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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지원 Jan 08. 2022

중국 교환학생 후기

교환학생 가기 전에 생각했나요?


  2021년 2월, 도합 46킬로그램의 캐리어 두 개에 모든 짐을 싣고 상하이로 떠났다. 대학교 국제협력본부의 국제교류 프로그램에 합격하여 상하이교통대학(上海交通大学) 조선공학과에서 교환 학기를 보내게 된 것이다. 새출발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교환학생을 신청했고, 설레는 마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교환학생을 결심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코로나19 팬데믹 탓에 이전과는 달라진 대학 생활을 무기력하게 지속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일상을 바꿔놓은 코로나라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색다른 경험을 해 보고 싶기도 했다. 조선공학으로 유명한 상하이교통대학에서는 어떤 전공수업을 할지 궁금하다는 것도 한몫했다. 다 떠나서, 고등학생 때부터 쉼없이 달려온 스스로에게 휴식을 주고 싶었다.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도시에서 학업의 부담을 내던지고 자유로운 여행을 즐기고 싶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상하이는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2주의 중국 정부 지정 격리 과정도 힘들었는데, 그보다 더한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어를 1년 공부해 갔다고는 하지만 현지에서 막힘없이 말하기에 내 실력은 한참이나 부족하게 느껴졌다. 문화 차이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내게 화를 내는 줄 알고 위축되었던 적도 여러 번이었고, 중국의 기름진 음식이 맞지 않아 날이 갈수록 한국 음식을 간절히 그리워하게 되었다. 영어 강의인 줄만 알았던 전공 수업에서는 외국인이 나 하나밖에 없었던 탓에 대부분의 수업이 중국어로 이루어졌고, 중국어를 잘 하지 못하니 친구를 사귀기도 어려웠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나는 상하이 곳곳을 여행해 보겠다는 처음의 다짐도 잊은 채로, 기숙사에 틀어박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침에 강의만 듣고 기숙사로 돌아와 불을 다 끄고 커튼을 친 방 안에서 누워 잠을 자거나 영화를 봤다. 중국어를 공부해보겠다는 초기의 다짐도 모두 잊은 채로, VPN 서비스로 인터넷을 연결해 유튜브로 한국 예능 클립을 봤다. 배가 고프면 타오바오에서 주문한 한국 인스턴트 음식을 먹고, 디저트로는 배달 어플을 써서 늘 같은 카페에서 같은 메뉴를 주문해 먹었다. ‘유학 실패 사례’로 교과서에 실려도 좋을 만한 모습이었다. 


  상하이에서 나는 완벽한 타인이었다. 심지어 검은 머리 검은 눈의 동양인이라 마스크를 쓰면 현지인들과 차이가 없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현지인들은 내가 당연히 중국인인 줄 알고 평소처럼 말을 건넬 뿐이었는데, 내게는 늘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중국어가 너무 벅차게 느껴졌다. 


  내게 중국어로 말을 거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不好意思,我不是中国人。我的汉语不好,请再说一遍。(죄송합니다, 저 중국인 아니에요, 중국어 잘 못해요. 다시 한 번 말해주세요.)’라는 말만 반복했고, 그럴 때마다 현지인들이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전 국민이 아는 대중교통 이용 방법을 몰라서 나 혼자 버스 기사와 짧은 중국어로 실랑이를 했고, 매장에서 아무렇게나 골라 산 옷은 도망치듯 돌아온 후에 입어 보니 크기가 맞지 않았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해도, 나가서 중국 현지인들과 부대끼다 보면 위축되고 주눅드는 경험이 수없이 반복되는데 어떻게 나갈 마음이 들겠는가. 자신감이라는 게 매일매일 푹푹 깎여나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무서운 일은, 전화를 받는 일이었다. 배달이나 택배 때문에 종종 전화가 왔는데, 그때마다 중국어로 걸려 온 전화를 받을 자신이 없어서 머뭇대다가 전화가 끊어지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전화 하나를 못 해서 택배가 온 줄도 모르고, 기숙사 택배 보관소에 몇 주나 내 택배를 방치해 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가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이 정점을 찍는 순간이었다.


