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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Apr 16. 2022

이제 정말 전공자가 될 거예요

고졸에서 컴퓨터공학사 학위 수여까지

QA와 비전공자라는 인식에 대한 갈증과 결핍

24살 무렵 1년 정도 테스터로 커리어를 쌓고 있을 때 좋은 기회로 14명과 7개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모바일 게임 테스트 리더가 되었다. 누군가를 이끌어야 하는 자리가 주어지면서 스스로에게 수많은 챌린지가 주어졌다. 구성원들의 성장과 방향에 대해 길을 열어줘야만 했다. 나를 보면서 커리어를 시작하는 신입 테스터 분들께 좋은 모습을 보여드려야만 했다. 난 저렇게 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보단 나도 저렇게 되어야지 라는 선한 영향력을 주는 리더가 되고 싶었다.


내부 구조를 모르는 상태에서 진행되는 블랙박스 테스트 업무는 커리어 패스에 한계가 일찍 다가올 것이라며 매번 강조했다. 신규 입사자 교육 또는 인턴쉽 교육 간에도 더 나은 대우를 받고자 한다면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 과정이 불편했던 파트원도 있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기 좋은 얘기 보단 현실적이고 보다 미래지향적인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달콤하고 듣기 좋은 얘기를 잘 포장해서 하는 것 만이 리더십이 아니라 생각했다. 불편한 얘기는 불편하게, 좋은 얘기는 더할 나위 없이 아낌없이 나눠주는 게 리더라 생각했다. 


팀 전체 메일로는 퇴근 후 개발 스터디를 진행해보자며 권유했고, 조직 전체 메일로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 대해서 2년도 꽉 못 채운 새파란 신입이 다소 건방지게 글을 써 내려갔다. 나와 함께했던 파트원들은 테스트 이론 공부해야 한다는 잔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여전히 불편한 얘기를 공개적으로 꺼내는 리더가 될 것 같다.


돌이켜보면 해당 기간 때 SW 기술에 대한 갈증과 결핍이 극도로 심해졌다. 파트원분들께는 SW 개발을 알아야 한다고 목소리 냈지만, 정작 나는 코드 한 줄 짜는 것조차 버거웠고 개발이라는 환경 자체가 너무나도 낯설게만 느껴졌다. 나와는 다른 세계의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겨졌다. 학부생 때는 C언어 첫 수업 시간에 Hello World를 출력하는 방식을 보면서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라 생각했었다.


갈증과 결핍이 가장 심화되었던 시기는 QA의 인식과 대우 문제였다. 더불어 암묵적으로 QA는 QA 스스로가 비전문적인 일을 하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게 싫었다. 또한 대체 개발사에 속한 QA들은 뭐 그리 우리와는(아웃소싱-3자 테스팅) 다른 QA를 할까라는 생각에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애증 했던 첫 회사에서의 2년 3개월간의 커리어를 끝마치고 게임 개발사에서의 QA 커리어를 시작했다. 


고졸 비전공자라는 타이틀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QA도 전문적인 하나의 직업이자 꼭 필요한 존재임을 증명하고 싶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나부터 다른 직군의 고충과 역할과 노력을 이해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SW 개발과 QA는 한 몸과도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끝내 전공자의 타이틀을 달기 위해서 학점은행제를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냥 프로그래밍 공부를 시작하면서 관련 학습에 대해 폭넓게 공부를 했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지만, 당시로선 학점은행제를 통해 학위 취득을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후회 속에 살아가고 후회와 아쉬움을 통해 성장한다. 중요한 것은 한번 시작한 일은 끝을 보는 것이다. 끝을 봤기에 후회와 아쉬움이 생겼고 성장했다. 그걸로 충분하다.


학점은행제 컴퓨터공학사를 시작하다

18년 6월 28일에 개강하여 19년 연말까지 모든 과정을 끝내고 싶었다. 당시 고졸이었기에 보유 학점이 너무나 부족했다. 어쩔 수 없이 전공 자격증 3개를 취득해야만 했다. 정보처리 산업기사, 네트워크관리사 2급, 컴퓨터 활용능력 1급을 취득하여 과목으로 채울 수 없는 학점을 보충해야만 했다. 


