 자랑하는 스타들이 줄줄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어요. 가수 A양 아시죠? 7살 어린 신인 남자 배우랑 열애설 터진 게 그날이었어요. 당시만 해도 공개연애를 상당히 꺼리는 분위기여서 그 커플 파파라치 컷은 한마디로 대박이었잖아요. 소식을 전하는 리포터는 심각한 표정으로 양측 소속사 입장을 전했지만, 솔직히 제 눈에는 횐 색 면 티셔츠만 입어도 날씬한 핏이 살아나는 A양의 몸매만 보였어요. 아마 여자들은 다 같은 마음이었나 봐요. 실제로 그 브랜드의 티셔츠가 일주일 만에 완판 됐다고 하더라고요.




다음 화면에서는 1년 8개월간의 공백기를 거치고 제작 발표회장에 나타난 배우 B양의 소식이 이어졌어요. 그런데, 제가 알던 B양이 아닌 거 있죠? 살이 엄청 빠졌더라고요. A양이야, 데뷔 때부터 날씬했으니까 부러워도 어쩌겠냐 하는 심정이었지만 통통해서 정감 갔던 B양이 몰라보게 날씬해진 모습으로 나타나니까 뱃속에서 이유 모를 배신감이 꼬물거렸어요(이렇게 자존감 바닥 치는 말까지 하다니, 확실히 미쳤던 거다. 하지만 한 번이 어렵지 다음은 쉬워진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렇게 그림 펜으로 정교하게 그려 놓은 것 같은 스타들을 한참 보고 있자니, 방금 전에 내 위장을 통과한 천하장사 소시지가 염려되더라고요. 그 소시지는 지금쯤 소화가 끝났을 것이고, 내 몸 구석구석에 자리 잡은 지방덩어리와 합체할 타이밍일 테니까요(당시 나는 다이어트 강박증이 있었기 때문에 이쪽 방면으로는 섬세한 상상력을 자랑했다). 내 머릿속에서 지방이 축적되는 과정이 3D에서 4D로 넘어갈 때쯤이었어요. 갑자기 이래서는 안 될 것 같은 거예요. 허겁지겁 의자에 걸쳐둔 운동복 바지를 주워 입고 현관문을 나섰어요. 그런데 102동 아래로 난 아파트 산책로로 발길이 향하던 도중, 지난번에 김이사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 거예요. “답답할 땐 조선비치 호텔 뒤편에 동백섬 한 바퀴 돌아봐. 바다 짠 내음이랑 소나무 풀냄새가 섞여 있어서 걷는 맛이 일품이야. 따로 여행 안 가도 힐링될 거야.” 다행히 다음날 수업이 없는 여름방학이었거든요. 늦게까지 운동할 각오로 몸을 틀어 동백섬으로 향했죠.           



                 

아, 혹시 도영 씨는 해운대 가보셨어요? 외지 사람들은 잘 모르던데, 동백섬 산책로는 해운대 해수욕장이 끝나는 지점 왼편에서 시작되거든요. 그러니까 그날 저는 어쩔 수 없이 한여름 밤의 해운대 백사장을 지나야 했어요. 예상했겠지만, 거긴 이미 ‘이번 여름’을 위해 마음먹고 몸매를 다듬은 전국 팔도의 비키니 걸들이 바글거리고 있었어요. 다시 살이 찌기 시작한 저에게는 매우 불편하고 탐탁지 않은 풍경이었죠. 야구 모자를 꾹 눌러쓰고 최선을 다해 빠르게 그곳을 지나쳤어요. 그런데 신기하죠? 아무리 모자를 푹 눌러쓰고 아무리 빨리 걸어도, 그 비키니 걸들의 아찔한 몸매가 선명하게 내 망막에 찍히는 거 아니겠어요? 여자인 내가 이 정도인데 남자들은 오죽하겠냐는 생각까지 드니까, 괜히 또 한 번 성질이 나서 더 빨리 걸었어요.    



                   

동백섬 산책로 입구까지 도착했을 땐, 기분이 좋아졌어요. 김이사님 말씀이 맞았거든요. 바다 짠 내음이랑 소나무 풀냄새가 뒤섞인 야릇한 향기가 이국적인 기분을 들게 하더라고요. 진짜 좋다. 정말 감동적이다. 막 이러면서 호들갑스럽게 사방을 휘 둘러봤어요.                


