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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윤 JiYoon Park Nov 02. 2017

영원한 이주

내 주소지의 얄팍함이란

*해당 글에 들어간 글과 사진(영화 스틸 컷을 제외 한)의 저작권은 모두 글쓴이에게 있으므로 무단복제나 사용을 금지합니다.


모든 영화는 결국, 주인공이 '집'을 떠나 떠돌다 또 다른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이다. 이는 내가 영화를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서 말하는 집은 물리적인 집인 동시에 존재론적인 집이다. 약 2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집을 떠났던 주인공은 성장한 채 혹은 부서진 채, 그렇게 조금 달라진 모습으로 집에 돌아간다.

사진 - 박지윤


사실 나에게 있어서 이제 집이라는 풍경은 일반적인 집의 아늑한 형상이 아닌 낯설고 차가운 기차역으로 남아있다. 모르는 사람들이 오가며 금방 떠나야 하는 그곳. 기차역의 풍경을 볼 때면 늘 나도 모르게 '집'이라는 단어가 뜨겁게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고향이 아닌 곳에 있을 때면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고향에 돌아가면 “나는 왜 여기를 떠나지 못하는가”라고 질문하겠지. 어떤 장소에 있을 때마다 늘 이유를 찾아 헤매야만 했던 나는 "왜 여기에 있고, 이제 어디로 가지?"라는 질문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일종의 내 그림자로 남은 이 질문은, 앞으로 살아갈 시간 동안 나를 계속 따라다닐 것만 같다.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운명은 사랑, 이별, 노화 그리고 죽음이다. 거기에 향수병도 포함될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속했던 곳, 존재했던 곳으로 ‘돌아가려’는 보편적인 욕망 말이다. 한 곳에 뿌리를 내리려 하고 '내 것'이라 불릴 수 있는 관계들과 물질들을 쌓아가지만, 정착이라 믿었던 곳에 도달하면 우리는 또 다른 떠남을 마주하게 된다. 모든 게 정신없이 변하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게 태반인 이 시대에선, 우리의 내밀한 이야기가 쌓일 수 있는 집과 공동체가 없다. 호화로운 집에 살 건 집 없이 거리를 떠돌 건, 우리는 모두 '영원한 이주'라는 공동의 경험 아래에 놓여있다.



#1

익숙한 곳을 떠나 새롭게 정착하는 건 두렵고도 위험한 과정이다. 시간을 들여 쌓아온, 매끄럽고 견고해져 가는 내 집을 무너뜨리고 다시 처음부터 시멘트를 새로 바르는 그 지난한 과정. 힘들게 내려온 뿌리를 떠난다는 건 지금까지 이뤄온 것들에게 등을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인간은 ‘집’으로 대변되는 존재의 중심이 있어야 ‘제대로’ 떠돌 수 있다. 집을 잠시 떠났다가 다시 돌아가는 여행자들은, 돌아갈 곳을 품고 떠나기에 자유로울 수 있다. 반면 표류인과 방랑자들에겐 돌아갈 집과 그들을 기다리는 세계가 없고, 그렇기에 불안이 매 순간 자유를 좀먹는다.


2011년부터 40만 명이 넘는 시리아 국민들이 시리아 내전을 피해 자신들의 땅을 떠났다. 얼마 전 플로리다에는 허리케인이, 그리고 멕시코에는 강진이 찾아왔다. 이 모든 것들은 사람들을 고향으로부터 뿌리 뽑아버린다. 그들은 무너져 내리는 자신의 집을 버려둔 채 어디든 새로운 곳으로 가야만 했다. 난민이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흘러 들어간 건 자신의 집이 더는 집으로 남을 수 없기 때문이었고, 전쟁과 자연재해는 그들의 의지밖에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거쳐 쌓아 올린 세계가, 어떤 설명도 이유도 없이 그냥 누군가에 의해 짓밟힌 것이다. 집에 남아서 죽거나 아니면 집을 떠나 살아남거나 이 두 가지의 선택을 앞둔 인간에게 이미 삶은 증발해버린 상태다. 공간과 나 사이의 관계가 빈약해지고, 내 공간은 그저 내 몸으로만 남는다. 공간을 잃고 언어를 잃고, 관계를 잃고, 목소리를 잃은 그들은 점차 타지에서 존재 자체가 지워진다.

사진 - 박지윤


삶을 언제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기한도 알지 못한 채, 삶 이전의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배를 탄 사람들. 이민 노동자들 역시 일자리가 없는 고향에서 살아갈 수 없었기에 ‘더 잘 사는 나라’로 이민 노동을 갔다. 자신이 태어난 땅에서 평생 빈곤하게 살거나 혹은 삶을 잠깐 보류하더라도 떠나서 돈을 벌 거나,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기반이 없으면 인간은 인공위성처럼 떠돌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 삶을 구성하는 기반 대부분은 자신의 노력밖에 있다. 저절로 가지게 된 특권과 기반들, 그리고 그 기반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었던 또 다른 기반들. 누군가는 가지지 못한 기반들.