1년 2개월 만에 학위 수여 가능한 방법은 찾았는데 이를 달성하려면 큰 장애물이 있었다. 19년 연말까지 모든 과정을 끝내기 위해선 모든 자격증을 정해진 일정에 1회 응시하여 취득해야만 가능했다. 단 한 번이라도 각각의 자격증에서 필기 또는 실기 탈락할 경우 19년 12월 목표는 달성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네트워크 관리사와 정보처리 산업기사의 경우 1년에 정해진 횟수에 의해서만 시험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많은 고민 끝에 초기 계획을 수정하지 않고 스스로 만든 압박감을 주는 환경에 스스로 뛰어들게 되었다.


평일 일찍 퇴근하는 날에는 집에 도착해서 전공 수업을 들었다. 다가오는 주말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보충하고자 했지만 들어야 할 전공 과목수와 빠른 진도로 인해 모든 걸 완벽히 이해하고 넘어가기엔 사실상 불가했다. 더불어 게임 개발사 재직 당시 현업 일정이 너무나 바빴기에 주말에는 미리 수업을 당겨서 듣지 않으면 전공과목에서 학점 보유가 힘들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또한 과목 이수와 중간고사 기말고사는 그렇다 치고, 자격증은 또 하나의 큰 허들로 다가왔다.


학위 수여 전략을 변경했다. 자격증 3개와 모든 수업을 이해하고 넘어가고자 한다면 나는 절대 이 과정을 회사 일과 병행하며 끝낼 수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우선 학위 취득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과제는 열심히 구글링 해가며 내가 이해했든 못했든 시간 내에 제출하여 과락을 면하지 않는 것이 목표였다. 자격증은 자격증 취득 그 자체에만 포커스를 맞췄다. 1년 2개월에 학사 학위를 수여하자는 목표가 설정되었고,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첫 번째 관문, 네트워크 관리사 2급 필기

네트워크 전공과목 수업을 듣긴 들었고, 정말 듣긴 들었지만, 필기에 나오는 용어와 맥락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멍청한 건지 어렵게 쓰인 건지도 모르겠고 구글링 해봐도 등장하는 개념과 용어들이 굉장히 낯설게만 느껴졌다. 대체 이걸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일까 싶었다. 눈으로 직접 보고 만지면서 무언갈 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추상적이고 모호하게만 느껴졌다. 

다행인 건 네트워크 관리사 2급 필기 같은 경우 출제 패턴이 문제은행 방식이었다. CBT에 접속해서 5년 치 출제된 모든 문제를 외우기 시작했고 모르는 용어와 개념은 구글링 해가며 따로 정리했다. 그렇게 주말마다 풀고 또 풀고 정리하고를 반복하다 보니 CBT에 있는 특정 연도 문제들은 지문만 보아도 답이 먼저 생각나게 되었다. 이해를 하고서 푼 건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목표 달성에 필요한 행위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필기는 높은 점수로 합격하게 되었다. 


두 번째 관문, 네트워크 관리사 2급 실기

실기는 랜케이블 제작, 라우터, 단답형, 그리고 에뮬레이터 설정 문제가 출제되었다. 랜케이블은 시중에 팔고 있는 랜케이블 제작 세트 장비를 구매했다. 대체 뭘 만드는 건지, 이걸 왜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아서 당시 게임 개발사에서 함께 근무했던 서버 개발자분께 1:1 과외를 받았던 재미난 기억이 떠오른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고 어떻게 하는지를 배운 다음, 주말에 카페에서 하루 종일 케이블만 만들었다. 그리고 손에 익을 무렵 시간제한을 두고 다이렉트 케이블 30개, 크로스 케이블 30개씩 만들어보니 케이블 제작은 정해진 시간에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우터와 단답형 그리고 에뮬레이터 설정 문제는 역시나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어서 그냥 모든 걸 외워버렸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블로그에 모든 문제들을 누군가에게 설명한다는 느낌으로 정리했고 끝내 합격하게 되었다. 


세 번째 관문, 정보처리 산업기사 필기

네트워크 관리사 2급 필기 공부 때와 마찬가지로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많아서 이해를 하든 못하든 일단 외워버렸다. 개념 정리가 필요한 부분들은 별도로 정리하면서 최근 5년간 출제된 문제들을 외워버렸다.

