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시혜적 입장에서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글짓기 학원에서 중학생들을 만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주말 동안 있었던 일들을 나누고 있었는데, 한 학생이 지난 주말에 장애인 복지시설에 봉사를 다녀왔다고 하면서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했다. 학교에서도 봉사활동을 워낙 많이 해서 봉사활동 우수상을 받는다는 그 학생은 자신이 중학교 3년 내내 장애인 복지시설을 다니면서 느꼈던 바를 이야기했는데,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서 어른들이 기대하던 것과는 정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학생은 그 시설에 있는 장애인들이 얼마나 무례하고 위생적으로 결함이 있으며, 자신이 그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듣고 있던 나의 표정이 변하는 걸 감지했는지, 첨언도 잊지 않았다. 선생님이 아마도 그들을 접해보거나 하지 않아서 그렇지, 귀중한 시간을 들여 그들을 돕겠다고 희생하고 있는 사람 입장에선 마냥 좋게만 볼 수는 없는 거예요라고.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학생의 경험과 그것을 통해 얻어진 생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싶은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짓는 나를 설득하기 위해서 한 말은 백 퍼센트 틀린 말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 학생보다 몇 곱절의 시간을 장애인들과 함께 지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에게 '그건 네가 제대로 겪어보지 않아서'라는 프레임으로 설득하려던 학생의 시도는 오히려 더 심한 반발감까지 불러일으켰다. 때문에 그날의 수업은 교재 진도를 나가지 않고 소수자들이라고 일컬어지는 대상들을 인식하고 있는 우리들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해보기 시작했다. 학부모들이 들으면 퍽이나 서운해할 일이지만, 이러한 이야기들은 중학교 3학년 학생들과 함께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화의 결과를 말하자면, 생각보다 많은 학생들이 소수자라 일컬어지는 대상들에 대해서 일종의 시혜적인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불쌍한 사람들, 우리가 도와줘야 할 사람들, 호의를 베풀어야 할 사람들이라는 입장을 전반적으로 공감하고 공유하고 있는 듯했다. 물론 이러한 시각 자체에 큰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하는 것을 어렵다. 하지만 그들이 소수자를 나와는 다른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근본적인 문제는 인정하거나 간과하고 넘어가기엔 위험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소수자들에 대한 복지나 도움에 대한 인식들이 확산된 것은 맞지만 여전히 '그들와 우린 다르다'라는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각이, 장애인 복지시설에 가서 매주 봉사를 하고 있으면서도 장애인들에 대해 왜곡되고 굴곡된 인식을 성립할 수 있게 해주는 토양이었던 것이다.
나는 장애인 복지시설에서 체육교사를 하시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아버지는 교사일을 하고 계셨기 때문에,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제자들과 어울렸었다. 내가 아버지 학교에 가서 놀았던 적도 많았고, 아버지가 제자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 함께 식사를 하는 경우도 많았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장애인이라고 불리는 아버지의 제자들과 내가 뭐가 다르다는 건지, 혹은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면서 자랐다. 그냥 아버지의 제자들이고, 나와 잘 놀아주는 형, 누나들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다름에 대한 인지를 처음 강요받은 것은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땐, 학교에서는 장애인들에 대해 잘 이야기하지 않았다. 몸이 불편한 사람이라는 이야기 정도로만 그들을 표현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대할 때 항상 이야기하는 것을 '우리가 도와줘야 한다'라는 말 뿐이었다. 오히려 장애인들에 대한 이야기와 다른 경험은 어릴 적부터 다녔던 교회에서 주로 이루어졌는데, 동네에 있는 복지시설에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봉사를 나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거기서도 마찬가지였다. 장애인들은 우리와 다르고, 그래서 우리가 도와줘야 한다는 시선에서 좀 저처럼 벗어나지 않았다. 행여 장애인들을 이야기하면서 상찬 할라치면,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이 그렇지 않은 비장애인들보다 더 희망적이고 열심히 살아간다며(교회였으니 예배와 기도도 더 열심히 한다며) 우리가 배워야 한다는 비교를 통해서만 이었다.
이제와 비겁하게도 고백하자면 나는 당시에 이러한 시각들이 다소 혼란스러웠다. 이 고백이 왜 비겁하다고 하냐면 당시의 혼란스러움에서 나는 세상이 이야기하는 시각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퍽 고민을 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어릴 적부터 그것이 왜 다른 것인지, 그리고 왜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인지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지 않았다. 그 인지를 주입한 것은 나의 경험이 아니라 사회였고, 사회화를 맡고 있던 공교육이었으며, 평등과 사랑이 최대의 가치라고 내세우던 종교였다.