#2

Je vais partir

내가 아주 잠깐 프랑스어에 발을 담갔을 때 배웠던 문장이자 가장 좋아했던 문장이다. 왠지 모르겠지만, 몇 단어 알지 못하는 프랑스어를 재미 삼아 말할 때면 내 입에선 늘 "Je vais partir(난 떠날 거야)"가 제일 먼저 튀어나왔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내게 그렇게도 떠나고 싶냐고 묻곤 했다. 내가 떠나고 싶었던 건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기에 떠나야만 했다. 그러니까 영원히 떠돌기 위해 떠나는 게 아니라, 진짜로 돌아갈 곳을 스스로 찾아내기 위해서 떠난다고 생각했다. 내가 돌아가고 싶은, 되찾고 싶은 그 무언가를 위해서.


아주 가끔,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고 “내 삶이 여기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찾아올 때가 있다. 장소와 관계없이 분명 그런 시간이 가끔 찾아온다. 그런 시간에 내 몸과 정신은 지금 벌어지는 일들에 온전히 적셔져 있다. 그리고 난 여기에 있으면 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난 여기에 있으면 돼. 다른 곳을 돌아보거나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돼”라는 계시와도 같은 확신은 과거와 미래 따위에 귀를 닫아버리고 오직 '지금, 여기'에만 귀를 기울이게 해준다. "살다 보면 아주 때때로, 삶이 굉장히 명료해지는 순간이 온다. 사물은 매우 선명하고 세상은 너무 새롭다." 영화 <싱글맨>(2009, 톰 포드)에 등장하는 이 짧은 대사가 그런 계시와도 같은 순간에 대해 아주 적절하게 담아냈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자살을 생각하는 한 남자(콜린 퍼스)는, 갑자기 다시 살고 싶게 만드는 어느 밤, 그러니까 미적지근했던 삶이 다시 온도를 되찾는 순간을 맞이한다.

영화  <싱글맨>

하지만 그는 곧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이런 순간을 지속시키기는 버겁다. 그 순간들에 집착하지만, 다른 모든 것들처럼 사라져 간다." 비록 아주 잠깐이었지만, 이런 순간들에서만 나는 내가 삶을 살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기를 갈망하며 많은 것들을 하고, 떠나고 또 돌아온다. 결국, 삶은 고향을 찾기 위한 여정인 셈이다.


#3

영화 <패왕별희>(1993, 천카이거)에는 ‘회귀’에 대한 열렬한 소망이 담겨있다. 시대와 정부가 변하며 사람의 풍경이 달라지지만, '데이'(장국영)는 경극(京劇)이라는 변하지 않는 것에 기대어 불안한 현재를 지탱해본다. 그리고 그는 경극의 힘을 빌려 과거에 존재했던 단단한 연결성, 공동의 세계를 되돌리고 싶어 한다.


어릴 적 북경의 한 경극학교에 버려졌던 데이는, 늘 놀림을 받던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샬로'(장풍의)를 사랑하게 된다. 함께 '패왕'과 '우희'를 연기하며 경극 배우의 길을 닦아갔던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며 신뢰와 애정을 쌓는다. 하지만 최고의 경극 배우에 오른 샬로에게 사랑하는 여인 '주샨'(공리)이 생긴다. 이전의 관계가 점차 옅어지면서, 데이와 샬로를 엮어주던 경극이 각자에게 지니는 의미 역시 변한다. 경극 그 자체는 여전히 그대로지만. 그래서 데이는 더욱 경극에 집착한다. 군벌 정부, 중일전쟁, 문화 대혁명 등 거대한 사건들이 휩쓸고 가며 시대와 사람이 변해도, 경극에는 소중한 기억이 여전히 살아 숨 쉬니까.

영화 <패왕별희>

하지만 데이는 결국, 자신이 집착했던 경극 때문에 파국을 맞이한다. 공산당이 들어서며 문화 대혁명이 시작되고, 경극은 과거 전통의 잔재라고 규탄되며 경극 배우들이 인민재판에 끌려간다. 영원히 머물러줄 것만 같았던 경극도 데이를 떠났다. 그리고 심지어 데이의 과거를 폭로해 그를 위험으로 몰고 간 사람은 바로 샬로였다. 샬로는 자신의 목숨을 위해 데이와 쥬산을 배신한다. 사랑을 상실한 쥬산은 그날 바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데이는 십여 년이 흘러 다시 경극을 하던 중 '우희'의 모습으로 자살을 택한다.


갑자기 나 역시 공통된 세계를 영원히 잃어버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패왕별희>에서 장국영의 얼굴이 내내 품었던 그 불안감과 같은 두려움이었다. 우리에겐 진짜로 살아가는 '오늘 내 하루'를 지탱해줄 어떤 세계가 필요한 게 아닐까. 나를 지탱하는 세계를 누군가와 공유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계의 일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공통의 세계는 자꾸만 사라지고 있고, 우리는 세계에서 홀로 튕기어 나온 파편이 되어 간다.