끝내 합격하게 되었지만 정말인지 아슬아슬했고 운이 정말 좋았다. 비전공자의 무덤이라 불리는 2과목 전자계산기 구조 파트에서 만약 1 문제만 더 틀렸다면 과락이 존재해서 평균 점수와 상관없이 무조건 불합격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2과목 전자계산기 구조는 도저히 봐도 봐도 외우기도 힘든 문제들이라서 과락까지만 어떻게든 점수를 확보한 뒤, 1과목 데이터베이스에서 고득점을 받고 나머지 과목은 평균 합격 커트라인보다 높게 받자는 시험 전략을 세웠다. 다행히도 하늘이 도운 건지 내가 의도했던 결과가 나타났고 그렇게 세 번째 관문을 넘기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네 번째 관문, 정보처리 산업기사 실기

가장 큰 장애물이라 느껴졌던 정보처리 산업기사 실기가 다가왔다. 가장 어렵고 배점이 높은 알고리즘 파트는 그냥 모든 알고리즘을 외우고자 노력했지만, 이전 시험과 달리 당장 뭘 어떻게 한다고 해서 외워지는 게 아니었다. 시험장에서 문제지를 받자마자 모든 지문을 확인했고 19년 연말 학위 수여는 불가하다는 것을 느꼈다. 


서로의 숨소리가 나지막이 들리는 시험장인지라 여기서 끝났다는 생각과 그간 해온 과정들이 스쳐감에 따라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오래 있기가 힘들었다. 시험 전날 아침 10시부터 당일날 아침 11시까지 가장 높은 배점이었던 알고리즘 파트를 최선을 다해 외우고 또 외웠지만 신기술 동향과 전산 영어 그리고 데이터베이스에서 내가 학습했던 문제가 출제되지 않았고, 알고리즘 파트는 설마 출제될까 싶은 문제인 이차원 배열 달팽이집 문제가 있었는데 그 문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18점이라는 처참한 점수로 불합격하게 되었고 시험이 끝나고 온 몸에 힘이 풀려 집에 돌아오는 길이 너무나 힘들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휴가도 써가며 공부했던 자신이 부끄러웠고 한심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할 정도로 당시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었다.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무언갈 얻어갈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배웠던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아닐까 싶은 순간이었다.


절망과 허탈과 포기 그리고 재도전

정보처리 산업기사 실기 탈락 이후 19년 연말 학위 수여 불가는 확실해졌다. 예정대로라면 정보처리 산업기사 실기와 컴퓨터 활용능력 1급을 동시에 준비했기에, 당시 컴퓨터 활용능력 1급 필기는 합격을 한 상태였고 정보처리 산업기사 실기만 합격만 된다면 남은 시험은 컴퓨터 활용능력 1급 실기뿐이었다. 하지만 정보처리 산업기사 실기에서 불합격했고 한동안 큰 허탈감과 상실감에 빠져 하루하루 보내게 되었다.


불합격해서가 아니었다. 시험장에서 문제지를 부여받고 손도 못 대고 무기력해진 내 모습에 너무나 화가 났었고 이걸 계속해야 하는 게 맞는 건가 싶을 정도로 당시 학점은행제를 중도 포기하려 했었다. 재밌는 사실은 내가 공부했던 문제들이 정보처리기사 문제로 나왔었고, 내가 공부했던 문제들은 정보처리 산업기사에 등장하지 않았었다. 지난번 필기 때 전자계산기 구조의 과락을 겨우 면했던 게, 어쩌면 실기 때는 천천히 여유롭게 공부하라는 무언(無言)의 메시지였을까, 여전히 나는 시험이 다가와서야 벼락치기를 했었고, 지금껏 그래 왔으니 앞으로도 합격할 거라는 요행을 바랐던 것 같다. 그리고 요행을 바랐던 나 자신에게는 더 이상 행운이 찾아오지 않았다.


이것만 끝냈으면 이제 곧 그간 모든 과정이 끝났을 테지만 모든 계획이 망가지자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동안 해온 게 너무나 아까웠고 여기서 멈추게 되면 나에 대한 주변의 평가가 달라질 거라는 생각에 포기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내 갈길이 있고 당신은 당신의 길이 있을 테니 안녕히 가세요 할 수 있겠지만, 당시엔 술과 담배에 삶을 의지할 정도로 많이 성숙하지 못했을 때였고, 감정 쓰레기통을 비워내는 방법을 잘 몰랐을 때였다. 


