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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가엔 미소와 단잠

일하기 싫은 날 보는 책


「 일하기 싫은 날 보는 책 」

   - 입가엔 미소와 단잠



다음 날 수진이가 득달같이 전화를 걸어왔다.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솔직히 어떻게 된 건지 나도 잘 판단이 안 섰기 때문에 어젯밤 일을 사실대로 고해바쳤다. 수진이가 “하……”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발가락을 꼬물거리며 수진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남자들이 비키니 걸들 어쩌고 하는 얘기는 왜 한 거야? 완전 열등감에 절어 사는 여자 같잖아!”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는 표정은 아니었어. 하고 중얼거렸으나 내 말을 듣지 못한 수진이는 계속 자기 말을 했다. “안 되겠다. 아무래도 너 혼자 둬선 안 되겠어. 다음 미팅도 수요일? 그전에 내가 한번 갈게.” 그리고는 자긴 점심 먹으러 가야 한다고 전화를 끊었다.              


  

 

도영의 얼굴을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 교수님과 함께 만난 도영과 어제 둘이 만난 도영은 다른 사람 같았다. 앞의 도영은 까칠하고 도도하다 못해 재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제의 도영은 담백했지만 다정했다. 이번엔 교수님 말씀이 또렷이 재생됐다. “냉정하고 날카로운 관점을 예술인데! 아무것도 비하하지 않아요. 그거~ 자기 세계가 여유로운 사람만 가능한 건데, 이 친구가 딱 그렇습니다.” 그랬구나. 앞뒤로 퍼즐이 딱 맞춰졌다. 머릿속이 깔끔해지니 다시 본론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나의 창업동기가 더 세밀한 밀가루였던 시절. 바로 ‘새 까치 학원의 정우성’에 관한 이야기다. 한참 예민했던 사춘기 시절에 겪은 흑 역사인데, 결론적으로 나는 그 사건을 계기로 난생처음 살을 빼는 데 성공했다.              


              

     


날씬해지고자 하는 욕망. 다이어트의 역사는 19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가장 처음 유행한 다이어트는 흡연 다이어트였다. 흑백 스크린 속 여배우들이 내뿜는 담배연기는 날씬함의 상징이었고, 그녀들을 선망한 대중들도 함께 캑캑거리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 후로 약 100년 동안 2,000여 가지가 넘는 다이어트 방법이 유행했고, 또 사라졌다. 혹자는 말했다. 이렇게 종류가 많다는 것은 정답이 없는 것이라고.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체중감량에 성공한 여성 200명 중에서 감량한 체중을 2년 이상 유지하는 여성이 1명꼴이라는 통계가 발표되었다.          


      


나의 다이어트 역사는 1998년부터 시작되었다. 떡볶이 코트가 유행했던 해였다. 같은 반 친구들 열에 아홉이 같은 모양의 코트를 입고 다녔다. 다 같은 것을 입는데 다 같이 유행을 선도하는 패션리더의 기분을 느끼는 것이 이상했지만, 사실이었다. 엄마가 아울렛에서 사 온 내 것은 빨간색이었고 66 플러스 사이즈였다. 66인 것도 모자라 66 플러스가 뭐냐고 입을 삐죽거렸지만, 결국 엄마의 선견지명대로 꽤나 넉넉했던 품은 차츰 몸에 꼭 맞아 들어갔다. 매일 아침 떡볶이 코트를 입을 때마다 “어?”하고 폭죽같이 짧고 위험한 탄성을 질렀지만, 그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 다른 노력은 들이지 않았다.      


ⓒ 일러스트 김유은



그날은 겨울방학이 끝나는 날이었다. 나는 책상 앞머리에 코를 박은 채, 열흘이나 밀린 일기장에 개연성 있는 거짓말을 꾸며 넣느라 정신이 혼미해져 있었다. 잘 안 풀리던 스토리가 한참 탄력 받기 시작할 즈음에 엄마가 콩나물 심부름을 시키셨다. 잠깐 짜증이 났으나 가는 김에 스크류바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면 되겠다는 계산이 서자, 기분이 나아졌다. 마음이 급해져서는 떡볶이 코트의 떡볶이 단추를 얼른 잠가 입었다. 순간 가슴과 배 쪽에 시선이 잠깐 머물렀는데, 그 모습이 마치 다닥다닥한 단칸방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스크류바는 예상대로 달았다. 덕분에 기분이 잔뜩 좋아졌다. 콩나물이 담긴 검은 비닐을 좌우로 달랑거리며 사거리에서 우회전했다. 그때였다. 골목 끝에서 그 아이가 걸어오는 것을 목격했다. 그 아이로 말할 것 같으면 ‘새 까치 학원의 정우성’이었다. 그 아이의 매력은 조금 뻔했다. 동네 근방 4개 고등학교 남녀 학생들을 모아놓은 새 까치 학원의 월별 고사에서 10위권 밖으로 밀려난 적 없는 우수한 두뇌, 멀리서도 한 번에 눈에 띄는 우수한 신체비율, 가까이서 보면 티브이 속 정우성과 견주어도 이겨 먹을 만한 우수한 이목구비, 여자아이들이 지우개를 빌리러 가면 모르는 척 속아주는 우수한 센스까지. 다만 주변을 의식하며 즐기는 연예인병 초기 증상이 예상되었지만, 그 정도의 단점이라면 감싸줄 만했다.




