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취향 저격 아지트

일하기 싫은 날 보는 책


「 일하기 싫은 날 보는 책 」

   - 취향 저격 아지트



“큐슈의 저녁이랬지? 거기, 맛있어?” 수진이가 물었다. “몰라, 안 먹어 봤어.” 나는 무심하게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며 대답했다. 사실은 안 먹어 본 게 아니라 못 먹어 본 거였다. 갈 때마다 그곳에서 풍기는 맛 좋은 냄새에 군침이 넘어갔으나, 영업이 끝난 시간인 데다가 손님도 아닌 입장이라 그림의 떡을 바라보는 심정이었다. 수진이는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먹어볼래?”라고 말하는 동시에 내 핸드폰을 낚아채서 도영에게 문자를 전송해 버렸다. 이번 주엔 조금 일찍 가서 저녁 식사해도 될까요?     




아, 정말 내가 못 살겠다고 꽥꽥 소리를 지르며 이불 위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이미 전송이 된 후였다. 더 심각한 건 그날 밤이 지나도록 그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다는 점. 다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제 자정이 넘어 문자를 확인해서 답장이 늦었습니다. 편한 시간에 오십시오.그의 답장을 받은 건 다음 날 오전이었고, 세 번째 컨설팅 당일이기도 했다. 오후까지 여러 차례 소나기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했다. 덥다고 난리 친 게 엊그제인데 거짓말처럼 기온이 뚝 떨어졌다. 톡톡한 소재의 옷을 모아 놓은 옷장을 열어 ‘뭐 입지?’를 고민했다.                




내가〔큐슈의 저녁〕에 도착한 것은 저녁 아홉 시경. 솔직히 몇 시가 가장 좋을지 적잖게 고민했다. 컨설팅 시작시간은 11시 30분인데 9시는 이른 감이 있지만, 저녁을 너무 늦은 시간에 먹고 싶지는 않았다. 얌전히 먹고 안쪽 자리에서 책을 읽으며 기다리려고 소설책 한 권을 챙겨 갔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니, 곱슬곱슬한 푸들 헤어스타일을 한 남학생이 나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단대표님! 이쪽으로 앉으세요!” 해맑게 웃으며 다찌석(바 테이블) 끝 좌석을 가리켰다. “사장님께 말씀 많이 들었어요. 단대표님 쓰신 글도 다 읽었고요. 저는 전공이 작곡인데 작문에도 관심이 많거든요. 언젠가 장편소설 한 편을 완성하는 게 꿈이에요. 제 이름은 이재훈이라고 해요.” 알바생인 듯했는데, 종알종알 말수가 많은 친구였다.        



        

〔큐슈의 저녁〕의 메뉴 구성은 심플했다. 식사 메뉴는 밥류 두 가지에 면류 두 가지뿐이었다. 그리고 2인 메뉴로 보이는 고이비토 정식이 있었다. 사이드 메뉴도 단 두 가지, 야채 모둠과 튀김 모둠 중에서 선택이 가능했다. 주류와 음료는 국산 생맥주 한 가지, 일본 생맥주 한 가지, 탄산음료 두 가지가 전부였다. “고이비또 정식을 추천합니다! 사장님이 쏘는 건데 제일 비싼 거 드세요.” 재훈 씨가 부추기는 바람에 2인용 메뉴를 먹게 되었다. “호박죽으로 시작해서 여섯 가지 메뉴가 나올 거예요. 양은 많지 않게 작은 접시에 담아 드릴게요. 시간 많으니까 천천히 하나씩 맛보세요.” 재훈 씨가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동안, 나는 “고마워요.”만 연발했다.          



     

  “아, 단대표님 블로그에서 읽었는데, 맥주 좋아하신다고요? 그럼 아시겠네요~ 같은 브랜드 맥주라도 가게마다 생맥주 맛이 다 다르죠? 그 이유가요. 관리를 안 해서 그래요. 기계 청소를 안 해서 그렇다는 거죠. 청소만 잘해줘도 맛이 아주 그냥, 기가 막힌다는 걸 명심하시고요. 한 잔 하실래요?” 이 친구 화법이 독특하고 귀엽다고 느끼다가 나도 모르게 또, “고마워요.”라고 말한 게 화근이었다.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맥주를 마시고 기분이 좋아지면 큰소리로 웃는다.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큰소리로. 그래서 그런 나를 창피해하지 않을 만큼 친한 사이들과 맥주를 마시는 편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랜만에 마시는 맥주. 그것도 생맥주. 더더군다나 맛있는 생맥주. 나는 정식 메뉴가 업그레이드될 때마다 알뜰히 맥주를 한 모금씩 섞어 삼켰다. 기분이 한없이 좋아졌다. 깔깔깔. 큰소리로 웃었다. 세 잔의 맥주가 비워졌을 때 즈음, 휴대폰 진동음이 울렸다. 문자메시지였다.

