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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윤 JiYoon Park Oct 08. 2017

기꺼이 떠나겠소

환상이 환멸이 될 때

*해당 글에 들어간 글과 사진의 저작권은 모두 글쓴이에게 있으므로 무단복제나 사용을 금지합니다.


엄청 대단해 보였던 것, 정교해 보였던 것들이 실은 아무것도 아닌 헐거운 것에 불과함을 깨달을 때가 있다. 내가 부러워해 온 많은 것들, 믿었던 많은 것들 대부분이 허상이었다. 밖의 허상을 보며 나의 내면과 비교해온 시간이 얼마인지. 환상이 환멸이 되는 순간은 언제나 힘겨웠다. 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자유를 주기도 했다. 무언가를 강렬하게 믿고 의지하다가 그 안에 숨어있는 비루함을 알게 되고, 혹은 그것이 주는 부자유를 깨닫고 나무 몸뚱이에서 기꺼이 떨어져 나오는 것. 그 독립 이후엔 언젠가 또 떠나야 할지 모르는 새로운 섬을 찾아 헤매는 순간들이, 평생 반복된다. 지금의 나에게는 정말 많은 것들이 도끼처럼 박힌다. 하지만 정말 많은 것들이 또 쉽게 뽑힌다. 그리고 이제는 나와 무관한, 영원히 상실된 세계로만 남는다.


#1

무언가에 대한 우상화와 숭배가 쉬운 시대다. ‘취향 존중’을 내세우는 대신, 추구하는 가치가 사라진 이 시대는 집단적 망각 상태에 빠진 게 아닐까. 반대편에 있는 다른 가치와의 싸움을 통해 제3의 결론을 끌어낼 수 없기에, 담론은 발전을 멈춰버린다. 우리는 이성적인 척하며 살아가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감정과 감상에 빠져 살아간다. 소외되고 파편화된 개개인은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다. 그저 같은 물건을 함께 소유할 뿐.


추구할 가치가 사라진 자리에 우리를 공동체로 묶는 것은 돈, 물질, 자극적인 욕망이다. ‘운명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묶여있지만, 우리는 부자유를 떠안은 채 조각난 파편들로 떠다니며 공허한 꿈을 좇는다. ‘나’라는 주체적인 개인으로 이질적인 타인과 함께 공동체에 존재하는 것, 즉 자유로운 개인들이 연대를 잃지 않는다는 이 꿈은 멀어져 버린 과거의 향수로만 남은 게 아닌지. 대화와 논의에 수반되는 지난한 시간과 고통을 회피하고, 서로를 듣지 않은 채 각자의 평행선만 걷는다.


사진 - 박지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믿는 것을 진심으로 의심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을까? 자신에 대한 의심은 독이며 '지는 것'이라는 가르침이 팽배한 사회에서, 우리는 스스로가 최고라고 믿어야 한다고 배웠으니. 왜 좋은지, 왜 옳은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근거 있는 지향'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좋아 보이는 것들을 따라가는 것에 급급한 '근거 없는 추종' 혹은 숭배만 넘실댄다. 잘 알지도 못하는 것들에 대해 단정 짓는 과잉된 자신감, 자신의 견고함에 대한 과한 신뢰가 폭력과 지배, 전쟁과 테러의 역사를 만들어 왔는데, 지금 우리는 그 과정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왜 좋은지, 그리고 왜 옳은지에 대한 질문을 소환하는 게 시급하다. 그 질문은 우상화의 끝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하고 자신의 세계를 비판해 볼 기회를 준다. 그때야 비로소 가치는 더욱 세밀해지고, 우리는 자신의 세계를 초월해 다른 세계를 담을 가능성을 가능성을 지닐 수 있다. 


한때 너무 무거웠던 내 머릿속 생각들을 떠올리면, 물에 빠져 축 늘어진 솜 덩어리가 떠오른다. 우울은 자신에게 지나치게 빠진 나머지 자신에게 질식당하는 것이니까. 이는 자아도취와는 다르다. 자아도취가 나에게 흠뻑 빠져서 한없이 가벼워지는 거라면, 우울은 나에게 흠뻑 빠져서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워지는 것, 겨우 빠져나오더라도 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무너지는 것, 물이 빠져나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증상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자아도취 또는 우울의 방식으로 자신에게 함몰되기를 강요당하는 시대이지만, 우리는 나만의 세계가 아닌 다른 사람의 복사본을 반복 재생할 뿐이다. '나만의 세계'는 타인의 세계들을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우울 때문에 자신에게 질식당할 듯 숨이 막혀 올 때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서 다니곤 했다. 