삶은 어차피 파편적이며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것이기에 향수를 찾으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차창 밖으로 내가 다녔던 중학교와 어릴 적에 걸었던 길을 보는 어느 날, 마음속 어딘가가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들과 함께 동네를 산책하고, 집 앞 놀이터에서 오랜 친구를 우연히 만나는 것. 이는 내가 20살에 고향을 떠나며 분명히 상실해버렸던 일상이다. 정착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나지만, 어느 순간 이런 평범한 일상을 무척이나 그리워하고 있었나 보다. 내가 상실해버린 그 경험의 조각들을 나도 모르게 찾고 있었으니.


엄마, 아빠와 아주 오랜만에 함께 보내는 밤이 끝나버렸고, 나는 또다시 집을 떠나는 버스를 타야만 했다. 집에 머무는 동안의 매 순간순간에 엄마와 아빠가 내게 배어있었다. 하지만 서로에게 배어들어 함께 살아간다는 건, 의외로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허락된다.

사진 - 박지윤


#FIN

가끔 나는 나를 떠받치고 있는 것들의 얄팍함과 가벼움을 실감한다. 많은 것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많은 것들이 허상이며 시간 앞에서 힘이 없다. 하지만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들려주는 아무런 의미 없는 듯한 말들과 숨소리, 내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확신이 느껴지는 눈짓, 그리고 내 머리에 언제나 맴도는 어떤 노래와 몇 번을 받아 적었던 문장 몇 줄은 영원한 고향으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음악에 기대어 자신이 잃어버린 집의 흔적을 찾는 'kings of convenience'의 노래 ‘Home Sick’ 가사처럼.


Finding all my previous motives growingly increasingly unclear.

I’ve traveled far and I’ve burned all the bridges.

점점 희미해지는 내 지난날의 모든 열정을 찾으며 멀리 여행을 했고, 내가 건너온 다리들을 모두 불태웠어.


I believed as soon as I hit land all the other options held before me would wither in the light of my plan.

여행을 끝내는 순간 알았지. 나의 모든 선택이 미래의 빛을 시들게 해버릴 것을.


A song for someone who needs somewhere to long for homesick.
찾아 헤맬 곳이 필요한 누군가를 위한 노래.


Because I no longer know where home is.

왜냐하면 난 더 이상 내 집이 어디인지를 모르기에. 


집 근처의 어둡고 축축한 길을 혼자 걷는데,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지금 낯선 곳에 혼자 여행 온 것일 뿐이라고, 그리고 잠시 뒤에는 다시 온전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우리는 각자가 돌아가야 할 저마다의 방을 찾아야 한다. 그 방의 대부분은 ‘소비’가 차지한다. 우리는 대게 소비의 힘을 통해 비로소 나 자신을 완성하니까.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렇게.


하나의 장소는 늘 여러 시간을 한 번에 떠오르게 한다. 유기체인 우리가 사라져도 장소는 더 오래 남겠지. 어제 있었을 다른 누군가의 종강을 생각하며, 예전에 살았던 기숙사 앞을 지났다. 비어있는 방이 많았다. 여러 겹의 추억들이 쌓인 그곳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았다. 모든 물질적인 것들은 빌린 것이거나, 내 것이라 할지라도 언제든지 빼앗길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살아온 시간은 다른 형태로 변한 채 곳곳에 스며들어,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게 남아있겠지. 다만 이젠 시간마저 물질적인 토대가 있어야 얻을 수 있다는 게 슬픈 사실이지만.

사진 - 박지윤


이동이 잦을수록 나는 내 주소를 잘 외우지를 못했다. 주소는 너무 자주 바뀌었고, 내가 떠난 그곳은 금세 다른 누군가로 인해 대체되고 새로이 채워졌다. 내 주소지의 얄팍함이란. 갑자기 궁금해졌다. 모든 게 다 빌린 것들 투성이일 때 내가 돌아갈 수 있는 존재의 집은 어디일까.


나는 지난 5년 약 16번의 이사를 했고, 몇 개월 뒤에는 어디에 있게 될지 알지 못한다. 잦은 이사 속에서 또 새로운 곳을 찾아야만 한다는 의무감은 지금의 내 자리를 끊임없이 흔든다. 내 기억이 녹아든 낡은 물건들은 공간에 녹아들지 못한 채 또다시 다른 곳으로 튕겨 나가야만 한다. 하지만 어차피 모든 인간의 매 순간에는 안정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해냈다. 단 1초 뒤의 순간조차 완벽하게 불확실하다는 진실에서 연대를 찾았다. 그리고 나는 이 불확실한 매 순간, 내가 숨 쉴 집을 느끼기로 했다.


‘여기’가 내 삶이다. 다른 곳에도 있지만, '여기'에도 있다.


2017년 11월

글. 박지윤


*해당 글에 들어간 글과 사진(영화 스틸 컷을 제외 한)의 저작권은 모두 글쓴이에게 있으므로 무단복제나 사용을 금지합니다.

(커버 사진 - 박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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