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마국텔이 있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테러방지법 직권상정 저지를 위해 야당 의원 38명이 192시간 26분 동안 이어나갔던 필리버스터(filibuster)가 다소 허무하게 끝이나 버렸다. 다수당이 직권상정한 테러방지법은 표결 결과 통과되었고, 감시받지 않을 권리를 위해 (그렇다, 내가 나쁜 짓을 하고 있기 때문에 찔려서가 아닌 것이다) 텔레그램 등으로의 사이버 망명을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기사들이 농담처럼 이어지고 있다. 예전부터 사용하던 텔레그램에 며칠 사이 새로 가입한 이들이 있다는 메시지가 계속해서 뜨고 있는 건 기사들이 그저 우스갯소리는 아니라는 것을 반증해주고 있는 듯하다.
이번 필리버스터는 여러모로 의미 있는 지점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테러방지법에 어떠한 독소조항이 있었는지에 대한 일목요연한 설명을 하는 국회의원들을 보면서 그동안 무능력과 사리사욕의 대명사로 여겨지던 그들에 대한 재조명 또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192시간 동안 필리버스터라는 국가의 중대한 사건들을 보도하던 언론의 행태는 꽤나 인상 깊은 것이었다. 필리버스터가 시작되자, 우선 언론에서는 필리버스터의 시작과 그 의미에 대한 보도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까지였다. 이후로 우리가 언론에서 볼 수 있었던 필리버스터에 대한 소식은 모 의원이 몇 분 동안 필리버스터를 했고, 그것은 세계적으로 어떤 기록이었다는 숫자놀음이었다. 기사의 댓글에 많은 이들이 기록보다는 필리버스터를 왜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내용들이 이야기되고 있는지에 대해 보도해 달라고 해도 언론은 묵묵부답이었다.
철저한 무관심, 언론의 무관심은 대중들의 눈과 귀를 틀어막는 것이다. 의회민주주의에서 행할 수 있는 논리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의 의사표현 방법 중 하나인 필리버스터를 보고 정치권이 분열되고 있다라고 멘트를 한 뉴스는 젊잖은 편이었다. 종편의 대다수 채널들에서는 필리버스터에 대한 의미를 깎아내리기에 바쁜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대중들은 더 이상 기존의 언론에서 틀어막는 정보에 안주하지 않았다. 국회방송을 통해 내보내지고 있던 필리버스터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연일 생중계되었고 대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밤잠을 설쳐가면서까지 이를 시청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갔고, 유튜브의 채팅창과 SNS에서는 연일 필리버스터에 대한 내용들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그러면서 마국텔(이하 마이 국회 텔레비전)이란 말이 생겨났다. 실시간 개인 방송의 콘셉트로 진행되는 예능 프로그램인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하 마리텔)에서와 같이 생중계를 하는 유튜브 채팅창을 통해서 시청자들이 의사를 표명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지어낸 말이었다. 우스갯소리처럼 퍼저나간 말들은 금세 일종의 2차 창작을 만들어 냈다. 트위터의 '안사요(@not_buying)'란 유저가 마리텔의 로고를 패러디해 아래와 같은 로고를 만들면서 사람들은 생중계되는 유튜브 채널들을 가지고 말 그대로 놀기 시작했다.