사진 - 박지윤


#2

“너는 원래 그래”라는 말은 매우 불합리하고 비인간적인 전제를 가지고 있다. 너는 과거에 그랬고, 지금도 그러고 있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혹은 그래야만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기대와 주문을 품고 있기에.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정의하는 기존의 말들로부터 떠나야 한다. 이 떠남은 단순히 몸의 떠남이 아니다. 기존의 관계들, 나를 정의해온 틀, 내가 존재해온 방식들을 버리고 그것들을 끊어 내는 걸 포함한다.


니체는 자신이 숭상했고 자신 스스로와 다름없었던 가치를 대변한 바그너를 떠났다. 밀란 쿤테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온 '사비나' 역시 모든 익숙함과 규율, 부자유로부터 떠났다. 그렇게 모든 것을 부정하고 모든 것으로부터 떠난다면, 남는 것은 무엇일지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를 이룬 것들, 나의 일부와 다름없는 것들을 떠나봐야만 결국엔 남는 게 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우상’으로 삼고 있는 것들을 과감히 버려봐야만, 우상이 깨어진 뒤에 남은 진심의 조각이라도 볼 수 있다. 때로는 혼자만의 긴 밤을 감당해야 한다. 


"무엇보다 내게는, 금지된 모든 것을 위반하고 과거와 이별하는 혁명이 필요했다." 

-로자 룩셈부르크- 

사진 - 박지윤


연결되면서 동시에 자유롭기. 그게 내가 관계에서 원한 것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연결되지도 못한 관계에 질식될 것만 같을 때가 더 많았다. 그럴 땐 원래 알던 사람들로부터 도망쳐서 나를 모르는 그런 곳으로 가고 싶었다. 나의 과거도 모르고 미래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나에 대한 같은 평가와 오명과 낙인들로부터 도망치는 상상이다. 나조차도 온전히 다 알 수 없는 나를, 특정한 방식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부터 멀어지고 싶었으니. 계속 그 관계 속에 있으면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들이 알던 과거의 ‘나’와 연속성을 지키며 존재하려고 하기에 새로운 ‘나’를 찾기란 어려우며 어느새 나의 본질이 특정한 방식으로 정해지는 것만 같았다. 변덕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새로움은 늘 자유를 주기에, 가끔은 기존의 관계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나를 하나의 모습에 가두는 나 자신으로부터도 떠나야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모순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말한 대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너무도 쉽게 자신의 신념을 바꾼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파편에서 나를 발견하거나 타인을 기준점으로 삼아서 항해하는 건 무의미하다. 모든 것은 끝이 나며 모든 사람은 떠나간다.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다시 얻기 위해 애쓰지 말자. 안락함과 아름다웠던 기억에 기대어 미래를 점칠 순 없으니.


Hero(sung by Family Of The Year)


Let me go 보내줘요.  
I don’t wanna be your hero. 나는 당신의 영웅이 되고 싶지 않아요.
I don’t wanna be your big man.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니죠.
Just wanna fight with everyone else. 그저 다른 사람들과 맞서 싸우고 싶은걸요.


Your masquerade. 당신의 가장무도회
Idon’t wanna be a part of your parade. 당신의 퍼레이드에 속하고 싶지 않아요.
Everyone deserves a chance to walk with everyone else.

누구든 다른 사람과 자유롭게 걸을 자격이 있는 걸요.


#3

지금 이 시대에는 고통과 침묵을 직면하기가 무척 어렵다. 눈과 귀가 피로하며 언제나 시끄럽다. 온통 화려하고 예쁜 것 투성이에 다들 자신이 최고라고 소리친다.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서 미니멀리즘에 구원을 요청해보지만, 미니멀리즘 마저 트렌드가 되어 그 본질을 잃고 있다. 추구해야 할 가치가 사라졌기에, 그저 고통을 피하기 위한 노력만이 행해진다. 우리는 우리의 우울과 고통을 화려한 볼거리와 소비로 없애버리려고 하지만, 고통을 마비시킨다고 해서 고통이 영원히 나를 찾아오지 않는 건 아니다. 고통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감각해져서 살던 어느 날,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부서져 버린 나를 확인하는 순간이 갑자기 찾아올지도 모른다. '고통'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무감각'을 두려워해야 한다. 


루이제 린저의 책 <삶의 한가운데>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제목만으로도 속 어딘가가 뜨거워지며 찌릿하던 때가 있었다. “삶의 한가운데에 있는 건 어떤 느낌일까?” 책을 읽기 전부터 난 ‘삶의 한가운데’라는 말의 낭만성에 젖어있었다. 하지만 그 책장을 덮고 내 몫의 고통을 감당하다가 다시 본 ‘삶의 한가운데’라는 제목은 ‘고통의 한가운데’로 읽혔다. 그리고 그게 그렇게 나쁘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고통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해부해가야만, ‘삶의 가운데’가 흐릿하게나마 만져볼 수 있지 않을까. 때때로 고통은 나를 파괴해 버릴지도 모르지만, 결국 우리는 지난날의 닳아버린 나를 파괴해봐야 고통 속에서 자그마한 진실의 찌꺼기라도 건져볼 수 있을 테다. 고통 더미에서 부서져 봐야 회복되는 것들이 있기에, 고통은 분명 삶의 정수를 품고 있다. 


