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ico>와 영화 <알라딘>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과 악수를 합니다. 오랜 만에 만난 사람과 악수를 하기도 하지요. 또한 우리는 손을 잡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가까운 거리를 짐작하기도 합니다. 손을 잡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겠지만 가장 바탕이 되는 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끼리의 악수는 앞으로 두 사람이 쌓게 될 신뢰를, 오랜 만에 만난 사람끼리의 악수와 손을 잡은 이들의 다정함은 바탕에 쌓여있는 신뢰를 나타냅니다. 누군가와 함께 일을 할 때 ‘손을 잡았다’고 표현하는 것도 비슷한 이치이지요.
이러한 사람 간의 신뢰는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여무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도 쌓이게 되는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낯선 사람에게는 신뢰를 가질 수 없는 것일까요? 여기 두 가지 사례가 있습니다. 게임 ‘이코’와 영화 ‘알라딘’의 등장인물들은 어떤 계기로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이코는 뿔이 난 소년입니다. 이코가 사는 마을에서는 뿔이 난 아이가 태어나면 바다 위에 우뚝 솟은 아무도 모르는 성에 제물로 바치게 되어있습니다. 올해는 이코가 제물로 바쳐질 차례입니다. 마음이 착한 이코는 얌전히 마을 어른들과 함께 성으로 향합니다. 성 안에 갇힌 이코, 그런데 작은 지진에 의해 이코는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알라딘은 시장 부근에서 원숭이 아부와 함께 살아가는 소년입니다. 그는 시장의 물건을 훔치는 좀도둑이긴 하지만 훔친 빵을 굶고 있는 아이들에게 주는 맑은 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 눈에 왕궁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에서 비록 지금은 남루하지만 언젠가 멋진 삶을 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을 돌아다니던 이코는 천장에 매달려 있는 새장 속의 소녀를 발견합니다. 소녀의 이름은 요르다입니다. 온통 하얀 빛깔의 요르다가 무슨 말을 건네지만 이코는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이코는 요르다와 함께 낯설고 무서운 성에서 벗어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끼니를 때우기 위해 아부와 함께 시장을 돌아다니던 알라딘은 아름다운 소녀를 발견합니다. 그 소녀는 바로 알라딘이 동경해 마지않는 왕궁의 공주 쟈스민. 답답한 왕궁에서 몰래 빠져나와 시장 구경을 하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도둑으로 몰리게 된 그녀를 알라딘과 아부가 기지를 발휘해 구해냅니다.
갑자기 어디선가 검은 기운이 나타났습니다. 요르다에게 다가가더니 땅으로 끌고 사라지려고 합니다. 이코는 얼른 뛰어가 요르다의 손을 잡고 끌어올립니다. 이 기운들은 어디서부턴가 자꾸 나타납니다. 이코는 막대기를 사용해 이 기운들을 쫓아냅니다. 까마득한 높이와 도무지 파악조차 하기 힘든 구조의 성을 헤쳐 나가는 데 이코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는 오로지 막대기 하나뿐입니다.
알라딘은 쟈스민을 데리고 자신의 거처로 갑니다. 왕궁을 바라보며 알라딘은 그 화려함에 대한 자신의 동경을 이야기하지만 쟈스민은 왠지 쉽게 수긍하지 않는군요. 얼마간 이야기를 더 나누었을까, 갑자기 아까 자신들을 쫓던 경비대가 나타납니다. 도망치기에는 길이 막힌 상황, 당황한 쟈스민에게 알라딘이 손을 내밀며 이야기합니다.
“Do you trust me?”
사악한 마법사 자파는 알라딘의 순수함을 이용해 램프를 얻으려고 하지만 날랜 아부 때문에 결국 램프는 알라딘이 차지하게 됩니다. 드디어 알라딘이 지니를 만나게 되지요. 알라딘은 꿈에 그리던 왕자가 됩니다. 위풍당당하게 왕궁으로 들어간 알라딘은 쟈스민을 만나려고 하지만 그녀는 만나주지 않습니다. 원체 남자에게 관심이 없던 그녀인 데다, 길거리에서 만난 알라딘을 마음에 품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알라딘은 마법의 양탄자로 쟈스민의 호기심을 이끌어 냅니다. 양탄자에 탈 것을 권하며 알라딘은 손을 내밀며 이야기합니다.
“Do you trust me?"
‘성에 혼자 남은 뿔 달린 소년이 연약한 소녀와 함께 성을 탈출한다’라는 컨셉은 사실 게임으로서는 다소 애매한 것입니다. 바로 ‘연약한 소녀’라는 존재 때문입니다. ‘탈출’을 소재로 한 대부분의 게임은 박진감을 느끼게 합니다. 강한 능력이나 튼튼한 몸을 가진 ‘청년’ 내지는 ‘전사’가 앞을 가로막는 각종 장애물들을 헤치며 험난한 지형과 구조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하는 장면들이 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코’에서는 작은 소년이 너무나도 크고 적막한 성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심지어 탈출에 그다지 도움을 줄 수 없는 ‘연약한 소녀’와 함께요. 그러니 게임으로서 과연 어떤 재미가 있을까 싶어 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게임은 기발한 아이디어로 이러한 우려를 단번에 씻어냅니다. 바로 ‘손을 잡는다’라는 요소를 채택한 것이지요.