그렇기에 더욱 많이 힘들었지만 18년 6월 처음 학점은행제를 시작하겠다고 다짐했을 때의 순간으로 돌아가서 왜 이것을 하려고 했는지를 스스로에게 되물어보고 내년엔 꼭 합격하자라는 다짐과 함께, 그간 해왔던 벼락치기의 자격증 공부가 아닌 천천히 꾸준히 여유롭게 학습하여 취득하겠다는 공부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 한번 정보처리 산업기사 실기 취득 도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다시 찾아와 준 행운

절망과 상실감에 빠졌던 시기도 끝이 났고 다음 해 진행되는 정보처리 산업기사 실기 준비를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시작부터 달랐다. 여유를 가지고 꾸준히 학습했고 노트에 써가며 외우기 시작했다. 손을 굉장히 많이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이전에 처참하게 무너졌던 알고리즘 파트는 블로그에 하나씩 정리하며 최대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19년 3회 실기 때 18점이라는 점수로 불합격했던 경험을 떨쳐내고자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합격 커트라인 점수인 60점이 아닌 100점을 목표로 공부했었다. 그리고 끝내 80점대 점수로 합격하게 되었다. 


알고리즘 파트에서는 소인수분해 순서도 문제가 등장했고, C언어 팩토리얼과 JAVA 언어에서 간단한 계산 문제가 출제되었다. 데이터베이스는 개념 위주로 출제가 되었고, 전산 영어와 업무 프로세스 그리고 신기술 파트에서는 200개 정도 외웠던 것들 중에 대부분 출제가 되었다.


알고리즘은 당연히 만점을 받았고 내가 외웠던 것들 대부분이 출제되어서, 새롭게 출제된 문제를 제외하고 모두 맞출 수 있게 되었다. 운이 정말 좋았던 것 같고, 운도 노력의 결실이라는 점을 배우게 되었던 시기였다. 


마지막 관문, 컴퓨터 활용능력 1급 실기 7전 8기의 순간들

대한상공회의소의 마지막 자존심이라 불리는 컴퓨터 활용능력 1급 실기 취득만 합격하면 기다리고 기다렸던 컴퓨터공학사 학위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정보처리 산업기사 실기 합격 소식을 듣자마자 더 기다릴 것 없이 1급 실기 준비를 시작했다.


컴퓨터 활용능력 1급은 다른 시험과는 다르게 상시 시험이 진행되므로 내가 준비만 되면 바로 시험에 응시하여 2주 뒤 금요일에 결과 확인이 가능했다. 그래서였을까, 언제든 내가 원하는 시기에 시험을 칠 수 있다는 생각에 간절함이 사라진 건지 또 한 번 요행을 바라기 시작했다.

엑셀과 액세스가 뭐 그리 어려울까라는 생각에 한번 훑어보고 첫 시험을 응시한 결과, 엑셀 파트는 계산 작업 문제 지문에서 요구하는 사항을 해석하다가 시간이 끝나버렸고 엑세스는 손도 못 대고 끝나버렸다. 응시비 2만 원을 날렸고 이때 정신을 차렸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끝내 거듭되는 불합격에 만만하게 볼 시험이 아니라는 생각이 그제야 들기 시작했고, 다른 자격증 시험과 마찬가지로 공부한 내용들을 정리하며 학습하고 또 학습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불합격으로 인해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9월 이내로 실기 합격하지 못하면, 필기 합격 유효 기간이 만료되는 상황이었다. 끝내 8번의 시험 접수 그리고 3번의 당일 미참석(준비 미흡)과 5번의 응시 끝에 마지막에 치러진 시험에서 합격하게 되었다. 


엑셀과 엑세스는 더 이상 다루지 않기에, 다루지 않는 도구를 학습해서 시험을 쳐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끔찍하게만 다가왔다. 감정은 사라지지만 결과는 남는다는 사실을 되새기고 아무리 하기 싫을지라도 해야만 한다면 그냥 빨리 끝내버린다는 태도를 지녔으면 어땠을까 싶은 순간이었다. 아무쪼록 너무나도 끔찍했던 7전 8기의 순간들이 끝났고 주어진 결과를 받을 차례가 다가오게 되었다.