유희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에 대해 이야기한 호이징하(Johan Huizinga)에 의하면 맹목적인 힘에 의해서 결정되어 버리는 세계에서 그 한계를 돌파하는 방법은 '놀이'이다.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정신이 부수고 다시 자리를 잡을 때 하나의 과잉(superabundance)으로 작용하는 것이 놀이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거대한 힘을 부여받은 언론에서 철저하게 무시한 필리버스터라는 콘텐츠가 대중들 스스로에 의해 조명을 받게 되고, 이것이 놀이를 통해 콘텍스트 된 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가볍게 소비한 것이 아니라, 거대한 힘을 재편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을 대중들이 스스로 모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이 독주를 할 때 다양한 방법으로 이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는 것 만드로도 (사실 필리버스터의 맺음새가 좋지 않아 이러한 의미들의 효용이 폄하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있었던 필리버스터와 이를 대중들이 소비한 마국텔이라는 코드는 여러모로 의미 있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들이 일제히 침묵을 했다는 것은 꽤나 아픈 부분이다. 공영방송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나, 종편채널들이 보여주는 기본적인 저널리즘(journalism)의 실종과 같은 모습들은 전부터도 충분히 우려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막상 일이 닥치니 예상했던 것보다 더했던 것이다. 특히 능동적으로 자신들이 찾아보아야 하는 정보를 제외한 방송과 신문 등의 보편적이고 그 영향력의 범위가 비교적 넓게 퍼져있는 언론들의 일괄적인 침묵은 다소 충격적인 부분이었다. 방송이 하나의 세력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위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국가가 거대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 방송을 조직적으로 장악하는 것은 민주주의와는 상당히 이질적인 부분이다. 그러기 때문에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는 이들이 방송 장악에 둔감한 것은 꽤나 아이러닉 한 일이다. (이런 면에선 대한민국의 보수가 수호하려는 것은 사실 민주주의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주로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그들이 그렇게 안티테제라 여기며 배척해 왔던 사회주의에서 나타났던 모습이다. 방송의 장악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대표적인 예는 구소련, 즉 소비에트 연방에서였다.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1960년대에 세워진 컨트롤타워인 오스탄키노의 탑으로 중앙에서 모든 방송을 장악하고 통제했다. 때문에 그 오스탄키노의 탑을 일컬어 시인 보즈네센스키는 "이념 주입을 위한 주사기(шпринце для идеологически инъекций)"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그들이 방송을 장악했던 이유는 명백했다. 자신들의 정책에 맞게 대중들을 제한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민주주의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방송은 또 하나의 오스탄키노의 탑이 되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오스탄키노의 탑에서 매일 틀어주던 뉴스 프로그램 브레먀(вре́мя)에서는 주로 정보의 은폐와 축소를 통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정권의 나팔수'라는 다소 자극적인 어휘가 무례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번 필리버스터를 다루는 언론의 행태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이러한 문제가 이번 마국텔을 통해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데서 그 문제의 심각성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세월호 사건 당시에도 언론은 그러했고, 세월호 정국이라는 것이 여전히 진행되면서 정부 정책 관련 중대한 사안들이 산재한 가운데 공중파 방송 3사에서 하루 종일 월드컵 경기 화면만 반복해서 내보냈었다. 국민들은 오스탄키노의 탑 아래에 있으면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일상을 지나왔다. 물론 이는 언론이 아무 일도 없다고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핍진한 일상에서 누적된 '피로도'로 인해 대중들이 문제시되는 이슈들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해결 가능성이 요원하고, 개인이라는 작은 힘이 미칠 수 있는 것이 미미하다는 극심한 무력감과 싸우면서 관심을 잇기를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나서 사람들은 이전 소비에트 연방 시절을 그리워하고 선호한다고 대답한 설문이 있었는데, 방송 안에서 양질의 예술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것도 그 이유이겠지만 불편한 진실, 어렵고 해결하기 어려워 보이는 현실을 마주하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철저한 통제 속에서 불편한 진실은 마주하지 않았던 이들이 모든 정보가 열려있는 상태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정보가 열려있다는 것이 항상 나에게 이로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들도 그러한 상황에 처해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엄청난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났다. 슬픔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했는데 또 다른 일들이 피로감을 가중시킨다. 삶의 핍진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속화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사상누각과 같은 삶이 이어진다. 함몰 웅덩이 위에 올려진 아슬아슬한 집 같다. 주변이 온통 간신히 버티고 있는 일상인데 아직 해결되지 않은 사안이나 정치적 이슈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예민하게 이야기하는 이들은 오히려 공동체 의식을 해치고, 안정을 위협하는 이들로 눈초리를 받게 되지 않을까. 아니 이미 서로를 그렇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테러방지법이 통과되고 나서 SNS 상에서 저는 사실은 정부의 정책에 공감해 왔습니다란 글들이 농담처럼 올라오고, 텔레그램 등으로의 사이버 망명이 빗발치는 것은 단순히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정부에 대해서 비판적인 의사를 표명한 다음에 바로 "판사님, 이 글을 저희 집 고양이가 썼습니다"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붙여 넣는 일종의 유희가 존재하는 것도 그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파놉티콘(Panopticon)이 좀 더 굳건해지는 것이 아닐까.
마국텔은 우리가 현재 오스탄키노의 탑 아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해 준 일종의 장치였다고 생각한다. 오스탄키노의 탑 아래에서의 안식은 거짓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있는 것은 기만이다.
* 이 글은 <직썰>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