패드의 ‘R1’ 버튼을 누르면 이코는 요르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밉니다. 요르다는 그 손을 잡지요. 이 때, 패드의 진동 기능이 작동합니다. 진짜 손을 잡을 때처럼 따스함이 느껴지는 건 아니지만, 왠지 정말 누군가의 손을 잡는 것 같습니다. 이제 게임의 목적은 ‘탈출’이 아니라 ‘보호’가 됩니다. 성을 탈출할 때까지 요르다가 안전하도록 잘 보호하는 것이지요. 서정적인 게임의 분위기도 그러하지만, 주로 ‘경쟁’을 목적으로 하는 게임에서 ‘보호’라는 요소를 통해 신선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이코와 알라딘. 두 소년은 요르다와 쟈스민에게 손을 내밉니다. 왜 그들은 손을 내민 것일까요. 글쎄요. 어쩌면 이 부분은 빈 칸으로 남겨두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상상력을 발휘하는 만큼 다양한 이유가 덧붙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굳이 이야기해보자면, 아마도 이코는 요르다를 지키기 위해서였을 테고, 알라딘은 쟈스민을 구하기 위해서, 그리고 쟈스민과 함께 양탄자를 타기 위해서 손을 내밀었을 것입니다.
요르다와 쟈스민은 이코와 알라딘이 내민 손을 잡습니다. 왜 그들은 내민 손을 잡았던 것일까요. 마찬가지로 빈 칸으로 남겨둘수록 좋을 것 같지만. 굳이 이야기해보자면, 요르다와 쟈스민이 이코와 알라딘을 ‘믿기로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별다른 방법이 없긴 했지요. 요르다는 이코가 아니면 성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고, 쟈스민 역시 알라딘의 손을 잡지 않으면 경비대에게 붙잡혀 가거나 신기한 경험을 할 기회를 놓치게 되니까요. 그런 점에서 신뢰는 선택의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처음 이코와 알라딘이 요르다와 쟈스민에게 손을 내민 그 순간, 요르다와 쟈스민은 시간이 흐른 뒤의 결과를 모두 감안해서 결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선택을 한 것이지요.
삶에는 수많은 가능성과 우연들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나간 시간을 자꾸 돌아보게 됩니다. ‘그때 이랬더라면’이라는 가정을 해보게 되기도 합니다. 선택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당시 다른 선택을 했다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들을 상상해 봅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지금’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다른 이에게 손을 내민다는 것은 그 수많은 가능성과 우연 속에서 선택의 갈래를 만드는 것입니다. 내민 손을 잡는 것은 그 선택의 갈래에 함께 들어서는 것입니다. 미래를 확신할 수 없듯, 내민 손을 잡는 결과에 대해서도 확신할 순 없을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손을 잡는 순간 새로운 모험이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알라딘이 쟈스민에게 건넨 “Do you trust me?”라는 말은, 이코가 요르다를 부르는 소리는 정말 나를 믿는지 확인하는 것보다 초대에 가까운 물음인 것입니다.
(* 이 글은 <게이머즈> 2013년 5월호에 수록되었습니다. 연재분 게재가 끝난 후 부터 이 지면을 통해 시리즈를 계속 이어갈 예정입니다.)
알라딘 <The Aladdin>(1992)
1992년에 개봉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가난하지만 심성이 고운 떠돌이 알라딘과 부모의 정략결혼을 피해 왕궁에서 도망 나온 공주 쟈스민이 시장에서 우연히 만나 여러 사건들을 겪게 된다. 왕국을 차지하려는 마법사 자파의 음모를 램프의 요정 지니의 도움을 받아 헤쳐 나간다. 알라딘과 자스민이 양탄자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장면과 OST "A Whole New World"가 특히 인기를 끌었으며, 아카데미 영화상과 골든 글러브 영화상에서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코 <Ico>(2001)
2001년에 출시된 어드벤처 게임. 2002년 2월 국내 PS2 정식 발매 당시 동시 발매되었다. 안개의 성에 제물로 바쳐진 뿔이 달린 소녀 이코가 성 안에서 우연히 만난 소녀를 데리고 성을 빠져나오는 것이 주요 목표이다. 연약한 소녀를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연기로부터 보호하면서 미로 같은 성의 길을 찾는 과정이 매우 서정적인 연출과 함께 전개되어 게이머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후속작 <완다와 거상>(2005)이 있으며, 3편 격에 해당하는 <라스트 가디언>은 오랜 기간 동안 출시가 미뤄진 끝에 2016년으로 출시 일정이 확정되었다.
Ico OST 'You were t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