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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윤 JiYoon Park Oct 07. 2017

이동의 미학

우리는 상품을 사고, 또 상품이 되겠지

이 시대에는 이동을 해도 이동이 아니다. 인터넷과 교통의 발달로 세상은 넓어졌는데, 너무 많은 공간이 동질화되며 사실 세상은 더 좁아졌다. 새로운 곳으로 가도 모든 게 똑같이 다가온다. 날씨가 좋아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던 어느 날, 무작정 버스를 탔지만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그 어디를 가더라도 비슷한 분위기, 비슷한 카페, 비슷한 양의 사람들을 볼 터이니. 무엇보다 나는 어디에 가던 소비자로 남을 테니. 내 옆의 행인 역시 나와 함께 '소비자'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우리를 연결하는 유일한 운명은 '고객님'이 된다.

 아흐마드 무르시 - '기다림' (1970)


#1

나는 목적지로 가기 위한 이동이 아닌, 이동 자체를 사랑했다. 그저 걷고, 버스 밖으로 움직이는 풍경을 보고, 비행기의 이륙을 느끼는 게 더 좋았다.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공간을 필요로 했기에. 하지만 때때로 이동은 무의미하며 전혀 새롭지 않다. 6월의 토요일. 주말의 서울에는 쉴 만한 곳이 없다. 그저 백화점이 된 길들 만 있을 뿐. 여러 카페를 둘러보지만, 그 어디에도 조용한 쉼을 청할 수 있는 곳은 없었고, 듣기 싫은 음악과 소음이 되어버린 대화 소리만 남았다.


낯선 길을 걷다가 새롭게 알고 싶은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데, 이제는 그 어느 곳도 그 어느 사람들도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먹고 입고, 새로운 물건에 대해 떠드는 것 외의 다른 방식으로 산다는 것은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다. 지금 이 시대에서 우리가 추구할 수밖에 없는 새로움은 새로운 물건을 사는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감각적 경험이 어려워질 때, 새로운 물건만이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길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새로운 물건을 산다. 하지만 오직 새로운 ‘소비’를 통해서만 만나는 이 ‘새로움’의 외피가 과연 우리의 존재를 새롭게 할까. 어딜 가나 관람객 혹은 소비자가 되는 우리들. 우리는 상품을 사고, 또 상품이 되겠지.


#2

1989년 11월 9일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사건은, 인간이 인간을 위해서 체제와 권력에 대항한 사건이었다. 자유와 인간을 향한 사랑이, 무거운 체제와 권력을 이긴 것이다. 장벽을 무너뜨리는 건 생존과 자유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그 장벽이 무의미함을 증언한 상징으로서도 중요했다. 벽의 붕괴는, 결국 내 옆에 있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공허한 관념보다 강하다는 걸 증명했기에. 


하지만 안전을 갈망하는 우리는 점점 장벽, 보안, 경계를 늘려간다. 가난과 죽음을 피해 국경을 넘는 사람들은, 여권 없이 국경을 넘는다는 이유로 범법자가 되곤 한다. 그 장벽들은 누구만을 위한 벽인가. 그 나라의 여권이 있다고, 그곳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여기는 내 땅, 너는 불법 이민자라며 선을 긋는 논리는 몇 천 년 동안 지속하여 온 인류의 땅따먹기 전쟁과 다를 바 없는데 말이다. 평화롭게 그곳에서 태어난 채 살아온 인디언을 내쫓고 ‘신대륙 발견’을 한 콜럼버스야말로 진정한 불법 이민자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의 후손들은, 땅의 경계를 누가 정했고, 그 경계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유효한 것인지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는다. 


"우리는 안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떠돌기 위해서 태어났다."
-이브 앤슬러-


어두운 밤은 위험한 곳인 동시에 무한한 곳이다. 왜 우리는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외부 요소로 인해, 내부의 무한함을 갉아먹어 왔을까. <타이타닉>(1997)에서 디카프리오의 대사로 등장한 것처럼, "오늘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새로운 누군가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그런 기대감" 속에서 살 수는 없을까. 물론 안전한 영역에서 벗어나 위험을 감수하는 건 두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태어난 목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너의 방과 나의 방이라는 각자의 공간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거리를 걸을 때, 무한히 뻗은 길과 하나의 공기 속에서 공간은 확장된다. 그래서 늘 비좁은 방들을 전전하던 나에겐, 걷는다는 것의 자유가 더 크게 다가왔다. 나를 위한 공간이 늘 부족했던 나에게 빛과 바람, 가로등, 그리고 휑한 거리는 늘 또 다른 집이었다. 나의 공간이 새로운 누군가의 공간과 뒤섞일 수 있다는 건 내가 돈 없이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자유일지도 모른다. 거리에서 우리는 본래의 이름도 신분도 공간도 잊은 채, 그저 함께 걷는다.