아무튼 그 아이와 나는 하룻밤을 함께 보낸 사이였다. 우리는 동네 어른들이 3년간 부은 곗돈으로 떠난 흑염소 파티에 따라온 자식들이었다. 1박 2일이었기 때문에 맡아줄 조부모가 없는 집 자식들은 모두 관광버스에 몸을 실었다. 밤이 되자 어른들의 흥은 증폭되었고 자식들은 더욱 따분해졌다. 자식들 중에 용감한 피를 가진 아이가 맥주 다섯 캔을 훔쳐왔다. 무기력하던 자식들은 어느새 일사천리로 공범이 되어 망보는 팀과 마시는 팀으로 갈라졌다. 그 아이와 나는 같은 팀이었다. 함께 홀짝홀짝 거리는 시시각각 심장이 벌렁거렸다. 나는 그때 확신했다. 그것은 첫사랑이었다. 골목 끝에서 걸어오는 이가 첫사랑이라는 걸 감지한 나의 심장은 심하게 두 방망이질 쳤다. ‘후후-’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지막 남은 스크류바 한 입을 얼른 꿀꺽 삼켜버렸다. STEP1. 오른쪽 귀 뒤로 머리카락을 새초롬하게 넘길 것(여성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해서) STEP2. 눈은 최대한 가느다랗게 뜰 것(눈웃음을 전달하기 위해서) STEP 3. 오른손은 수줍게 살짝만 들 것(첫사랑이라는 표시로) STEP 4. 너무 낮지도 너무 높지도 않은 목소리 톤으로 “안녕?”이라는 안부를 전할 것(이 부분이 하이라이트)



나의 시나리오는 완벽하게 세밀했다.           

5.

4.

3.

2.

1.

카운트다운!          



긴장한 내가 다섯 손가락을 빳빳하게 펼쳐 들고 ‘안…’이라고 말하려는 순간 그 아이가 훅 지나가 버렸다. 나는 그 길부터 집까지 단숨에 뛰어 들어와 방문을 잠갔다. 콩나물 비닐에 코를 박고 콩 비린내를 벗 삼아 세 시간 동안 엉엉 울었다. 그 아이는 나를 모르는 척한 것이 아니었다. 못 알아본 것이었다. 내가 1년 사이에 13킬로그램이나 쪘으니까.                

  



다음 날부터 나의 첫 다이어트가 시작됐다. 규칙은 간단했다. 매점에 발길을 끊고 저녁식사시간에 운동장 10바퀴를 돈 후, 짝지에게 매일 도장을 받는 것이었다. 나는 짝지를 잘 알았다. 그냥은 흐지부지 될 것이 뻔했으므로 도장이 서른 개 모일 때마다 피자를 쏘겠다고 약속했다. 역시나 짝지는 내 옆에서 귀신 같이 딱 달라붙어서 종일 잔소리를 해댔다. 여섯 판의 피자가 짝지네 집으로 배달되었을 때, 나는 160cm, 48kg이라는 이상적인 체중을 달성했다.      



          

물론 빠진 살이 다시 찌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고, 찐 살을 다시 빼려면 때마다 어떤 희생을 필요로 했다. 세상은 다이어트가 내 몸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왜 내 몸과 싸워서 이기기까지 해야 하지? 하루 종일 그리고 평생 동안 함께 하는 사이인데 사이좋게 지내면 좋잖아? 그래서 자기 몸을 잘 알고 잘 리드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유심히 관찰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23살의 마지막 다이어트를 끝으로 서른 중반이 된 지금까지 감량된 체중을 유지하고 있다. 때때로 1~2킬로그램 정도 체중이 증가할 때도 있지만 그마저도 1주일 이내로 회복하는 편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200명 중에 1명꼴로 살아남은 천운의 주인공으로 살고 있는 셈.               



 


안타깝게도 다이어트에 성공하는 것과 다이어트 사업을 잘하는 것은 엄연히 달랐다. 내 몸을 리드할 때는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면 되었다. 주변 상황의 영향을 받을 때도 오로지 나를 중심으로 내가 원하는 것과 싫은 것들을 파악하면 차근차근 좋아졌다. 반면 창업 이후에 나는 오매불망 회원들만 바라봤다. 그녀들이 원하는 것, 그녀들이 좋아하는 것, 그녀들이 필요로 하는 것, 그녀들의 언어, 그녀들의 몸짓, 그녀들의 목소리. 그녀들이 전해주는 주파수에 따라 나는 활기차게 일어섰다가 곧 죽을 것처럼 꺼지곤 했다.                




점차 내 몸속 어딘가가 텅- 비어갔다. 순수하게 ‘나에게만’ 집중하던 그 시절은 너무 옛날이 되어버린 것 같은, 어쩌면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럴 수 없을 것 같은 상실감이 생겼다. 그러던 차에 어제는 내 이야기를 실컷 하고 오늘은 그 여운으로 나의 옛 기억에 흠씬 빠져들었다. 배꼽보다도 훨씬 안 쪽 저기 저 깊은 곳이 만족스럽게 차올랐다. 낯설지만 반가운 그 몽글몽글함이 행여나 사라질까 봐 조심스럽게 침대에 몸을 뉘었다. 불안한 감도 전혀 없고 그렇다고 들뜨지도 않은 채로 잠을 청하는 게 얼마만인가 싶었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달콤한 꿈을 꾸었던 것 같다. 적절하게 조미된 바삭한 과자를 한 입 베어 문 듯 한 얼굴로 쌕쌕거리며 깊은 잠을 잤다.       




「 일하기 싫은 날 보는 책 」


- 프롤로그: 오늘 일하기 싫은 당신께

1. 이 이야기의 시작

2. 완전 내 편인 친구 

3. 아무 대잔치 일기장

4. 초심을 부르는 질문

5. 속 시원한 수다

6. 입가엔 미소와 단잠

7. 취향 저격 아지트

8. 게으름 피우는 요일

- 에필로그: 꾸준한 사람들이 모두 가진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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