  길을 걷고, 버스를 타고, 돈을 결제하고, 음식을 주문하고, 물건을 사고……. 한국에서는 당연히 할 수 있는 일들이 중국에서는 매 순간이 도전이었다. 처음에 얼마나 원대한 야망을 품고 왔는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 낯선 곳에서 나는 절대 그 도시에 융화될 수 없는 완벽한 타인일 뿐이었다. 


  중국에서의 하루하루를 견뎌내면서, 내가 그동안 한국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면 그것이 그 자체로 당연한 것이 되고 아무 위화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는 것이 사실은 엄청난 권력이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절대 이것을 깨달을 수 없었을 거라는 사실까지도. 당연함이 주는 안도감은 바로 그것을 박탈당했던 경험이 있어야만 알게 되는 것이었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1년 계획했던 교환학생 일정을 한 학기로 줄이고 한국에 돌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돌아갈 비행기 표를 알아보던 즈음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 평소처럼 뜬눈으로 지새며 창밖의 가로등 불빛을 하염없이 지켜보던 밤이었다. 찰나의 순간, 불을 끈 방 안에 바람이 확 불더니 갑자기 풀벌레 소리가 쏟아지듯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비 온 뒤 젖은 흙내음이 방 안을 온통 메우고 가로등 빛은 너무 밝게만 느껴지던 순간. 문득 책장에 꽂아 둔 시집이 생각났다. 선물 받았던 『정본 백석 시집』,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던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 (중략) …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 어쩜 이런 문장이 있을까. 시 한 편으로, 나는 비로소 온전히 이해받는 기분이었다. 수험생 시절 그저 교과서 속 문학 지문의 단편으로만 기억하던 시가 글자 하나하나 내 가슴으로 들어와 의미가 되었다. 타지를 헤메다 남신의주 유동에 있는 박시봉 씨의 방에 세를 들어 살게 된 백석을, 상하이 민항의 기숙사에 들어 살게 된 내가 백 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셈이었다.


  백석이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는 동안, 나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람과 대화를 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에 실패할 때, 나 혼자의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절절히 깨달았다. 상하이에서의 생활은 내 뜻이며 힘으로 이끈다고 이끌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침이 오면 강의를 가야 하고, 배가 고프니 밥은 어떻게든 먹어야 하고, 먹을 게 떨어지면 장을 봐야 하고……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것 같았다’가도, 어떻게든 살아지는 거였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더 큰 무언가, 이를테면 시간이라는 흐름 속에 어떻게든 내가 굴려지면서 살아지는, 그런 것이었다. 


  백석의 삶은 나의 삶이자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방인의 삶이었다. 공감은 깨달음이 되고 이내 시의 마지막 행으로 귀결되었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갈매나무가 있을까.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 말이다. 


  갈매나무가 실제로 박시봉 씨 집 마당에 심어져 있었을 리 없다. 갈매나무는 백석의 마음에 표상으로, 굳은 의지로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도 갈매나무가 물리적 실체로서 존재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나는 나를 갈매나무로 삼기로 했다. 나라는 인간이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이해하여, 그것을 갈매나무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글을 썼다. 백석이 그러하였듯.     


  나는 이곳에서 내가 진정으로 과민한 감성의 소유자임을 깨닫게 되었다 과민하다는 것은 반응을 위한 자극의 역치가 지극히 낮다는 것이다 …… 한 번 활시위를 떠나간 생각의 화살은 제어가 되지 않는다 온갖 잡다한 감상과 추측으로 이어지던 화살은 가끔 서러울 만큼 무차별적으로 공평하게 나를 향하기도 했다 보통 그것들은, 이 거대한 욕망의 솥단지이자 동방의 진주에서 희부연 그림자로도안 남을 족적을 남기는 너는 그래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식의 물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따금씩 내 생각에 질식해 죽을 것 같았다 …… 상하이는 결코 평범하지 않고 반짝반짝 빛나는 도시이니 그 안에서 살아가는 나 역시도 응당 빛나는 존재여야 하는데 어쩐지 이 거대한 도시의 야경이 너무 빛나는 나머지 나의 빛깔은 바래지기만 하는 것 같아서. 상하이가 나를 보란 듯이 짓눌러 죽이는 것 같았다.