영화 <모아나>


'장벽'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영화 캐릭터가 있다. 바로 <겨울 왕국>(2013) 이후로 디즈니가 선보인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 모아나. <모아나>(2016)에서 '모아나'는 다른 디즈니 공주들과는 달리 세상을 구하는 영웅으로 그려진다. 바다의 선택을 받은 소녀가 자신의 섬을 구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단순한 서사지만 모아나가 세상을 구하는 방식은 좀 특별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해 설렘을 안고 시작한 모아나의 항해는 얼핏 서구 제국주의의 신대륙 개척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항해가 개척과 정복이었다면 모아나의 항해는 순환과 회복에 가깝다. 모아나의 목표는 적을 이겨 섬을 차지하는 것이 아닌, 적과 함께 바다 전체를 공유하는 거였으니까.


섬의 저주를 푸는 열쇠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에 있었다. 모아나는 저주를 푸는 테피 티의 심장을 찾기 위해 전통적인 금기를 깨고 바다로 간다. 그리고 마지막에 모든 이가 두려워하던 괴물과 연대해서 세상을 구해낸다. 괴물 데카는, 알고 보면 심장을 잃어버린 테피 티의 변한 모습이었다. 모아나는 테피 티를 본모습으로 돌려주고, 세계는 원래의 자리를 찾아간다. 내가 잘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적으로 몰아세우지 않고 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으려고 했던 모아나는 그 태도만으로도 지금 이 시대의 영웅이다. 우리는 안전해지기 위해 더 많은 벽을 쌓지만, 우리가 진짜 원하는 건 벽 없이도 안전한 세상이니까.


심장을 되찾은 테피 티는 여신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물길 속에서, 모투 누이 섬사람들은 다시 항해를 떠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원래 모두 연결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투 누이 사람들이 다시 시작하게 될 항해는, 그 연결 지점을 찾아가는 항해일 테다.


#3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출연작 <캠프 엑스레이>(2014)는 아주 기이한 만남을 그린다. 9.11 테러 이후 이유 없이 잡혀 온 아랍인 '알리'와 그들을 감시하는 미군 '에이미'의 허락되지 않은 우정이다. 감옥에 갇힌 알리가 수감자이지만 감시자인 미군 에이미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수감자다. 에이미는 군대의 감시를 당하며 이유 없이 갇힌 사람을 억압해야 하는 억압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작은 도시를 탈출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 군대에 지원했지만, 그녀는 결국 의미 없는 의무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수감자였다. 

영화 <캠프 엑스레이>


두 사람을 가르는 철창 사이로 흐르는 대화가 인상적이다. 그 대화는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서로에게 확인시켜준다. 철창에 갇힌 아랍인 알리가에이미에게 먼저 묻고, 에이미는 그 물음에 되묻는다.  


“넌 어쩌다 여기까지 왔니?”(알리)

“그러면 넌 어쩌다 여기까지 왔니?”(에이미)

“난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난 독일에서 왔어.

난 알카에다랑 상관없어. 테러리스트도 아니고… 넌 독일에 가봤니?”(알리)

“아니. 사실 외국에 가본 건 이번이 처음이야. 난 작은 시골에서 왔어. 사람들이 자꾸 떠나.”(에이미)


별 볼 일 없는 대화처럼 보이긴 해도, 이 대화 안에서 감시자와 수감자라는 경계가 흐려진다. 알리와 에이미 중 누가 수감된 자이고 해방된 자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게 된다. 다만 서로의 신분을 잊고 대화를 하는 순간만큼은, 둘 다 해방된 자이다. 


‘너는 거기서 나를 바라보며 내게 물었고, 나는 너를 바라보며 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웃었다. 그 단순한 과정이 우리를 지금 여기에 존재하게 했다.’ 