#4

과거는 나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없다. 왜냐하면, 나 외의 것들은 나에게 고통을 주고 나를 잠깐 분노하게 할 수 있지만, 그 분노와 좌절이 결코 나를 집어삼키게 할 수는 없으니까.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것처럼, "미래는 어둠이고 그게 유일한 희망"이니까. 무한한 고통 속에서 썩어 문드러져 가더라도, 강인하게 남을 것이다. 오직 나만이, 나의 태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내 다음 순간을 창조할 수 있기에. 이 사회가 나의 가치관을 흔들고 나의 감정을 모조리 짓밟을지라도, 그것에게서 오는 분노가, 나를 집어삼키게까지는 하지 못하기에. 오직 나의 자유로부터 나온 선택만이 지금 모습을 선택할 수 있다. 유일한 내 표식인 홍채와 지문처럼, 나 이외의 것들은 절대 나의 모습을 선택하고 바꿀 수 없다고, 그렇게 믿고 싶다.


과거는 때때로 찰거머리 같다. 이를 이겨내는 건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도망치는 것. 시간은 알아서 자연의 섭리대로 흐르지만, 공간은 내게 달려있다. 시간이 약인 동시에 공간 역시 약이 될 수 있다.

사진 - 박지윤


나는 대게 무언가에 익숙해지면 떠나곤 했다. 그래서 언제까지 모든 것으로부터 떠날 수 있을지, 내가 어딘가에 닿을 수 있기야 한 건지 두려워질 때가 있다. 나는 그렇게 영원히 떠나고 싶은 사람이었다. 익숙함으로부터, 그리고 과거의 무게로부터, 기존의 말들로부터 떠나고 싶어 하는 나이기에, 그 어떤 것도 진득하게 사랑할 수 없기에, 그 이별은 자유를 주는 동시에 때때로 공허했다. 마치 집을 찾지 못한 채 떠도는 사람처럼. 


누군가는 하나의 길에 자리를 잡고서 하나의 집을 쌓는 동안, 나는 아직 유랑하는 중이라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나는 무엇을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돋아난다. 일로부터, 공간으로부터 그리고 사람으로부터 떠나려 하는데, 불안하지 않고 공허하지 않으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려는 나의 방식이 한동안 두려웠다. 매번 열정적이지만 단 하나에 열정적이지 못한 것도 두려웠다. 이렇게 떠나기만 해서 도달할 곳은 어디인지, 떠난 그다음에는 또 무엇을 붙잡고 살아야 할지에 대해 알 수 없었으니까. 어쩌면 나는 몸을 사려 온 건지도 모른다. 상처받기가 두려워서일까, 혹은 내 마음을 다 던지며 사랑할 또 다른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 여기에서 제대로 된 자리를 발견하지 못해서일까.


"그래서 너는 그 모든 불합리하고 마음에 안 드는 것으로부터 떠나서 어디로 가느냐”라고 물었을 때의 답은 아직 없다. 영화 <혁명을 하던 자들의 절반은 무덤에 묻혔다>(2016)에서 그들이 정확히 무엇을 위해 혁명을 하는지 몰랐던 것처럼, 나 역시 떠남의 목적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 지금의 방식에 안주하고 싶지는 않다. 안온한 자리를 그리워하지만 정착을 꿈꾼 적은 없었다. 과거와 미래가 사라지는 좁은 통로에 서 있는데, 내가 꿈꾸는 건 왜 정착이 아닐까. 일시적인 관계와 일시적인 주거, 일시적인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착이 아닌 떠남을 선택해도, 여전히 나는 내 존재를 확인받고 싶다. “나 여기 있어요”라며.

사진 - 박지윤


하루 대부분을 어떤 사람들의 시선 아래에도 있지 않은 채로 보낸 여름이 떠오른다. 나를 바라보는 건 저기 멀리 있는 나무뿐이었다. 그 나무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해서 내가 벌거벗겨진 것 같다고 느끼지는 않았고, 그건 엄청난 자유였다. 그러나 한 여름날, 혼자 뭔가를 하던 시간 속에서, 나는 타자의 시선이 그립기도 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보면 똑같이 진심으로 되돌려주는 인간들의 시선들이, 그리웠다. 


2017년 10월

글. 박지윤


*해당 글과 사진의 저작권은 모두 글쓴이에게 있으므로 무단복제나 사용을 금지합니다.

(커버 사진 - 박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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