              


그런데 세상에! 거긴 또 다른 종족들이 활보하고 있는 거 있죠? 바로 러너들이었어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저마다의 몸매를 그대로 드러낸 운동복을 입고서 달빛에 반짝이는 땀을 머금고 쭉쭉 달리고 있었어요. 그 많은 사람들이 그 순간만큼은 ‘우린 같은 기분’이라는 확신으로 그곳 공기를 장악하고 있었어요. 그 광경이 너무 신선해서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홀린 듯 합류했어요. 왠지 한순간에 멋져진 것 같아서 저절로 허리와 등이 곧게 펴졌어요. 쿵쿵쿵 발소리를 따라 쿵쿵쿵 마음도 울리더라고요. 한참 뛰다가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데 한 외국 남자가 세상 환한 미소와 함께 엄지 척을 날려주는데 성원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선호텔부터 바닷가 끝까지 죽도록 달렸어요.       


ⓒ 일러스트 김유은

      

                   

그날 어렴풋이 알게 된 게 있어요. 사람은 저마다에게 어울리는 몸짓이 있다는 걸요. 물론 예쁜 몸매를 갖는 건 모두의 로망이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몸매는 ‘몸선과 몸짓의 합’이에요. 핏을 결정하는 몸선에 율동감을 더해주는 몸짓이 합해질 때, 한 사람의 몸매가 완성되는 거죠. 어떤 몸선에 어떤 몸짓이 더해지느냐에 따라, 경쾌한 느낌을 줄 수도, 묵직한 느낌을 줄 수도, 우울한 느낌을 줄 수도 있어요. 경쾌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발랄해지고, 묵직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진지해지고, 우울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무기력해지는? 우리는 이렇게 몸짓을 통해 서로의 기운을 주고받으며 사는 시간이 훨씬 많은데, 나는 왜 사진 한 장에 찍힌 몸선 때문에 울고불고하고 있는지. 좀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깨달음은 잠시고 그 뒤로도 이 문제로 삽질하는 여러 날들이 이어졌지만요. 어쨌든 「지태주(지방태워주식회사)」라는 아이디어가 시작된 순간을 묻는 질문을 받으면, 저는 ‘동백섬 러너들’이 떠올라요.        



     


내 이야기가 끝나자 도영은 꽤 피로해진 눈을 하고서 말했다. “잘 들었습니다.” 그 담백한 한 마디를 듣고 나니, 조금 전 30분 넘게 수다를 떨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원했다. 오늘 종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는데, 이렇게 속 시원히 말을 풀어내니 살 것 같았다. 머릿속에 복잡하게 얽혀있던 생각의 쪽지들이 십진법 분류에 따라 비교적 명확히 정리된 모양이었다. 또 한 번 고마웠다. 어느새 나는 머리에 꽃을 꽂은 여자처럼 긴장을 풀어헤친 채 헤벌쭉 웃고 있었다. 그 순간, “너 불친절하면 쥐약 먹은 애처럼 멍청해지잖아. 시작부터 기죽으면 안 돼! 처음이 중요해. 처음이!”하던 수진이의 호령이 들리는 듯했다. 오늘 도영은 분명 친절했는데, 지금 나는 왜 멍청하게 웃고 있는 거지? 나는 혼자 몰래 놀라며 정신 줄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시작부터 기죽으면 안 된다는 의지로 딱 잘라 말했다. “저, 이제 그만 가볼게요.”                 


  … 그렇게 끝났다. 도영과 나의 첫 번째 컨설팅이.  




「 일하기 싫은 날 보는 책 」


- 프롤로그: 오늘 일하기 싫은 당신께

1. 이 이야기의 시작

2. 완전 내 편인 친구 

3. 아무 대잔치 일기장

4. 초심을 부르는 질문

5. 속 시원한 수다

6. 입가엔 미소와 단잠

7. 취향 저격 아지트

8. 게으름 피우는 요일

- 에필로그: 꾸준한 사람들이 모두 가진 이것  





이전 09화 일하기 싫은 날 챙기는 아이템 #초심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일하기 싫은 날 보는 책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