3년의 결실과 끝맺음

신입 테스터 시절 ISTQB 자격증 취득 간에 소프트웨어 내부 구조에 대한 갈증이 더욱 높아졌다. 이후 7개 프로젝트 14명이 속한 모바일 파트를 리딩 하면서 개발 지식 습득에 대한 갈증은 더욱 높아졌다. 내부 교육 당시에도 소프트웨어 내부 구조를 모르는 상태에서 진행하는 테스트는 수박 겉할기식의 테스트뿐이 되지 않는다며 강조했지만 정작 나조차도 개발에 대해 무지한 상태였다. QA Testing 역량 강화에도 평일, 주말이 벅찬 상황에서 개발 지식까지 학습하려니 부담감은 심했다. 그 당시엔 서로 다른 영역과 지식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2018년 6월, 종로에 위치한 학점은행제 교육기관을 방문했다. 당시 QA 아웃소싱에서 2년 3개월 커리어를 끝으로 게임 개발사 QA팀 리빌딩 포지션 스타트업에 합류한 상태였다. 난 첫회사뿐 아니라 QA 재직 당시 경험한 3개의 회사에서 모두 개발 지식을 강조했다. 그중에서도 테스트 자동화에 관심이 많았다. 블랙박스 테스트 실무를 하다 보면 너무나도 비효율적인 상황이 많았기 때문이다.

단순 반복 테스트에 리소스를 투입하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또한 테스트 당시의 기억, 문서에 기입된 결과만으로 테스트 결과를 신뢰하는 것 외에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계속 고민했다. 주 단위로 진행되는 라이브 서버 CDN 패치와 빌드 업데이트 점검 간에 파트 휴먼 에러를 경험한 것도 한몫했다. 그래서일까, 기술에 대한 이해를 높여야겠다는 생각으로 학점은행제 컴퓨터공학사 과정을 시작했다.

컴퓨터공학사 졸업에 3년이 걸렸다. 자격증을 취득하지 않고 필요한 학점을 과목으로 대체했다면 보다 편하게 졸업이 가능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관련 학과를 졸업함에 있어서 진정성을 보이고 싶었다. 실제로 네트워크 관리사와 정보처리 산업기사를 공부하면서 비전공자인 내가 전공자들은 무엇을 배우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격증 취득이라는 결과물을 남겼다. 특히 산업기사에서 배운 내용들이 그때 당시엔 와닿지 않았는데, 지금 새로운 길을 걷고 있는 상황에서 머릿속에 큰 지도가 그려지는 것 같다. 컴퓨터 활용능력 1급 또한 앞으로 실무에서 사용할 일은 없겠지만 엑셀의 VBA 프로그래밍과 액세스의 쿼리, 데이터베이스 등의 학습을 통해 낯설었던 개발 용어들이 조금이나마 익숙해지는 시간이 되었다.  


세상에 필요 없는 경험과 시간은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와서야 '학점은행제를 왜 했을까, 차라리 개발 공부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싶지만 그 당시 내가 선택한 것이라면 그 이유가 있을터, 그 과정을 해냈다는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면 되는 것 같다. 

무언가를 끝맺음한다는 것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제 정말 전공자로서 내게 주어진 위치와 역할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새로운 분야와 새로운 길을 목표로 하게 됨으로써 앞으로 수많은 장애물을 넘어서야겠지만, 직장과 병행하며 학점은행제 컴퓨터공학사를 끝마쳤던 순간들과, 새로운 분야에서의 3개월을 잘 버텨왔으니, 앞으로 무엇을 목표로 하든지 간에 시작을 했다면 끝을 본다는 태도를 지니고자 노력해야겠다.


3년간의 기억들을 이제야 흘려보낸다. 좋았던 감정, 싫었던 감정, 힘들었던 감정, 괴로웠던 감정, 불안하고 초조했던 감정과 같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감정을 느꼈던 시간이었다. 짧게나마 정말 짧게나마 이렇게 끝마쳐본다. 이렇게 흘려보내야 새로운 시작을 할 때에 새롭게 느껴지는 감정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3년간 정말 너무 고생했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건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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