  휴대폰 메모장을 급하게 켜서 작성한 글은 두서없고 거칠었다. 그러나 그만큼 솔직한 진심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부글부글 끓던 속을 다 쏟아내고 나니 숨이 좀 트였다. 그러자 생각지도 못했던 변화가 찾아왔다. 나는 글로 말미암아 비로소 나를 용서하게 된 것이다.     


  …… 나는 나에게 작은 선물을 주기로 했다. 낮에는 말이 통하지 않는 죄로 한화 오천 원의 손해를 입고 세 시간을 내리 곱씹으며 세상을 저주하고 스스로를 비난하고 속으로 엉엉 울었으면서도 저녁에는 다시 설렘을 가득 안은 채로 다음 여행지를 알아보며 비행기표를 10위안이라도 더 깎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앱을 뒤질 수 있는 사람이 흔치는 않다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낯선 이국의 땅에서 이렇게까지 서러워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고. 철이 명검이 되기 위해 수십 번의 담금질을 견뎌야 하듯, 이 또한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라고. …… 그래 나의 과민함은 내가 한 번의 담금질로도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던가. 말하자면 나는 재료공학적으로, 영률이 높은 철이었던 셈이다.   


  비로소 나는 내가, 편해지고 싶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위로와 인정을 받고 싶었다는 것도. 안개 낀 것처럼 흐릿하던 속내가 글을 쓰면서는 술술 풀렸다. 스스로에게 가혹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딱히 다른 방법이 없어서, 혹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스스로의 미욱한 부분만을 비난하고 원망하던 내가, 비로소 아등바등 살아낸 그 모든 과정을 마주하고 인정하기로 한 순간이었다. 그야말로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에서처럼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였다. 그리고 이것으로 충분했다. 장담하건대, 이런 글을 다시 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학기가 끝났다. 기말고사는 잘 봤다고 하긴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아주 망친 것도 아니었다. 망쳐도 뭐 어쩌겠는가? 중국어로 생판 처음 보는 유체역학을 공부했는데 대번에 잘해 낸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수업을 끝까지 듣고 시험도 봤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여행을 떠났다. 충칭(重庆)과 청두(成都)에서 쓰촨 요리를 원 없이 맛보고, 번화한 중국 도시의 야경과 길거리의 활기를 즐겼다. 베이징(北京), 항저우(杭州), 장가계(张家界), 선전(深川), 충칭(中京), 청두(成都), 후난(湖南)까지. 상하이를 포함해 내가 직접 여행한 중국 도시만 여덟 곳이었다. 


  낯선 사람들과 대화하고, 길거리 음식을 사 먹고, 명승고적을 직접 방문하는 그 모든 순간이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가슴에 남았다. 충칭과 청두에서 한국을 좋아하는 중국인 대학생들을 만나 즉석에서 함께 여행한 것 역시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물론 바가지를 쓰기도 하고 길을 잃기도 했지만, 마음속에 갈매나무를 심어 훨씬 단단해진 나는 좌절하지 않았다. 뭐 어쩌겠는가? 나는 이미 너무나도 잘해 내고 있는데.


  다섯 달이 지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지막으로 중국 대륙의 모습을 두 눈으로 담으면서 내 안에 무언가가 영영 바뀌었다는 걸 실감했다. 중국을 떠나는 것은 전혀 아쉽지 않았으나 그것은 중국 생활이 힘들어서라기보다는, 새롭게 거듭난 내가 한국에서 해낼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다섯 달의 시간은 분명 즐겁기만 했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시간을 되돌려 다시 교환학생을 신청하는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중국행을 선택할 것이다. 


  인생의 모토로 삼고 자주 인용하는 말 중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을 거쳐 인간은 성숙한다’는 말이 있다. 사람은 낯선 곳에 있을 때, 비로소 자신과 다른 것들을 마주하면서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은 훌륭한 투쟁의 장이었다. 그동안 한국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아무 위화감 없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을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축복으로 느꼈지만, 사실은 ‘당연함’이라는 것은 감각을 가리고 신경을 무디게 하는 독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모두가 나와 다르게 말하고 나와 다르게 행동하는, 당연함이 사라진 환경에서는 오롯이 ‘나’뿐이다. 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행동하였는지를 사색하다 보면 진정한 ‘내’가 남는 법. 그것을 얻는 대가로 다섯 달의 시간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이 다섯 달 덕분에 앞으로 나의 일생은 더욱 찬란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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