편견이 깃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다름을 인정한다는 모호한 개념보다는 다름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드는 환경의 조성이 필요하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곤 있지만, 그 말에서조차 함정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나와는 다르다는 것을 감지하는 것부터 편견은 시작된다. 다르다는 것도 판단의 일종이고, 판단은 대상을 배제할 명분이 되기 때문이다. 타인을 자의적 해석을 통해 대상화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대상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기 쉽다.
또한 다름에 대한 인식은 나와는 다르지만 대상에 대한 의미부여를 위해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자폐를 가진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서번트 증후군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러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생활한 이들을 이야기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예들을 강조하며, 장애인들을 이야기할 때 역경을 딛고 일어선 인간승리의 스토리가 주를 이룬다. 이러한 시각들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언급된 대상들에 대해 우리가 인지할 때 언급된 요소들 이외의 것들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면 우리가 특정한 대상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지의 문제지점을 짐작할 수 있다.
장애인이면서 코미디언이자 작가인 스텔라 영(Stella Young)은 TED 강연("I'm not your inspiration, thank you very much.")을 통해서 장애인들을 '영감을 주는 포르노(inspiration porn)로 소비하지 말아달라고 이야기한다. 그녀가 강연에서 과격하게 포르노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비장애인들의 기준에서 '다르다'라는 시각으로 장애인들을 대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그녀의 강연 내용을 보면 인지하는 기준(사실 판단하는 기준) 자체가 비장애인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에, 장애인들은 비장애인들과 비슷한, 혹은 지극히 평범한 성과를 이룬다고 할 지라도 역경을 이겨낸 인간 승리의 표상으로 소비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을 인지하고,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거의 모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그 외의 모습들은 철저하게 배제되고, 무시되며, 때로는 혐오되기도 한다. 봉사활동 우수상을 받던 아이가 매주 찾아가 만나던 장애인들을 보면서 그들을 혐오했던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우리가 주변의 소수자로 규정되어 있는 타인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단지 그들과 우리의 '다름'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아니, 사실 함께 살아가는데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불필요한 요소일지도 모르겠다.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내 기준에서 그것을 판단한다는 숨은 구조들이 뒷받침하고 있는 생각이다. 자신들이 구축해 놓은 세계의 흔들림을 좀처럼 용납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시혜적인 입장에서 다른 것들을 인정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예로, 우리가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기는 대상들은 대개 소수자이거나 약자인 경우가 많다. 상대적으로 비교 우위를 인지하고 있는 이들에 대해서 우리와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는 이야기를 적용하는 경우는 없다. 때문에 다름을 인정하자는 말은 틀림으로 과격하고 공격적인 수사를 중화시키는데만 복무했을 뿐, 실질적인 사고의 전환이나 세계관의 변화까지를 추동하기는 어려운 말들이다. 그 말은 시작점일 뿐, 종착점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 기준과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함부로 판단하고 공격적으로 대하는 것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공유했다면, 이 수사는 되도록이면 빨리 폐기하는 것이 좋다. 확대 재생산을 하는 것은 오히려 더위 험하다.
때문에 결국엔 모든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있을 수 있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과일바구니 안에 여러 종류의 과일들이 뒤섞여 있어도 우리는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진 않는다. (과일에서 내뿜는 성분 때문에 숙성이나 부패 영향을 미치는 것 정도는 일단 접어두고 생각해보자.) 여러 종류의 과일이 한 바구니에 들어가 있을수록 값어치가 더 나가는 경우도 있으며, 우리는 그 모습을 보고 아름답다고까지 이야기하기도 한다. 근래 들어 공동체를 이야기할 때, 용광로와 같이 모든 것들을 녹여내 하나의 모양을 이루는 것보다 과일바구니와 같이 다양한 모습들이 공존하는 것을 모델로 제시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것들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 안에 속한 우리들은 '인간' 혹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일한 생명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그 안에서 누가 누구를 인정한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고 교만한 생각일 수 있다. 장애인과 나는, 인종이 다른 사람들과 나는, 여성과 나는, 성소수자와 나는, 사회적 약자와 나는, 전혀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이 아니다.
클리셰 같은 말이지만 장애인을 거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사회가 장애인에 대한 복지가 잘 되어있는 사회라는 말을 한다. 모든 대상들이 서로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공존하면서 서로의 차이를 외재적으로 강요받지 않는 것. 그것이 정말 좋은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을 꿈꾸는 것이 민망해진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상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현실성 없는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그것이 맞다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마저도 하지 못한다면 정말, 이 세상의 의미 있다고 선전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