두 사람의 내면에는 분명히 이 하나의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감시자 일을 그만둔 에이미가 떠나고, 새로운 감시자와 함께 새로운 해리포터 책이 도착한다. 알리가 열어본 책에는 “넌 좋은 사람이야”라고 적혀있다. 알리가 감옥 밖을 나가 에이미를 다시 만날 날이 올진 불분명하지만, 에이미가 쓴 짧은 편지를 봤을 때 이미 그는 감옥 밖에 있었다. 감옥에서 알리가 해리포터를 읽을 동안, 에이미는 비행기에서 아랍문양으로 가득한 책을 읽는다. 두 사람은 공간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연결되어 있다. 천천히 넘어가는 각자의 책장 사이로, “너의 언어를 이해하고 싶어”라는 말이 들리는 듯하다. 감독은 미군 두 명이 좁은 공간을 반복해서 돌아다니며 ‘억류자’들을 감시하는 컷을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선택했다. 서로 감시하고 감시당하는 관계만이 허용되는 세계에서, 알리와 에이미는 유일하게 감옥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었다.


보이지 않는 테러,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사고, 손쉽게 오가는 사람 목숨. 평균수명은 길어졌지만 우리는 죽음에 더 가까이 있다.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쉽게 날려버리는 죽음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이 가까운’ 위치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테러에 대한 공포는 사람들을 더더욱 집 안으로 몰아넣고 있고 사람들 사이의 벽은 커져만 간다. 다른 피부색, 다른 국가의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 속에서 내가 다닐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은 제한된다. 나는 내 목숨을 영위하기 위해 집 안을 벗어날 수 없다. 테러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하고 사람들 사이의 불신이 커지며 이질적인 것에 대한 배타심 속에서도 ‘삶’이라는 게 존재할까.


단순한 세 문장을 떠올려본다. 

‘너는 거기서 나를 바라보며 내게 물었고, 나는 너를 바라보며 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웃었다.

그 단순한 과정이 우리를 지금 여기에 존재하게 했다.’


#FIN

우리는 엄청난 새로운 것들, 넘쳐나는 옷과 음식, 유용한 정보들 그 모든 것들을 움켜쥐고 나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만, 완전한 나 자신, 그리고 완전히 나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이며 누가 정한 것일까. 만약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없다면, 아무것도 내 것이 아닌 동시에 그 어느 것도 내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사진 - 박지윤


어느 여름낮. 비가 그쳐서 무의미해진 우산을 지팡이 삼아 걸을 때 나는 마치 내가 나그네라도 된 것 같았다. 나그네. 아주 어렸을 때 동화책에서나 들어보았을 법한 단어가 갑자기 내 머릿속에서 울리는 건 무엇 때문일까. 다른 도시들을 매일 거닐면서 매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나그네는, 사실 내 어릴 적 꿈이었다. 단지 내가 오래도록 걸어왔던 한 동네를 걸었을 뿐인데, 난 마치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도 걷고 있는 양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도 떠올랐다. 계속 이렇게 걷다 보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들을 모조리 끌어모아다가 하나의 방에 가둬 놓을 수 있을까. 걸으면서 나를 후비는 과거의 조각들이 모조리 쓸려 내려갈 수 있을까.


외국의 모르는 도시에서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혼자 앉아 있던 낮, 나는 철저하게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때 외국인 여자 두 명이 내 옆 테이블에 앉았다. 내가 듣는 건 그저 높낮이와 크기가 다른 소리일 뿐이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불과한데,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소리 들을 엿 드는 게, 그 대화가 내 곁에 있는 게 왠지 모를 위안이 된 적이 있다. 우리는 매일 어떤 존재들을 품고서 살아간다. 각자 돌아가야 할 저마다의 방을 품고서. 그 방은 노래 한 곡, 가족, 연인, 친구, 직업, 언어, 예술, 철학 등 우리가 사랑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와 눈빛에 기대어 살아간다.


2017년 10월

글. 박지윤


*해당 글에 들어간 글과 사진(영화 스틸 컷과 '아흐마드무르시'의 작품을 제외한)의 저작권은 모두 글쓴이에게 있으므로 무단복제나 사용을 금지합니다. 

(커버 사진 - 박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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