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을 어떻게 간직할지는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닮아갈 것이다.
종종 사람은 자신의 이름에 어떠한 운명이 부여되어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내 이름은 지은이다. 한자로 지혜 지에 은혜 은. 지혜롭고 은혜로운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지은이’ 즉 어떤 이야기를 짓는 사람이라는 뜻에 더 마음이 끌렸다. 사람은 이름 따라 살아간다는데, 내 운명을 예고해 본다면 나는 아마 이야기를 지어야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꾸며낸 나의 운명처럼, 학창 시절 가졌던 다양한 꿈의 끝에서 나는 항상 어떤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었다. 상상 속 미래의 나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한가로운 어촌마을에서 교직 일기를 쓰기도, 혹은 일러스트를 배워 스토리를 짜는 웹툰 작가가 되어 있기도 했다.
나는 일상에서도 종종 습관처럼 글의 소재를 찾았고, 떠오르는 마음을 연결하며 생각했다. 역사 수업시간에는 조선 시대의 왕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의 인물 설정을 교과서 옆에 끄적거리거나, 친구들에게 손으로 만화를 그려 보여주기도 했다. 수능 모의고사에서는 필적 확인란 문구의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내 마음이 와닿는 경험을 떠올리고, 혼자 감동을 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상상과는 달리, 글에 자신과 흥미를 잃어버린 채 도망가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나는 다독상을 받았는데, 그건 도서부인 친구와 함께 도서관 대출 대를 지키며 마구잡이로 책을 빌렸기 때문이었다. 도입부에서 흥미를 잃은 책은 다음날 바로 반납했고, 새로운 책을 빌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렇게 나의 대출 목록에서 읽지 않은 책은 절반이 넘었다. 나는 도서관 대출 기록을 기준으로 주는 상이 있는지도 모른 채, 교내 단상에 올라 다독상을 받았다. 그 시기에 나는 우연히 대충 써서 낸 글쓰기 대회에서도 입상했다. 연달아 내게 주어진 상장을 들여다본 순간, 책 뒤의 바코드를 휘갈기듯 찍었던 시간과 대충 문장을 써 내려간 순간의 마음들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맴돌았다. 거짓으로 상을 탔다는 것을 나 스스로는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꾸며낸 상은 오히려 죄책감을 키우고 흥미를 잃게 된다는 것을 선생님은 알까?
어쩌면 조금이나마 있었을지도 모를 글에 대한 적성이 순식간에 내 안에서 가능성을 모조리 잃은 채 사라졌다.
돌이켜보면 온 정성을 쏟아 좋은 결과를 거두더라도 의심하는 일이 잦았다.
고등학생 시절 가장 취약한 과목은 어김없이 국어였다. 극복하기 위해 매일 국어 공부에 시간을 쏟았고, 9월 모의고사에서 처음으로 1등급을 받았다. 하지만 성적표를 받아 든 순간, 익숙한 ‘삼’이라는 글자 대신 어색한 ‘일’이 나를 어떠한 감정으로 깊이 내몰았다. 국어에 대한 자신감 대신 오히려 수능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가짜 1등급이 수능 날에는 어김없이 정체를 드러낼 것 같았다. 불안감에 사설 모의고사에서 40점을 맞은 뒤, 수능까지 남은 밤 동안 나는 매일 시험 날에도 40점을 받는 꿈을 꿨다. 국어 시험지를 펼칠 때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고, 심장 박동이 시험지 위 문장을 모조리 덮어버렸다. 어김없이 받아 든 수능 성적표에는 다시 익숙한 3등급이 찍혀 있었고, 그 뒤로 나는 글을 쓸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결국, 학창 시절 이름에 부여된 운명이 있다고 믿었던 것과 달리 나는 글쓰기를 피해 다니는 직장인으로 성장했다. 내가 오랜 시간 준비하고 몸담았던 광고 기획자나 마케터라는 직업에는, 글을 잘 쓰는 역량도 분명히 중요했는데도 애써 모른척하며 살아왔다. 직장에서 브랜드 전시의 기획부터 운영까지 총괄 업무를 맡게 되었을 때,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한 인턴사원에게 내가 쓴 전시 문구 초안의 수정을 부탁하기도 했다. 시간에 쫓기고 있다는 말로 부탁의 서문을 열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어쩐지 글쓰기에 대해 꾸며낸 나의 운명이 허상이 되어 세상에 드러날까 걱정했던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지나치듯 발견한 작은 문구에도 이야기를 상상하는 습관이나 내 안의 감정을 연결하며 생각하는 버릇들은 여전했다. 나도 모르게 계속 붙들고 있었던 문장들이 내 안에 복잡하게 얽혀 쌓여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20대의 끝이 되어서야, 나는 결국 써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안의 말과 감정들은 너무 시끄러워서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한 번 써보기로 결심한 어느 계절에, 나는 소설과 에세이를 번갈아 가며 온종일 시간을 보냈다. 두어 달 동안 내가 쓴 글은 A4로 200여 장에 달했다. 말도 안 되는 분량이라는 것과 글에 대해 무지한 채 마구잡이로 써 가능했다는 사실을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았다. 그렇게 잔뜩 문장을 토해내고 나니 내 안은 조금씩 조용해졌다. 글을 쓸수록 버거운 감정과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 조금씩 나를 되찾아갔다. 텅 빈 깨끗한 마음을 마주하고 나니 글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
글은 타인이 내게 부여하는 상장도, 나를 내세우기 위한 성적표도 아니었다.
그저 살아가면서 쌓여온 내 연약한 마음을 솔직하게 기록하는 일이다.
그리고 어쩌면 조금 더 잘해보려는 마음에서 태어난 두려운 감정이 나의 솔직한 글을 막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금도 여전히 나는 내 무지와 부족이 세상에 여실히 드러날까 염려되는 마음을 안고 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글쓰기에 대한 재능과 실력을 고민하는 것에서 벗어나, 내 삶과 생각이 온전히 담긴 글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묵혔던 마음의 소리를 따라 그저 풀어내는 방식의 기록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심장 박동을 쿵쿵 울려대며 새로운 문장을 탄생시켰다.
나는 여전히 내 이름을 곱씹지만, 조금은 다른 뜻으로 간직한다.
지은이라는 명사의 본동사인 ‘짓다’에는 ‘시, 소설, 편지, 노래 가사 따위와 같은 글을 쓰다.’는 뜻 외에도 다양한 뜻이 있다. 그중 하나는 ‘지우다’의 예스러운 말로, 감정을 지우듯 덜어낸다는 뜻이다.
아. 그렇다면 내 이름에 새겨진 뜻은 단순히 이야기를 짓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감정을 하나씩 풀어내며 맑은 마음을 만들어 내는 일이라고.
어떤 이름을 지니든, 어떻게 간직할지는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닮아갈 것이다.
그러니 그저 나름의 문장으로 삶을 해석하며 살아가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