단대표님, 태연실장입니다. 밖에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면담 요청드려도 될까요?          



     

평소와 다르게 카톡 대신 문자메시지인 것도, 지나치게 격식을 갖춘 말투도, 밖에서 보자는 것도 이상했다. 나는 곧바로 답장을 하는 대신 “재훈 씨, 얼음물 한 잔만 부탁할게요.”라고 말했다. 놀이동산에서 바이킹 탈 때, 90도 높이에서 단숨에 미끄러지는 쫄깃한 기분이 온몸을 휘감았다.      


ⓒ 일러스트 김유은


           

결국 11시 30분, 컨설팅 시간이 되었을 때 내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 있었다. 살면서 들어왔던「할 말 있어」의 기억들이 막무가내로 떠올랐다. 나에 대한 나쁜 소문을 전해 들었다는 한 친구가 그랬고, 내가 먼저 짝사랑했던 선배와 사귀기로 했다는 다른 친구가 그랬고, 내 남자 친구가 다른 여자와 어깨동무를 하고 가는 걸 봤다는 또 다른 친구가 그랬다. 그 말을 들은 시기와 대상은 달랐지만, 공통점은 모두들 어쩔 줄 몰라하는 미안한 표정과 함께 이미 일어난(혹은 정해진) 일을 통보하기 위해 그 말을 썼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그 순간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인정하는 것 밖에는.               



 

 ‘밧줄에 묶인 코끼리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서커스단에서는 어린 코끼리의 발목에 밧줄을 묶어 놓는다고 한다. 처음 몇 달 동안 어린 코끼리는 밧줄을 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이내 곧, 불가능함을 깨닫고 몸부림을 멈춘다. 시간이 흘러 어른 코끼리가 되었을 때, 밧줄을 끊어낼 충분한 힘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내게 있어 「할 말 있어」라는 말은 코끼리의 밧줄과 같은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느꼈던 무기력함이 학습되어 있었던 탓에, 이번에도 태연실장의 문자를 받자마자 포기하려는 마음이 앞섰다.             



   

“단대표님, 오늘 무슨 일 있습니까?” 도영이 걱정스레 물었다. 1시간 전까지만 해도 맥주를 마시고 큰소리로 계속 웃어대다가, 갑자기 시들한 표정으로 핸드폰만 보고 있었으니. 그렇게 물어온 것이다. 나는 ‘예’ 혹은 ‘아니요’라는 대답 대신 “죄송해요”라고 말했다.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뭔가를 뚝딱거렸다. 그가 하얀 접시에 내어온 것은 아스파라거스 오븐구이였다. 노릇한 아스파라거스 위에 굵게 다진 호두가 얌전히 얹혀 있었다. 그는 먹어 보라는 말 대신 따뜻하게 데운 물수건과 젓가락 세트를 내 앞으로 가지런히 정리했다. 나도 잘 먹겠다는 말 대신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한 입 먹으려는 찰나, 젓가락이 얼굴 가까이에 왔을 때, 방금 짜낸 레몬즙 향기가 순식간에 코끝까지 훅- 올라왔다. 동시에 나도 모르게 “아~”하고 작은 탄성을 질렀다.          



   아스파라거스의 부드러운 줄기에는 엽산(자연산 기분 전환제)이 듬뿍 들어 있다.

     - 마음을 안정시키는 7가지 음식, 코메디닷컴 中에서.           



아스파라거스 줄기 속에 함유된 엽산 덕분이었을까? 이번엔 내 힘으로 “할 말 있어”의 운명을 바꾸어 보고 싶어 졌다. 내일 태연실장이 무슨 말을 하든, 긍정적인 마인드로, 문제를 잘 풀어 보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 일하기 싫은 날 보는 책 」


- 프롤로그: 오늘 일하기 싫은 당신께

1. 이 이야기의 시작

2. 완전 내 편인 친구 

3. 아무 대잔치 일기장

4. 초심을 부르는 질문

5. 속 시원한 수다

6.입가엔 미소와 단잠

7. 취향 저격 아지트

8. 게으름 피우는 요일

- 에필로그: 꾸준한 사람들이 모두 가진 이것  





이전 13화 일하기 싫은 날 챙기는 아이템 #단잠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일하기 싫은 날 보는 책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